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미'. 대체 누가 그토록 아름다운 이름을 홍등가 한편에 걸어 놓았을까? 그곳에서 일하던 누군가의 이름이었던 걸까? 왜 선미촌이라 불리게 됐는지, 유래를 아는 이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없지만 그곳은 여전히 선미촌이고, 밤에는 음울한 붉은 등이 거리를 비추는 성매매집결지다.
전주 성매매업소 집결지 형성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0년대 일제가 공창제도(관에서 성매매를 관리·감독하는 제도)를 시행함에 따라 전주에도 유곽이 들어서게 됐고, 당시 상생정(지금의 태평동)에 세워진 유곽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 접대부가 절반 정도씩 50명가량이 영업했던 유곽 다섯 곳의 정확한 위치는 역천로와 천변이 교차하는 중앙시장 바로 옆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 유곽은 해방 이후 미군을 위한 위안소로 잠시 이용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성매매 여성들은 전주 기차역(현 전주시청 자리) 너머 서노송동 선미촌과 완산구 다가동 선화촌으로 분산,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당시 기찻길 너머에 집결지가 형성돼 있던 탓에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아직도 '뚝너머', '뚝방촌'이란 지명으로 선미촌을 기억하기도 한다.
선미촌이 본격적인 성매매집결지로 확대된 것은 1960년대 초쯤으로 알려져 있다. 전주역 주변에 여관이 늘고, 늦은 밤 기차를 놓친 사람들을 상대로 호객 행위가 이뤄지면서 성매매 여성들이 증가한 것이다. 이후 1970년대에는 70여 세대의 성매매업소가 기찻길 뒤편으로 들어섰고, 1980년대 80여 세대로 늘면서 호황을 맞았다고 한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 호객 행위가 금지되면서 지금의 유리방 모습으로 변모했고, 건물의 규모 역시 2~3층으로 대형화되기 시작했다.
2000년과 2002년 발생한 군산 개복동 성매매업소 집결지 화재 참사를 계기로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면서 80~90여 곳에 달했던 성매매업소는 같은 해 60여 곳으로 줄었고, 2014년부터 선미촌 정비를 위한 시와 민관협의회의 노력에 따라 현재는 약 30여 곳으로 그 수가 대폭 감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