움직이는 정물화
그의 마지막 영화다. <24프레임>은 피터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들'의 실사화면으로 시작한다. 농촌과 민중의 삶을 붙든 화가의 그림답게 소박한 마을 풍경이다. 부감으로 보이는 빙판에서 얼음지치는 사람들 그리고 사냥꾼들의 개. 눈이 와도 저녁연기는 올라간다. 그리고 새가 날기 시작한다. 꼬리가 동그랗게 말린 개들이 움직인다. 그러면 애니메이션인가? 아니다. 브뤼겔 그림의 많은 인물과 동물들은 스토리를 만들어내지만 키아로스타미의 그림은 사실 로스코를 지향한다. 왜? 내러티브가 없기에. 묵언수행이 아니라면 하이쿠이기에.
형용사나 부사를 사용하지 않은 선사의 문장은 아예 주어와 술어마저도 생략한다. 그저 짧은 화두 하나를 던지는 식이다. 그가 수년 동안 찍은 작업은 대부분 흑백이며 바닷가의 파도와 들판의 무장하게 내리는 눈의 소리를 들려준다. 눈 내리는 동안 새, 소, 늑대, 사슴, 사자 등이 해변이나 숲을 묘파하는 주인공들이다. 사진에서 움직임의 화면으로 확장되는 지점의 <24프레임>은 딱히 해석이 필요한 영화는 아니다. 느끼면 된다. 세그먼트라 해야 하나, 4분 30초라는 기억장치를 둘러보자.
창문과 바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프레임. 뭐야? 영화는 섹시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들썩이는 것은? 젖소의 배다. 바다를 배경으로 얼룩소들이 좌에서 우로 계속 지나간다. 다시 회푸른 바다. 바닷가 흐린 하늘 아래 갑자가 쏟아지는 비. 철망 위를 걷는 주둥이가 긴 새 한 마리. 종종거린다. 번개와 비에 무심한, 저 나는 짐승. 다시 사선으로 긋는 비. 가끔 천둥벼락.
두 폭의 닫힌 창과 두 폭의 열린 창. 키를 넘는 나무위로 구름이 흘러간다. 들려오는 아리아. 확신으로 가득 찬 카메라 앞을 훅 지나가는 비행기. 페르시아에 온 선사의 사진 일기는 이순신의 바닷가 일기처럼 드라이하다.
고요를 표시하는 데는 바람이 제격이고 또한 앰비언스 오디오가 필요한 법. 두 번째 프레임의 눈 오시는 풍경, 움직이던 자동차가 멈추면 창문 밖으로 설원이 환상처럼 드러난다. 두 마리 검은 말이 사랑스럽게 춤을 추는 듯한 그림에 입혀지는 프란시스코 카나로의 탱고 'Poema'라니. 언어도단은 자동차 윈도우가 다시 닫히는 것으로 끝나고, 암전. 보이지 않는 운전자와 그가 보거나 상상하는 세계와의 고립일 것. 그래, 창밖을 보는 누군가 있다(끝까지 드러나지 않지만). 그냥 카메라를 대고 기다린 것 같지만 거기에는 분명 주관적인 관점이 있다. 혹, 복선?
강암이 그린 8폭 대나무 병풍 같다. 시적이다. 나무 꼭대기와 어두운 창문을 통해 드러나는 흐린 하늘의 화면에 흐르는 여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구름의 움직임과 나뭇잎의 떨림처럼 운율로 흘러간다. 닫힌 듯 열린 문은 도달 할 수 없는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일까. 열린 창과 바깥의 풀들, 새 그림자. 그리고 들려오는 아베마리아.
창문 밖 동물들
하나의 정적이 프레임 안에 펼쳐져 있다. 자작나무에 내리는 눈. 오래도록 기다린 자가 던지는 잠복의 파열음. 방심을 후회하며 쓰러지는 짐승. 급습 같은 총소리에 흩어지는 새떼들. 뛰는 순록 사이 절름거리며 온 길을 거슬러가는 뿔 달린 짐승. 선을 지향하는 이철수 판화에도 없는…
눈보라 몰아치는 설원에 한 무리의 양들이 굵은 나무에 동그랗게 머리를 대고 엉덩이만 보여주는 원무. 이빨 센 동물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 틈을 벌리지 못해 포기하고 지나가는 늑대. 눈은 오고 춥긴 하고 먹을 것 없는 삶과 반대로 눈을 이불 삼아 포만을 즐기는 짐승도 있다. 점프. 비도 오는데 뭐하지? '한 코' 하고 벌렁 누워버리는 암사자 장면은 노대가의 귀여운 유머다. 감람나무 언덕 배경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Z자 길에도 그런 순한 짐승이 공책을 들고 하염없이 뛰지 않던가.
서사력에 대한 에너지가 부족할 때 느끼는 비관이라고 딴지를 걸어 본다. 셔터만 눌러놓았을 뿐인데, 운발일까? 선사는 수많은 짐승들을 침묵으로 부르는 재주가 있다. 그는 빼고 덜어 끝내 단순함을 성취해 냈다. 마치 어두운 숲에 쏟아지는 빛과 그 빛 사이를 나는 날개 달린 짐승, 그것을 본 딴 종교인의 의복 같은 미니멀리즘은 지난한 과정을 이긴 자의 단순함이다. 간절하게 하고픈 이야기들을 다 털어버린 선사의 하이쿠 아닌 '할'이다.
창문 안 은유
꿈결 같다.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나무가 보이는 창문 아래 책상 하나. 거기 모니터로 보이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해>의 마지막 장면. 모니터에서 얼어붙은 이미지가 점차 움직이기 시작하고 커플이 키스를 시작하면 배경이 밝아진다. 모니터에 표시되는 'The End'.
<24프레임>은 고정된 시간을 붙드는 사진과 실시간을 흐르는 영화를 통해 움직임과 정지로서의 삶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창문 앞 나무와 새들의 조화와 공생 그리고 자연 속에 파묻힌 동물들의 고립과 포기를 통해 말없는 말을 들려준다. 그것뿐일까?
내러티브가 없어도 분명 은유가 있을 것이다. 순록과 늑대, 종종거리는 다리가 짧은 새와 빵빵한 젖소는 그냥 풍경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창밖의 눈과 바람과 흔들리는 나무와 동물들을 정물처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그가 남자든 여자든. 그는 바닷가에서, 설원의 자동차 안에서 누군가 함께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떠났을 것이고 그리고 돌아왔을까?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사랑은 계속 될 거야." 라는 OST가 힌트일 것. 다시 돌아온 바닷가, 창 넓은 집에서 누군가 고전 영화의 해피엔딩을 보고 있는 것이다.
자판을 두드리는 게 구차하다. 부사와 형용사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