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7 | [문화저널]
새로찾는 전북미술사
남종화 세계 터득한 걸출한 작가
전기
이철량 전북대 교수 미술교육과(2003-09-24 09:24:00)
옥구 임피에서 1825년에 태어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전기(田埼)는 조선조 후기 회화에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이다. 그의 타고난 천부적 재질로 인하여 당대 유명인사들과 교유하며 훌륭한 작품을 남겼는데 안타깝게도 30세에 병을 얻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사실 나이 30이면 예술에 있어서 유년기나 다름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전기는 새 시대에 새로운 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대적 안목과 가히 절세의 필력을 얻어 후세에 요절한 천재화가로 이름을 얻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젊은 나이에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시(詩)에도 일가를 이루었으면 팔법전예행해서(八法篆 行楷書)에 이르기까지 예술 전반에 걸쳐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렇듯 보는 눈과 필력이 출중하여 압록강 이남에서 그와 견줄만한 인물이 없고, 그의 산수는 중국 원(元)나라 산수의 오묘한 경지를 스스로 얻어 중국산수와는 다른 풍이 있었으며 시는 기묘하여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를 훑었다. 이러한 천재의 요절에 대해 당대 그림과 문장에서 대가였던 조희룡은 "고람(古藍: 전기의 호)의 시화는 당세의 독보이며 가히 상하100년을 두고 견줄 자가 없다. 작년 가을 나를 찾아와 석별의 인사를 나누었더니 이제 영영 이별을 맞게 되어 천추의 한이 되었다. 70노인이 30소년의 죽음에 대해 쓰게 되니 옛사람들의 일과 같다.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하는 글을 남겼다. 이는 당대의 대가였던 조희룡과 교우하며 예술을 주고받았던 전기의 인물됨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렇듯 당대의 인물이었던 전기는 1825년 순조 25년에 태어나 1854년 철종5년까지 살았다. 그리고 그는 개성 전씨로 옥구 임피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라 어떤 경로로 그림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작품 활동을 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출중한 그의 작품과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글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전기가 활동했던 시대는 조선조 말엽으로 사회적으로는 혼란하였고 문화에 있어서도 상당한 침체의 시기였다. 왕조의 말기적 징후가 나타나던 혼란기였다. 그림에 있어서도 한국의 산천과 풍속을 직접 사생하여 만들어냈던 새로운 한국적 화풍이 18C이후에 서서히 새롭게 중국화풍의 영향을 받게 된다. 한국적 화풍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한국회화가 퇴행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때 말하자면 조선조 후기에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화풍은 소위 남종화라는 것이었다. 중국의 남종화(명나라때 동기창, 박시룡, 진계유 등이 주창했던 중국역사상 대표적 회화양식)가 어떤 경로로 한국에 유입되었으며 또한 남종화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전기가 어떻게 남종화와 인연을 갖게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청나라때 만들어진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등이 조선에 소개되고 또한 중국을 오가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당대에까지 널리 유행하였던 남종화풍을 소개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떻든 절기는 조선조 말기의 남종화풍에 있어서 대표적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전기의 화풍은 중국 남종화가들 중에서도 특히 원말 4대가(元末四大家)로 불려지는 황공망(隍公望)이나 예찬(倪贊)의 풍격이 엿보이는데 그가 젊은 나이에 남종화에 깊숙이 베어있는 시적정서를 좋아하고 익히기 위하여 중국의 대표적인 남종화가들의 작품을 섭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기의 작품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계산포무도(溪山苞武圖)"는 그가 조선조말기화단에서 얼마나 걸출한 화가였던가를 보여준다. 문인화풍으로 간략하게 소묘된 산수와 화제가 어우러지는 화면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필세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한적하기가 그지없는 강가의 두 집과 두 그루의 노송이 수평으로 잡혀진 구도 속에 놓여져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이나 표현의 수법에 있어서는 광풍처럼 숨 가쁘게 그어댄 거친 필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넓은 강을 끼고 한적하게 서있는 초당의 모습에서 예찬의 화풍을 엿보이기는 하나 중국 남종화가들이 도저히 따르지 못하는 문인화적 정취와 필의(筆意)가 살아나 있다. 남종화의 함축미와 화흥(畵興)이 가장 잘 살아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거칠고 숨 가쁜 표현의 「계산포무도」에 비해 또 다른 작품인 「매화초옥도(梅禾草屋圖)」는 매우 단아하고 정갈한 맛을 보여주는 작품 중 대표적이다. 이 매화초옥도는 중국이나 한국에서 매우 널리 그려지던 소재로서 중국 송나라때 시인인 임포(林浦)의 고사(故事)를 그렸음을 화제에서 밝히고 있다. 임포는 절강성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초당을 짓고 매화를 심어 아내로 삼고 학을 아들 삼아 평생을 은유하며 자연을 즐겼던 은사(隱士)이다. 이 은사를 찬양한 시와 그림이 꾸준히 그려져 왔다. 이 그림은 화면 중앙에 초당이 있고 선비가 그득하게 피어있는 매화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창을 통해 보인다. 그리고 좌편 하단에 다리를 건너 초당의 친구를 찾아가는 또 다른 선비를 그려 넣었다. 화면 구성에 있어서는 전면화법으로 특별한 구성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하늘과 물 그리고 계곡 등은 온통 회색 잿빛으로 처리하였고 산과 언덕 등은 눈이 하얗게 덮여 화면 전체가 깊은 겨울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눈이 수북이 쌓여 둥실둥실하게 보이는 하얀 산언덕에 까만 먹선으로 날카롭게 그려진 매화가지들이 대비를 이루며 서있는데, 춤추듯 널려있는 날카로운 선들을 통해 화면에 적당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하얀 점들로 표현되고 있는 매화꽃의 분분한 모습에서 생기와 유머를 느끼게 된다.
다리를 건너는 선비의 도포에 붉은 색을 넣고 앉아있는 선비의 옷에 녹색을 칠해 화면에 악센트를 주어 시선을 모으게 하고 있다. 이 「매화초옥도」는 화제의 선택에 있어서나 화면구사에 있어서 남종화의 시적 정서를 뛰어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보면 당대의 명가들이 젊고 신분이 낮았던 전기에 대해 놀라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점을 이해하게 된다.
전기가 남종화풍을 그토록 훌륭히 소화하고 자기화 시키기 위해, 또한 그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초기 중국화풍을 많이 공부하였으리라 믿어지는데 여기에 소개되는 산수화는 그 예를 보여준다. 산세의 구성과 그 표현이 명나라때 동기창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서 다소 날카로운 필치의 피마준이 경직된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아마도 전기가 초창기에 중국화에서 빌려온 듯한데 그가 처음부터 남종화풍에 몰두해 있었음을 상상케하는 작품이다. 어떻든 전기는 남종화의 세계를 터득하고 자기화 시킨 걸출한 작가였다. 다만 그가 옥구 임피에서 나고 성장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더욱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완당 김정희가 전기에게 "고람의 시와 그림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워 이 글귀를 주노라"하는 내용의 글을 써준 것이나 조희룡이 그의 저서에 전기를 다루고 있는 점은 적어도 그가 중앙에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가 옥구 임피에서 출생하였다는 일설을 확인하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