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7 | [문화저널]
저널이 본다
월드컵과 최루탄 연기, 그리고 장마비
윤덕향(2003-09-23 16:44:58)
축구 중계를 보기 위하여 근무시간을 조정해야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국민학생들까지 수업대신 중계방송을 보고, 시험을 늦추기까지 했다는 등 온 나라가 월드컵 축구에 몰입된 날들이었다. 월드컵 축구가 개막되기 상당히 오래전부터 언론에 의하여 충분히 조성된 축구열기는 온나라를 들끓게 하기에 충분했으며, 거의 끊임없이 채널을 바꾸어가며 식상할 정도로 축구 경기 장면이 T.V화면을 장식하고, 신문마다 축구이야기를 빼면 읽을거리가 별로 없을 지경인 날들이었다. 가히 우리나라의 국기가 축구임을 실증하는 것만 같은 나날이었다. 일시 등장하던 북한의 핵에 의한 위험성에 대한 안보의식의 결여나 일부 등장하던 사재기 열풍 일부 계층의 사재기에 대한 비난도, 상무대 의혹도 축구공을 따라 장외로 흘러가버렸다. 오로지 이 나라에는 축구만이 있는 것처럼 월드컵 축구에 살고 축구에 울고 웃는 날들이었다.
이런 월드컵 축구의 열기를 식히려는 듯 돌출된 일부 극렬한 학생들의 열차 점거나 UR국회비준을 반대하는 농민, 학생들의 폭력적 시위는 월드컵을 향한 관심을 잠시라도 가로막은 점 국민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한걸음 나아가 일부 노동자들의 파업과 그로 인한 서울, 부산 시만, 아니 우리 국민 그리고 기업들이 겪는 불편도 최소한 월드컵 축구가 진행되는 동안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폭력에 대하여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용납할 수 없다는 통치자의 의지는 언론마다에 흘러넘치고 있다. 정권의 정통성이 없던 과거 군부독재정권과는 달리 문민정부에서 행하는 통치는 모두가 민주적이고 모두가 국민적 지지에 바탕한 것으로 인식되고 이에 대한 비판이나 저항이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일부 집단, 즉 개혁을 부정하는 소수 집단, 또는 일부 불순한 집단의 불순한 의도에 바탕한 것인가가 극명하게 보도되고 있다. 과거 독재정권하에서의 행위를 답습하여 국가의 전체적인 발전이나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경쟁력을 약화 또는 저해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나 일부 불순계층의 폭력은 국민적 지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저간 각종 언론매체의 대체적인 시각인 것같다.
도대체 왜들 이러는 것인가? 참으로 일부 학생들과 농민 그리고 임의 단체적 성격을 지닌 단체에 가입된 노조원들은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체제에 도전하는 집단인가? 아니 북의 핵무장에 노심초사하는 마당에 북한에 동조하는 불순한 집단들이 발호하는 것인가?
학생, 농민들의 폭력적인 시위에 동조하거나 찬양고무하려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국가 경제에 치명적인 손해를 끼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주장에 무조건 굴복하자거나 그들을 역성들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문이나 방송에서 그들의 주장과 요구가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 답답하다. 행동양식이 바르지 않으니 그들의 주장을 알 필요조차 없다는 것같다. 아니 보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보도되는 대로 한다면 무조건 학생, 농민, 노동자들이 나쁜 집단임에 틀림없는 것같다. 그러나 참으로 그럴까? 일방적으로 언론이나 정부의 발표만을 믿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속아온 탓으로 매사에 의심쩍한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집권층이 유언비어라는 '카더라' 통신과 '유비'통신이 사실은 정확한 것이었던 시절을 살아왔다. 그리고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농수산물 시장 개방을 둘러싼 UR문제야 국익을 위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지난번 이회창 총리의 사임을 둘러싼 설왕설래는 정직과 청렴을 높이 치켜둔 문민정부의 정직성에 대하여 얼마간의 의문을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또 사법적 판단을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한겨레신문과 대통령의 영식이 벌리는 분쟁을 보면서 보도대로라면 과연 공부를 위하여 그처럼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언론과 정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번 일련의 사태가 폭력을 휘두른 학생, 농민, 노동자 등 불순하기 이를 데 없는 극악무도한 집단에 의한 작태이고 문민정부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행간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이번 폭력적 학생들의 주장은 UR협정의 국회 비준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무대진상을 제대로 밝히라는 것이었다. 또 그들은 현정부의 보수회귀에 대하여 불만을 터트리기도 한 것같다. 여의도 농민들의 집회는 당연히 UR협정의 국회비중 저지를 위한 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임시국회 UR비준안이 상정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던 뒷끝이니 학생, 농민들의 주장이 UR비준안과 관련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이런저런 농어촌 반전대책이 발표된 다음이니 관계당국의 언급이 없었더라도 임시국회에서 비준안이 다루어질 수 도 있음을 어림할 수도 있는 일이다. 어쨌든 이런 요구를 위한 시위라면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얼마든지 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충분히 국민적 공감대를 넓힐 수 있는 기회였음에도 농민, 학생들의 왜 스스로의 입지를 좁히는 폭력을 휘둘렀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정부당국이 그들의 평화적 집회나 시위를 보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폭력적으로 행동하였는지 참으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전철이나 기차 관련 노동자들은 국민적 비난이 쏟아질 것임을 뻔히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왜 파업을 했을까? 언론의 보도대로라면 정말 그들은 불순한 집단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민족적 비극 6.25사변이 있었던 6월, 그리고 '속이구'가 되어버린 6.29가 있었던 6월을 보내며 심심찮게 나도는 신공안정국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역대 어느 정권하에서 보다 월드컵 축구에 국민모두가 높은 관심을 쏟아야만 할 것처럼 내모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다. 혹시라도 월드컵 축구가 계속되고 계속되어 UR국회비준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발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 극렬한 학생들과 농민들의 폭력에 대한 비난, 파업과 분쟁에 대한 국민적 분노 속에 UR국회비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더구나 아니었을 것이다. 정직을 외치는 문민정부에서.
이제 월드컵 축구도 끝나고 지루하게 이어지는 장마비속에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각목을 치켜든 시위대와 최루탄 연기 속에 희뿌연 경찰의 모습, 구속되고 수배되고 체포되는 소위 불순분자들의 모습, 그리고 공권력 수호를 외치는 활자로 점철된 6공 시절의 철지난 신문을 펼쳐든 것 같은 기분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래도 문민정부이니 분명 앞으로는 가고 있겠지? 장마비속에 방향마저 잃지는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