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7 | [문화저널]
굿판, 교실, 그리고 극장
'동학농민혁명 백주년 기념「연극한마당」'을 닫고
곽병창 창작극회 대표(2003-09-24 09:23:06)
1. 들어가는 말
「연극제」라는 이름과 「연극한마당」이라는 이름 사이에는 제법 큰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애초에 「연극한마당」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내걸게 된 이유이다. 일제말의 국민 총동원령 아래에서 식민지 민중의 의식을 호도할 목적으로 치러졌던 친일어용 연극제가 그 이름의 효시라는 사실이, 아마 그 거부감의 첫 번째 이유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과 놀이 그리고 제의적 기능이라고 하는 연극 본영의 기능을 되살리기 위해서도 劇과 祭를 어설프게 엮어 놓은 이 이상한 조어방식이 또 하나의 문제였다. 그러나 명분상으로야 사실은 진작에 폐기되어야 마땅한 말이라는 점에 대부분 공감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동안 귀에 익은 말이어서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단어라는 생각도 물론 한편에 있었다. 「연극한마당」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예상했던 대로 소박하고 친근했다. 하지만 어딘지 학교나 직장 안에서 이루어지는 동호인 발표회 같다는 인상도 동시에 주었다. 이 두 가지 느낌 사이의 묘한 거리는 두고두고 생각해 볼 일이다.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한…”이라는 주제는 금년 들어 거리에서 언론에서 매우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조차도 무심히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겠지만, 올해가 백주년이 되는 해라는 정보 정도는 웬만큼 나누어 갖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물론 안다는 것과 그것을 기념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히 별개의 일이다. 아마 이처럼 동일주제에 의한 연극제 또는 연극한마당류의 행사는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흔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주제는 지금 우리들 동시대인들의 일상적 삶에 얼마나 절박한 것이었을까? 이것 또한 꼼꼼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행사의 이름으로부터 출발해서 한 가지 한 가지 짚어가다 보면, 그 진행과정의 자잘한 일들도 어느 정도는 보일 것이다. 또한 그 마무리를 위한 관리도 어느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2. 관객
「연극한마당」이 동호인들의 집안잔치 정도로 여겨졌으리라는 생각은 전체 작품을 관람한 관객의 숫자가 상상 밖으로 적었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는 증명될 수 있다. 전주 지역에서 벌어지는 최근 연극 공연의 입장객 수가 개별 작품 당 평균 2,000명 정도에 이른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보면, 한 작품당 평균 200여명 정도의 관객으로 만족해야만 한 이번 행사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의 자를 가지고 생각해 보자.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 환경을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어렵지만, 전문가들의 진단을 빌어보면 영상시대, 시각매체의 시대임이 분명한 듯 하다. 그밖에도 광고의 시대라는 말도 들린다. 내용보다 포장술의 개발에 급급한 듯 보이는 문화적 특성이 분명 불만스러운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대중문화로 쳐도 변방에 지나지 않는 이 지역일망정, 관객의식의 밑바탕을 형성하는 데에는 이미 중앙/주변의 구별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고전적인 대의명분이 관객의 관극 충동을 유발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렇다면 좀 더 다양하고 세련된 광고 전략만이 좋은 내용을 좀 더 많은 수용자에게 실어 나를 수 있다는 간단한 이치를 깨우쳤어야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 깨우쳐진 생각을 뒷받침할 만큼의 실무적 역량이 필요했다. 그러나 주최측의 이름으로 반성하건대, 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한다는 대의명분이 얼마만큼의 고정 관객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는 헛된 안도감에 빠져 있었다. 막상 이 대의명분이 관객들의 편안하고 화사한 주말을 사로잡기에는 오히려 거추장스런 방해에 지나지 않는다(-농민군 원혼들게 용서를 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행사가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 주제의 딱딱함을 벌충해 줄 만한 더 치밀하고 유연한 광고 전략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물론 그만큼의 광고만으로도 항쟁의 의미에 동참하는 뜻에서 연극 현장에 기꺼이 와 줄 것으로 믿었던 많은 후예들의 배반에 관해서야 별도의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이 점은 비단 연극한마당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불특정의 대중을 동원하려 했던 항쟁 백주년 관계 행사가 거의 비슷한 형편이었으니 말이다.
3. 주제
같은 논리로 항쟁 기념 공연이라는 이름을 단 여러 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 교과서적 상투성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마당극이건 무대극이건 또는 뮤지컬이건 공통적으로 항쟁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비장한 패배의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거의 예외 없이 닮았다. 비단 연극한마당에 출품된 작품들 말고도 이른바 「역사재현극」들의 잔치가 여러 달째 계속된 셈이다. 그러나 역사재현극의 경우, 꼼꼼한 고증과 방대한 스케일, 사실주의 연기에 능통한 배우들과 분야별로 전문화된 고도의 스탭진을 필요로 한다. 거기에다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그 전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줄 수 있을 만큼의 공연 시간, 이를 밀고 나갈 수 있을 만큼의 치밀한 구성력을 갖춘 극본 등, 무대 공연으로 충족시키기에는 위험 부담이 매우 큰 분야에 속한다. 이것이 공연물을 제작하는 입장에서의 고충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관객들은 오히려 통속사극보다 훨씬 다양하고 참신한 기법,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흥미의 끈을 놓치지 않고 지탱해 줄 만한 많은 장치를 요구한다. 당연히 지금의 관객들은 보다 수준 높은 재현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또한 열악하기만 한 연극제작 여건을 고려해 본다면, 본격적인 항쟁재현극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다소 무리인 것이다. 더구나 중극장 규모의 크기에 승강 장치나 회전 장치조차 전혀 없는 무대에 재현극을 보여 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적 관습이라는 전가의 보도 하나만을 믿고 관객을 향해 끊임없이 재현하려 한 대다수의 항쟁기념공연물들이 오히려 안타까웠다. 물론 그 중에도 그나마 화려하고 방대한 무대 효과와 많은 배우를 동원한 뮤지컬이나, 단순 재현에 그치지 않고 현재 농촌 현실과의 연결 고리를 탐색하는 작품, 영상 매체를 동원해서 다큐드라마의 기법을 원용하려 한 작품 등이 있긴 했지만 전반적인 주조는 역시 재현극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항쟁기념 특집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필름 등에서 이미 충분한 재현을 체험한 관객들로부터, 절실한 감동이 메아리쳐 돌아오기란 실로 어려웠다.
단순히 재현 일색이라는 점 못지않게 아쉬웠던 것은, 거의 모든 작품들이 다양한 군상들을 제시하는 일에 너무 인색하지 않았던가 하는 점이다. 항쟁의 주체가 되어 전면에 나섰다가 장렬하게 죽어간 장두들이나 무명 농민군들의 삶이야 당연히 으뜸에 놓여야 할 소재이다. 그러나 항쟁 기념 공연이라고 해서 반드시 “우리 편 영웅”들의 이야기로 일관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관군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려 볼 수도, 변절자의 교활함과 그 이후의 삶을 그려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싸우다가 무서워서, 또는 아내가 그리워서 도망친 농민군의 이야기는 연극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되는 것일까? 저 근엄한 정통 재현극이야 막강한 텔레비전에 맡겨 두고 좀 더 기발하면서도 흥미 있는 주인공들을 만들어 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그 당시 전라도 사람들 중에서 항쟁의 주역으로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숨죽이고 있었거나 암암리에 농민군들을 원망하고 적대시했으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그 적대세력의 후예들이 지금도 많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교과서적 접근 방법이 갖는 한계가 자명한 것이다. 이른바 역사를 밀고 가는 주역으로서의「전형」을 창조하는 데에 골몰한 나머지 당대 민중들에게 일어 났었음 직한 여러 삶의 細目(detail)들을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남는다.
4. 형식
또 하나 전언 통로로서의 극형식에 대한 경직된 태도도 읽을 수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배우의 말과 몸동작에 대부분의 정보전달을 맡겼다. 이것이 물론 배우들의 활달하고 역동적인 신체 기능에 의해 뒷받침되는 경우, 일정한 공연 성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더 다양한 빛과 소리, 특수효과의 도움을 동원했을 때 의외의 추가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7-80년대 마당극이 열린 공간에서 관객을 극의 일부로 끌어들이는 해방과 공유의 미학을 성취해 냈다면, 개방적 특성을 과신하거나 관객에게 판을 위한 판을 강제하는 등으로 또 다른 형식적 제약을 낳기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참가작들의 경우,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작품들이 마당극임을 굳이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음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조명과 장치의 도움을 전혀 배제했다는 사실은 배우의 몸이외의 무대 효과에 대해 지나치게 홀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불특정의 관객들은 훨씬 다양한 시청각적 기호에 길들여져 왔다. 영상 매체로 다 응축되다시피 하는 그 중층의 기호들이 자본주의의 천박한 찌꺼기이건 아니면 현대 첨단문명의 총아이건 간에 관객들의 감각적 요구 수준은 그만큼 여러 겹이면서 미세하다는 뜻이다.
작금의 중앙 연극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단한 형식 실험은 그런 점에서 눈여겨 볼만 하다. 물론 그것이 어느 한계를 넘어 설 경우 외양에 경도된 형식주의자들의 도취로 흐를 위험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민족극의 갈 길을 묻는 데에 있어서 다양한 형식을 모색하는 일이, 아직도 일의 純度를 떨어뜨리는 행위 정도로 여겨져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연극사에 있어서 외래의 무대극이 전면에 등장해서 횡행하게 된 것은 물론 모종의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극의 형식을 잘 받아 내려 제대로 된 민족 형식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좀 더 다양하고 모험적인 시도들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형식의 유연함, 이는 곧 훌륭한 주제를 망가뜨리거나 흘리지 않고 관객에서 고스란히 전달해 줄장치를 마련하는 일이기에 더욱 절실한 것이다.
5. 마무리
딱딱하고 동일한 주제와 단일 기호로 만들어진 연극이, 지금보다 더 많은 대중을 극장에 모이게 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그들의 의식을 변혁해 이끌기는 한마디로 어렵다. 그렇다면 그 갈 길은 무엇인가? 연극 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자.
나랏무당 시절의 연극 행위는 분명히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염원을 담아서 하늘에 올리고 하늘의 뜻을 나누어 인식하며 역시 공동의 다짐을 갖는 자리였다. 당연히 그 현장은 하나의 “굿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연극 유통 방식에서 연극 공연장에 모인 관객들이 하나로 뭉쳐진 공동의 염원을 가지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개별 작품의 주체에 대한 충분한 前이해(preperception)를 가진 몇몇의 관객들에 국한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당연히 그들의 의식을 공연물의 줄거리나 주제를 통해 단시간 안에 하나로 묶어 내기도 어렵다. 대중적 홍보에 의해 공연물에 의한 정보를 얻어서 일정한 입장의 댓가를 내고 그 자리에 모인 관객들에게 공연장은 원시적 의미에서의 굿판일 수 없다. 대학가나 직장에서의 동호인 연극이 아니라면, 모든 기성 연극은 불특정의 관객을 잠재적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 불특정의 관객들과 함께 한판의 굿을 이루어 보기란 지난한 일이다. 다만 굿처럼 만들어 보여주는 일은 가능할지라도, 그 현장을 굿판으로 부를 수 있을 만큼의 고양된 집단 정서를 나누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연극 공연장을 “굿판”으로 여기는 것 또한 정직하지 않은 태도일 것이다.
동경 유학생들의 신극 이래로 연극 공연장에 대한 대다수 지식인들의 입장은 민중 계몽의 장소로 보는 것이었다. 연극은 구체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 나가는 데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대중 교육의 수단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물론 우리 신극사에 있어서 제대로 된 교육 연극의 전통은 아직까지 수립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교육극의 이념은 낯설고 공허한 채 남아 있다. 농민항쟁 백주년을 기념하는 연극한마당의 목표는 분명히 항쟁의 의미를 대중들에게 충실하게 교육하고 전파시켜서 그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자는 데에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외면당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듯이, 대중의 관심을 끌어 내는데에 실패하는 연극은 이미 계몽의 수단일 수 없다. 이 점에 이른바 교육극으로서의 고민이 다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돌파구는 의외로 쉬운 데서 열릴 수도 있다. 그것은 기존의 주입식 교육에 대한 집착과 환상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질 수 있다. 대중을 따라서는 안 된다던 저 완강한 입장으로부터도 이제는 다소 물러나 볼 필요가 있다. 대중을 정확하게 읽지 않고 어떻게 대중을 이끌 것인가? 대중과 밀착해서 그 구석구석의 일상을 쫓는 일로부터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훑어 아는 것까지가 교육하려들기 이전에 수행해야 할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극장은 교실도 아니다. 오히려 교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장소이어야 할 것이다. “굿판”도 “교실”도 아닌 공간, 무엇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남기지 않는 친근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로는 거리일 수도, 디스코텍일 수도, 또는 운동장이나 놀이터일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대중을 찾아 나서는 길, 그것이 혼돈의 세기말을 살아 갈 연극이, 또는 극장이 진정한 나랏무당시절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최초의 작업이면서, 진정한 민중 교화의 장으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