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고 싶을 때가 있다. 출퇴근에 얽매일 일도 지각 때문에 달리기를 할 일도 없는 자유로운 삶을 택했으니 한 며칠 떠나는 것이 뭣이 어렵겠나 싶지만, 누가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떠나질 못한다. 지금 씨를 넣지 않으면, 지금 아주심기를 하지 않으면, 지금 풀을 매주지 않으면 한해 농사를 망치니까 농부의 사장님은 토마토, 딸기, 고추다. 다행히 나의 작물은 밀, 상대적으로 밀 사장님은 직원에게 출근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흙과 바람이 키운다. 그런데 나도 매인다. 소꿉놀이 농사 짓는 주제에 하루도 집을 비울 수가 없는 까닭은 또 다른 밀과 보리 때문이다. 밀과 보리는 작년부터 키운 흑염소 남매다. 동네 언니들은 "그러게 왜 염소를..." 하며 혀를 끌끌끌 차곤한다. 난들 알았나. 개 집사, 고양이 집사의 애환은 들어봤어도 염소는 그저 풀만 뜯기면 되는 한가로운 짐승인 줄 알았던 것을...
그러게 왜 염소를 키웠을까. 모든 시작은 밀밭 때문이었다. 오래 묵은 밭에 이미 안방마님이 되어 있던 칡넝쿨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차에, 동네 어르신들은 "그거 풀약 찌끄러야지" 하셨고, 누군가는 소금은 한 바가지씩 뿌리에 넣으라고 했고, 누군가는 끝없이 순을 따다보면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중 가장 솔깃했던 솔루션이 염소를 키우는 것이었다. "염소는 입맛 없을 때 먹는 게 100가지는 되지. 평소에는 999가지를 먹는데, 그 중 제일 좋아하는 게 칡이야" 가장 친환경적이면서, 내 손이 덜 가는 일이 염소를 키우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대체로 한가하던 작년 3월, 태어난지 3개월 쯤 되었던 귀욤귀욤한 아기염소 염소 밀과 보리는 청년공유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각목과 합판을 이어붙여서 지붕이 있는 작은 집을 이틀에 걸쳐 뚝딱거리며 만들어주고 매일 아침 풀을 뜯으러 강가나 밭으로 나갔다. 작은 아기염소들과의 산책은 여유로운 삶의 한 컷처럼 SNS를 장식하기는 좋았을지 몰라도 실상 염소들을 풀밭 출근 시키는 일은 아침부터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일이었다. 조금 게으름을 피우며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을 즈음이면 밀과 보리는 사정없이 나를 깨웠다. 전날 아무리 배가 빵빵하도록 풀을 뜯어 먹었어도 다음 날이면 열흘은 굶은 애들처럼 울어댔다. 줄을 매어 데리고 나갈 때면 절대 얌전히 따라오는 법이 없어 질질 끌려가거나 끌고가야만 했고 여럿 사는 집에 행여 냄새 민원이 날까 빈 축사를 꼼꼼히 청소하는 일도 빼먹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좋을 생각이 떠올랐다. '보리밭 200평을 염소들에게 내어 주자!' 이미 보리밭은 보리 농사를 처절하게 망친 후로 개망초와 사상자, 개모시풀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밀과 보리를 위해 차려놓은 평생 밥상이니 더 이상 염소들에게 매일 일도 없겠지. 염소들이 신나게 싸 놓은 동글동글 커피콩 같은 똥들은 땅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니 치울 일도 없겠지. 자유다! 정말 신묘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우리 셋이 자유를 얻었던 날, 넓은 초원에서 뛰어다니며 좋아할 것 같았던 염소들은 서글프게 울었다. "얘들아, 지금은 집에 가고 싶겠지만, 너희도 원래 야생이었어. 마음껏 풀 뜯고 뛰어다니렴." 돌아서는 등 뒤로 마치 날 버리고 가지말라 는 듯 염소들의 긴 울음소리는 골짜기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우리는 평화를 찾았을까. 다행히 200평 풀은 두 마리 염소들이 가을까지 먹기에 충분한 양이었고, 동네 할머니들도 곶감 말리려 깎아둔 감 껍질, 고구마 거두고 남은 줄기들을 염소 주라며 내어주시곤 했다. 바깥 생활이 잘 맞았는지 배는 늘 빵빵했고 털은 반지르르해졌다. 물론 항상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몇 번의 탈출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겁이 많은 염소들은 멀리 도망가기는커녕 집을 찾아오는 게 보통이라 나중에는 탈출도 일상이 되었다. 허술한 말뚝과 그물로 엮어둔 울타리는 어찌나 틈새가 많은지 어느 덧 어른 염소가 된 밀과 보리가 마음만 먹으면 들어왔다 나갔다 했는데, 처음 염소 탈출의 제보를 받았을 때는 사색이 되어 달려갔지만 그들은 여유롭게 풀을 뜯어며 나를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탈출의 이유는 간단했다. 겨울이 오고 있었고 울타리 안의 땅은 이미 초록에서 흙빛이 되었으니까.
염소들의 겨울 나기는 쉽지 않았다. 흰 눈이 세상을 덮던 때 염소들은 겨울 보금자리로 이사를 했다. 다시 매일 염소들 밥을 챙겨먹이는 집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2월엔 밀과 보리의 첫 아이, 콩이가 태어났고, 세 마리로 늘어난 골칫덩이들은 우리 집 텃밭의 양파며, 배추, 캐모마일 등을 하나 둘 먹어치웠다. 설상가상 기골이 장대한 수컷 염소가 된 보리는 걸핏하면 나를 들이받는다. '아이고, 차라리 내가 칡뿌리를 캐는 게 쉬웠을까' 하며 생각없이 일 저지르는 성격을 탓해봐야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그냥 보리랑 레슬링 몇 판하고 땀 좀 흘리면 되지...
어느 날 SNS에 올린 글.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 염소와 강아지 때문에 여행을 할 수 없다면 염소와 강아지와 함께 텐트 하나 둘러매고 사부작 사부작 걷는 여행을 일주일 쯤 해봐도 좋겠다" 누군가는 댓글로 "그렇게 여행하고 책으로 내면 여행서적 판에서 베스트셀러 예감!"이라며 호응을 했다. 이웃 동네 언니는 염소와 여행하는 그림을 그려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상에 그칠 뿐 말 안 듣는 염소들을 100미터 끌고가는데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몇 번 뿔에 받히는 정도가 현실. 그런 얘긴 아마 베스트셀러는 안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