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6 | [문화저널]
여성과 문화
'삼천만원 있어?'
-성희롱 사건이 남긴 것-
여성문학연구모임(2003-09-23 15:48:01)
성희롱 사건이 장안에 화제다. 아니 그야말로 성희롱의 만발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빼놓지 않고 성희롱을 문제 삼고, "삼천만원 있어?"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성희롱이 술상 위의 오징어 다리처럼 질겅질겅 씹히고 있다. 국내 최초의 성희롱 사건이 이처럼 희롱 당하게 되는 데에는 참으로 복잡한 이유가 있는 듯하다. 우선은 그동안 직장에서 일상적인 일로 여겨왔던 '별 것 아닌' 문제로 웬 어린 여자가 법정에까지 가서 '소란'을 떠는가 싶더니 급기야 거금 삼천만 원이란 배상금을 받아내는 횡재(?)를 한 데 대한 충격이겠고 그 다음은 "어라, 이러다간 우리도 여자 얼굴 한 번 잘 못 쳐다보고 삼천만원 물게 되는 거 아냐?"하는 위기의식에서 오는 과잉방어일 것이다. 실제로 사건 직후 다수의 언론매체(일간지 만화에서부터 코미디 프로까지)가 사건을 다루는 시각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음을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느꼈을 것이다. 허나 그 사람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문제는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 유럽국에서 이미 1980년대에 정착된 성희롱에 대한 법적 조처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비로소 첫 걸음을 내디뎠다는 사살에 있고, 그 때문에 성희롱에 대한 개념과 그 기준의 불명료함이 가져다준 혼란에 있는 것이다. 과연 성희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성희롱의 피해자나 가해자가 도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내 제 1호 성희롱 사건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성희롱에 대한 개념 규정과 그에 따른 법적 제재가 좀 더 분명해져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이 사건의 장본인인 우영은 씨가 번역 출간한『이것이 성희롱이다』(조엘 프리드만 외, 여성사)는 이러한 절박함의 결과물이다. 선례가 없는 만큼 외국의 법조항이나 판례에 상당부분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적 상황도 그렇고,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성적 피해자로 만드는 물질적, 정신적 메카니즘이 놀랄 정도로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확인 시켜주는 이 책은 여러 가지 점에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건의 내용을 먼저 짚어보자. 조교로 근무하던 우영은씨는 교수로부터 성희롱(주로 불쾌한 신체접촉)을 당하자 이를 거부, 해임된다. 이에 자신의 부당한 해고와 그것의 원인이 된 교수의 행위를 교내 대자보에 게재했고 이것을 본 교수는 도리어 우영은씨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 이것에 맞서 정식으로 성희롱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 교수로부터 삼천만원의 배상금을 받게 된 것이 주 내용이다. 얼핏 획기적인 승소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상을 그렇지 않다. 성희롱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고용주, 즉 서울대학교 총장에 대한 법적 제재가 함께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한국 여 민우회와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이 주최한 토론회(『이것이 직장 내 성희롱이다』)에서 박원순 변호사는 "이번 우조교 1심 재판은 단지 가해자에 대한 과오의 인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평가함으로써 이 사건이 반쪽짜리 승리임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올바른 법률적 대안을 갖기 위해서는 "적어도 남녀고용평등법에 고용주가 성희롱에 대한 방지책과 책임을 지는 규정을 둬야 하며 성희롱을 당한 피해자가 구제받을 수 있는 절차 등을 명시한 사규도 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건 담당변호인 이었던 이종걸 변호사는 "어디까지나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수준에서 성희롱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합리적인 사람의 성적 모욕감이란 것도 모호하지만 고용주에게 책임을 부과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짚고 언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형사사건 대상인 성폭행이나 성추행과 달리 성희롱은 민사 대상이란 사실이다. 즉 그것은 '여성의 평등한 노동권에 대한 침해'인 것이다. 미국에서 성희롱의 피해자는 평등고용기회위원회를 통해서 공민권법 제7조(주로 고용차별을 다루는 조항)에 의거하여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되어 있는 것도 이런 근거에서이다. 그러므로 고용주는 부당한 성차별의 하나로 성희롱의 가해자와 연대책임을 지게 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성희롱이 주로 직장 내에서 직무 또는 고용관계에 있는 상사나 동료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는 해고의 위협이나 승진기회보장 등을 미끼로 한 성적 접근에서부터 특별한 이해관계는 없지만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불쾌한 언행으로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방해하는 것까지 이런 일련의 행위가 결국은 여성의 노동조건과 직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희롱이다』에서 분류해 놓고 있는 '보복형 성희롱'과 '환경형 성희롱'은 위에서 말한 다양한 양태의 성희롱을 편의상 유형화한 것일 뿐 둘 사이에 구분이 명확치는 않다.
여기서는 특히 직접적인 고용상의 불이익이 드러나지 않는 환경형 성희롱의 경우 어떻게 그것을 입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함을 밝히고 있다. 피해자가 성희롱의 행위가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는 것, 다시 말해 반복적인 성희롱의 패턴이 있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 성희롱이고 무엇이 아닌가의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일과 관련한 위협이 깔려 있지 않다면 단 한 번의 사건이라면 성적인 접근이나 심지어는 육체적 접촉의 요청도 성희롱이 도지 않는다. 또한 피해자가 분명한 말로 자신의 불쾌감을 표현했느냐가 관건이 된다. 이는 똑같은 행위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여성은 억지로 참고 마지못해 수용하는 남성들의 횡포를 정작 남성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 심지어는 직장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기 위한 충정으로 여기기조차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여성이 아무리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자신의 불쾌감을 분명히 표명하지 않은 이상 성희롱이 성립되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들이 성희롱으로 규정되는가. 아마 뭇 남성들의 초미의 관심은 여기에 있을 듯한데 안타깝게도 그 범위를 한정짓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참고로 미연방 평등고용기회위원회의 지침서에 따르면 시각적 행위(곁눈질하기, 응시하기), 언어적 행위(외설적인 언급, 암시, 농담), 육체적 행위(건드리기, 애무하기, 강간)와 사진 및 낙서까지 포함한 성에 기초한 원하지 않은 행위로 정의한다.
외국의 지침을 곧이곧대로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국내의 사무직 여성들이 체험한 성희롱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는 보도자료는 상당히 시사적이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은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해 왔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거기에 권력을 지닌 남성이라면 성을 도구로 여성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욕구도 커질 것이다. 이 때의 성은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이며, 목표는 피해자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능력이다. 이 점에 대해서 많은 남성들은 반론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남성도 성희롱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물론이다. 여성에 의한 남성의 피해뿐만 아니라 동성간에도 성희롱의 사례가 발생할 수 있음이 보도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권력 있는 지휘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아직까지는 여성에게 범해지고 있다. 왜 그런가?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동등한 실력을 가지고도 남성에 비해 형편없이 열악한 고용기회, 승진기회 앞에 서있는 여성들에게 '조건 이외의 자격'을 요구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더욱이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자고로 여자는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열등한 인간'이란 생각을 알게 모르게 주입 받으면서 살아온 우리나라 남성들이 직장 내의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일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피해를 당한 여성들은 지체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밝혀야 한다. 충분히 설명했는데도 납득하지 못하는 가해자는 법적 조치를 받아 마땅하다. 이 때 고용주가 책임을 벗는 길은 미리 성희롱에 관계된 금지 조항을 명시하여 피고용인들에게 숙지시키고 그 규정이 잘 지켜지고 있나 항상 감시하여 고용상의 성차별을 범하지 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