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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 | 기획 [내가 본 영화]
우리가 두려워하는 먼 곳에 대해 가장 현실적으로 밀접한 탐험
<머나먼 여행>
임주어(2018-07-13 11:54:23)



자랑하고 싶은 영화

뿔뿔이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영화제 때가 되면 명절처럼 전주에 모인다. 나는 말하지 않아도 영화 티켓을 알아서 예매하고 상영관으로 안내하는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을 한다. 몇 년 째 이어온 이 업무(?)에 익숙해서인지, 영화제에 대한 적지 않은 부심 때문인지, 영화를 고르는 일에 무한한 자율권이 주어져서인지, 나는 영화를 고르고 예매하는 행위 자체에 순정한 기쁨을 느끼는 덕후가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영화가 친구들에게 반응이 좋으면 한 작품 더 소개하고 싶고, 그 작품이 영화제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면 어딘가에 써놓고 자랑하고 싶어진다. 올해는 <머나먼 행성>이 바로 그런 영화였다.

왜 이 작품이었을까. 10편의 국제경쟁작 중 어떤 게 좋을까 하고 리스트를 훑던 중,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한 장의 사진을 보았다. 푸르스름한 새벽빛 배경 사이로 한 곳을 응시하는 두 노인. 아주 먼 곳을 보는 것 같기도, 바로 앞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눈빛. 그중 한 노인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데, 마치 강아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느슨하고 편안한 얼굴이다. 무중력 상태에 놓인 듯 가만한 노인들, 그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카메라는 요양원과 기도원을 반쯤 섞어놓은 듯한 이스탄불의 낡은 건물 하나를 비춘다. 그 안에는 늙고 병든 노인들이 각자의 방에서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늘 하던 일을 반복하며 매일 똑같은 시간을 보낸다. 창밖에는 고층 건물 건설이 한창이다. 거대한 중장비들이 굉음을 내고 하늘은 누런 먼지로 덮여 있다. 위협적인 모습이지만, 그곳에는 노인의 심정과 다를 바 없는 힘없고 가난한 청년 노동자들이 산다. 네댓 명이 한 방에서 기숙하고, 이른 아침 고단한 몸을 일으켜 현장으로 튀어나가야 하는 삶. 어쩐지 노인과 청년의 시간이 기이하리만치 비슷해 보인다. 마치 이 청년들의 미래가 아주 가까이 있다는 듯, 이 노인들의 과거가 이미 그곳에 있었다는 듯.


노인은 한가지 이야기만을 한다

영화가 끝나고 GV가 있었다. 고층 건물 공사 현장을 일부러 찾아 촬영한 것이냐는 관객의 질문에 감독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학생 때부터 6년 동안 그곳에서 노인들을 만났는데, 시간이 지나자 어느 날 맞은편에 높은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마치 연출한 것 같은 장면은 현실의 그림이었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두 개의 공간을 쫓는 데만 열중하지 않는다. 보다 밀도 있게 다뤄지는 것은 감독이 개별적으로 만난 그곳의 노인들이다. 그들이 집착하고 천착하는 한 가지 행동, 한 가지 이야기다.


사진작가 노인은 카메라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조심조심 만지작거리다가 자동응답기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눈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눈이 보이지 않아. 사진을 찍을 수 없어.” 피아니스트 노인은 서정적인 연주를 마친 뒤, 젊은 카사노바 시절을 추억하며 이런 느낌으로 말한다. “난잡한 파티는 하나도 재미가 없다네. 다른 사람들의 벗은 몸까지 보고 싶지 않아. 그것만은 단둘이서 은밀하게 해야 해. 그렇지 않나?”

침대에 누워 앓고 있는 깡마른 노인은 매일 밤 차오르는 기침 때문에 잠에 잘 들지 못하면서도 귀신에 홀린 듯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하고 병적으로 주절거린다. 그의 방에는 작은 십자가가 걸려 있다. 당연하고 무심하게도. 어떤 노인들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매일 수다를 떨며 시간을 쓴다. 그들에게 엘리베이터는 이동수단이 아니라 놀이공간이다. 종일 엘리베이터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하는 대화는 서로를 향한 훈계와 잔소리, 익살스럽고도 씁쓸한 유머들이다. 그들은 무한한 시간 속에서 매일을 다급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같았다. 


아주 먼 가까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옆에 없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들이 반복했던 행동과 말은 무엇이었나 떠올리게 되었다. 매일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말을 주절거렸고, 어떤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기억하고 싶어졌다. <머나먼 행성>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먼 곳에 대해 가장 현실적이고 밀접한 탐험을 선사한다. 이 영화의 미덕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사는 인간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들이 반복하는 이야기 속에서 시간성을 끄집어낸다. 슬프지만 웃기고, 웃기면서 서늘한. 내가 잠시 사랑했던 그들은 지금 아주 멀리 있거나 아주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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