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7 | [문화저널]
동학농민혁명, 그 역사를 바로찾자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지방사
-동학농민혁명백주년기념 학술대회-
편집부(2003-09-24 09:09:57)
1994년 동학농민혁명기에 경상도나 충청도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북접 연합부대가 서울로 진격할 때 남원에 진을 치고 있던 맹장 김개남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또는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에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끝내 금강을 건너지 못하고 패퇴하고 있을 때 황해도나 강원도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어디로 이동하고 있었고 그 규모나 전투양상은 어떠했는가?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학문적 연구가 진전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숱한 의문들이며 또한 반드시 밝혀져야 할 귀중한 역사적 사실들이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집념 어린 연구성과를 지속적으로 내놓고 있는 영산대학 박맹수 교수는 그 연구가 전봉준·동학·전라도라는 세 가지 개념적 범주를 어떻게 극복하고 확장시켜나가느냐가 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접근의 관건이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요컨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파편적 이해를 벗어나 이를 민족사적인 관점에서 종합하고 학술적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변동」이라는 주제로 지난 6월 10일과 11일에 열린 동학농민혁명백주년 기념학술대회는 이 같은 과제에 대해 그간의 성과를 점검하고 가능성을 나누는 자리였다.
동학농민전쟁과 지방사연구
서울대학교 박명규 교수가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섰다. 박명규 교수의 발표는 이번 학술대회가 왜 필요했고 또 어떤 방법론적 입장에서 출발할 것인가에 대한 기조발표로서의 성격을 지니는 것이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지방사연구”라는 주제의 발표에서 그는 지방사는 거시적 차원과 미시적 차원의 매개부분을 밝혀주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를 부여했다. 지방사는 이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매개적 역할뿐만 아니라 역사를 ‘살아있는 인간의 활동’으로 보다 생생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지방사연구가 지역간 비교연구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지방사연구에서 지방의 구체적인 단위는 그동안 도·지대·권역 등이 논의되어 왔으나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향촌사회의 운영원리, 농민전쟁에서 나타나는 저항과 대응의 조직원리 등에 비추어 볼 때 군현 단위가 적절하다는 것이 박명규 교수의 조심스러운 제안이다. 당시 조선사회에서의 군현은 가장 실질적인 내적 통합성을 지닌 사회적 단위였으며 향촌사회의 기본단위로 작동했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된다. 군현단위의 지방사가 현재의 행정관청에서 주관하는 『군지』차원을 벗어나 보다 객관적이고 치밀한 학문적 위상을 획득할 수 있을 때 한국사회에 대한 전체적 인식도 그만큼 풍부해 질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농민전쟁기 남원지방 농민군의 동향
박명규 교수의 발표는 이어진 약정토론과 다음날의 종합토론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으로 부각되었다. 지역연구의 일반적 원칙으로부터 접근방법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총체적 구성과 지방사 연구가 갖는 분절화 경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방사 연구가 갖는 역사적이고도 방법론적인 의의가 새롭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박명규 교수의 발표가 총론의 성격을 띈 것이었다면 이후의 발표들은 지방사 연구의 각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먼저 두 번째 발표주자로 목포대학에 진을 치고 있는 박찬승 교수가 올라왔다. 박찬승 교수는 1894년 남원지방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김개남 부대가 어떤 활동들을 펼쳤고 남원지방에서의 세력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의 작업은 남원유생 김재홍이 남겼다는 『영상일기』, 황현의 『오하기문』 또는 『동학란기록』등과 같은 자료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남원지방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시간대별로 정리한 것이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부 가운데 김개남만큼 그 사상이나 부대의 활약상이 진실화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 경구가 드문 까닭에 박찬승 교수의 발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다. 남원은 우선 교통과 군사의 요충이라는 의미가 있었다. 농민군은 남원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전남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영남방면으로의 진출을 위한 근거지가 되었다. 남원의 농민군은 인근 타지에서 몰려든 농민군의 수가 월등했고, 그 출신배경도 다양한 구성을 보였으며 다소 급진적이었다. 남원의 농민군세력은 10월 중순 김개남의 북상 이후 북상군과 잔류군으로 세력이 양분되었으나 북상군은 이미 진군의 시기를 놓치고 청주에서 일격을 당한 뒤 급속도로 무너져 갔으며, 남원에 남아 있던 화산당접 중심의 잔류군도 운봉의 민보군과 수성군으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고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남원은 집강소 시기 가장 활발한 자치활동을 펼친 지역 가운데 하나였으며 농민군의 위세가 당당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다만 김개남이 최후에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는 극형에 처해지면서 김개남 개인의 사상이나 정치관 등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한 상태로 여전히 학계의 주요한 과제로 남겨졌다.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
첫날 발표의 두 번째 순서로 충청지역과 경상지역에서의 동학농민혁명전개과정이 충북대 신영우 교수와 계명대 이윤갑 교수의 발표로 진행되었다. 충청지역은 전통적으로 동학의 교세가 자못 드셌던 지역이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중심지역은 전라도와 충청도였고, 그해 가을 동학농민군이 대일항전을 위해 무장봉기에 나서자 왕조정부가 설치한 임시진압기구는 양호도순무영이었다. 즉 호남과 호서의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뜻이었으며 이밖에도 충청도의 동학농민전쟁을 전해주는 자료는 충청도의 상황을 상당한 비중으로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지역상황은 일반 대중은 물론 학계내에서조차 잘 파악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충청도의 동학조직은 북접 교단의 지침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교주 최시형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학조직의 무장봉기를 불허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장옥을 중심으로 그 영향권 아래 있던 이 지역의 일부 대접주들과 도인들은 전라도의 개혁운동에 고무되어 곧 뒤따라 집강을 정하고 폐정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이 시기 최시형의 읍내 점거 금지는 보수 세력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했고 경군의 파견을 재촉했다. 기포령 이후 충청지역 농민군은 경기·강원·경상도에서 모여든 세력과 함께 논산으로 진격 전봉준의 남접농민군과 합세한다. 일본군과 경군 연합의 진격군은 세길을 통해서 남으로 내려왔고 각 군현의 민보군도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했다. 논산으로 합세하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목천 세성산에 거점을 확보하고 일본군의 남하를 막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진을 치고 남북접 연합농민군의 북상을 기다리던 세성산의 농민군은 서울을 지척으로 둔 까닭에 즉각 진압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고 세성산전투는 치열한 공방 끝에 농민군의 패배로 이어졌다. 이후 공주 우금치전투의 패배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농민군은 현저하게 그 세력을 잃고 궤멸되어져 갔으며, 충청지역은 동학조직의 궤멸과 엄청난 희생 끝에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1894년 경상도지역의 농민전쟁
대구에서 올라온 이윤갑 교수는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경상도 지역 농민군의 투쟁 상황을 동학교단 조직의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조사하고 농민군의 투쟁 상황을 동학교단 조직의 발전과정을 중심으로 조사하고 농민군의 활동상황을 소개하였다.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폐정개력이 약속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경상도 지역에서도 봉건사회의 개혁을 희구하는 농민들이 앞 다투어 동학에 입도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하층계급이었고 당대 사회모순의 최대 희생자들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사회질서를 갈구하며 동학에 새로이 입도한 농민군은 곳곳에서 반봉건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동학 상층부는 이 같은 혁명적 분위기를 억제하면서 폐정개혁에도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것은 이들 지도부의 현실인식과 혁명에 대한 입장이 다른 까닭이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교조신원과 교세확장에 있었고 이점이 이 지역 농민군의 활동을 제약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경상도 남서부지역에서는 8월까지도 유력한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지만 9월 이후 순천·광양포의 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반봉건투쟁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과 성격
다음날에 이어진 2부 발표 및 토론에는 강원도 지역과 황해도 지역에서의 농민군 활동상황이 소개되었다. 역사학연구소의 박준성 연구원은 적어도 개항 직전까지의 시기에서는 농민군의 활동이 그다지 활발하지 못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개항 이후 거듭되는 외지 관리들의 탐학과 사회모순의 심화로 점차 농민봉기가 빈번해졌다고 소개하였다. 강원도 농민군의 활동은 2차 농민전쟁을 선도하였고 이 지역의 농민들이 북접교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기 보다는 상당히 독자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은 박준성 연구원의 새로운 주장이었다. 강원도의 농민전쟁은 반봉건투쟁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투쟁이 곧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반봉건 반침략투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치기석이 지휘하는 강원도의 농민군은 서울로의 진격이 가로막힌 채 다른 지역과 연계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싸워야 했다. 결국 이후 강원도 지역의 농민군은 농민전쟁의 실패와 함께 무너졌으나 그 투쟁의 정신은 반일 의병투쟁, 식민지 민족 해방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역사를 진전시켜나가는 커다란 힘으로 작용하였다.
황해도 농민전쟁의 전개와 성격
마지막 발표는 국민대 송찬섭 교수의 황해도 지역 농민전쟁의 전개와 성격에 대한 연구였다. 황해도 지역에서 농민전쟁에 참가한 인물들은 주로 동학교단과 연결된 인문들과 스스로 동학교도로 지칭하는 인물 등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지역의 농민군은 다양한 계층이 참가했지만 주력부대는 山砲였다. 농민군이 처음 해주에 들어갔을 때 각 촌의 엽주가 8백여 명 가담하였다고 하며 그 뒤에도 이들은 광범위한 활동 폭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농민군의 수는 대략 3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지만 정확하지는 않으며, 농민봉기지역은 지도부를 중심으로 볼 때 해주지역이 가장 중심이었고 그 밖에 신천·장연·강령 등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번 학술대회는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있어서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주력부대의 활동양상에 치우쳐 있던 농민군의 활약상을 벗어나 전국적인 전개양상을 살펴봄으로서 그 폭을 넓히는 의미를 가진 소중한 자리였다. 이 지역에서 그동안 학술운동을 주도해 왔던 호남사회연구회가 주관하고 전북일보사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와 전북일보사가 공동으로 주최하였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전북은행이 장소와 경비를 협찬하여 지역문화의 발전에 대한 기업의 참여가 확대되어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소중한 성과도 동시에 거두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