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도마
부엌칼이 스쳐간 자리가 곱다.
마늘도 푸른 고추도
아침과 저녁나절의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서
사각사각 잘려나가곤 했다.
생선과 고기가 다루어지며
제 비린내를 버릴 때에도
그리 쓸쓸하지 않았다.
도마 위에서는
어린 것들이 입맛을 다시며
모락모락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어머니는 떠나고 없다
나무의 향이 사라진 도마 위로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단 한 자루의 칼날이
수천 날을 비스듬히 엇갈리며
남아 있을 따름이다
정갈히 곱다
김영춘
보통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건져 올리며 주목을 받았던 진안의 공동체박물관 '계남정미소(관장 김지연)'가 오랜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이번 전시 주제는 무던한 견딤 속에서 평생 동안 온몸으로 칼을 받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도마'. 전시는 지난 8월 3일부터 26일까지, 매주 주말에 진행됐다.
참여 작가는 양순실(서양화), 이일순(서양화), 한숙(서양화), 이봉금(동양화), 고형숙(동양화)과 만경제재소 유성기 사장, 김지연 계남정미소 관장(사진작가), 시인 김영춘, 장우석 소목장 등이다.
도마전은 김제에서 제재소를 운영하는 유성기 사장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김 관장은 "계남정미소는 시골 벽지에 있어서 뚜렷한 주제로 사람들을 끌어 올만한 매력이 있어야 했다"며, "그가 하도 쉽게 도마라고 말해서 몇 초 만에 내 귀를 스쳐가던 단어가 갑자기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애매하지만 아주 흥미 있는 주제"였다고 말했다.
"도마처럼 단순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목적이 단순하니 형태도 단순할 수밖에. 지가 아무리 꾸미고 가꾸어도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 수는 없잖은가."
그런 도마에 김 관장은 애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선이 가는 순간 그것의 처연한 삶이 애절하게 느껴졌다. 김 관장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몸으로 칼을 맞아야 하는 운명적인 태생을 알기나 할까. 수만 번, 수억 번 이어지는 시간의 부대낌 속에서 때로는 칼보다 더 질기게 버텨 낸다"며, "그 무던한 견딤이 서럽다"고 말했다.
제재소 주인이 제안을 했지만, 김 관장은 좀 더 색다른 전시를 해 보고 싶어 봄부터 매일 도마를 보고 쓰다듬고 생각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계남정미소가 문을 여니 멀리서 찾아오는 분들에게 좀 색다른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는 게 김 관장의 설명이다.
그러나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도마가 보여 줄 수 있는 한계에서 비로소 전시는 시작됐다. 나무를 다루는 것이 업인 제재소 사장의 도마가 선두에 섰고, 놀기 좋아하지만 일도 잘하는 장우석 소목장의 도마는 그 뒷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전주에서 활발히 작업하는 작가들의 토막잠 같은 그림이 각자의 개성을 내보이며 자리를 잡았고, 뒤이어 시인 김영춘과 김 관장의 도마가 늙은 어머니들의 도마와 어우러지며 한 편의 도마 축제를 완성했다.
오로지 평생을 아픔 속에서 살아온 도마를 위한 전시는 익숙한 것에 마음을 주고자 하는 따뜻한 전시였다.
진안군 마령면 계서리에 위치한 계남정미소는 지역에서 사라져 가는 작지만 소중한 역사를 기록, 전시하기 위해 지난 2006년 5월 개관한 공동체박물관이다. 2012년 9월 잠정 휴관에 들어갔다가 2015년 전국에서 모인 젊은 사진작가들의 요청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매년 한, 두 차례 특별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