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화려한 세계, 눈부신 조명과 호화로운 의상, 거대하고 웅장한 세트, 실감 나는 연기로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는 배우들까지.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무대에 대해 알고 있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한 편의 공연이 무대 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스태프들의 수고와 노력이 담기는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든든하게 무대를 떠받쳐 주고 있는 그들의 노고가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연주, 각본, 연기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공연 때 가장 긴장하며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음향팀의 스태프들이다. 음향팀의 역할은 객석 어디서든 또렷한 대사와 음악을 전달받을 수 있도록 소리를 구현하는 것. 그 제일선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박영모 음향감독(45)을 만나 무대 뒤 감춰져 있던 이야기들을 들어 보았다.
완벽한 무대는 없다, 완벽해지기 위해서 노력할 뿐이다
객석의 가장 뒤편, 수백 개의 버튼이 즐비한 콘솔 앞이 바로 박 감독이 활약하는 일터다. 이제는 집보다 콘솔 앞이 더 편안하다고 말하는 그는 2001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개관할 때부터 쭉 그 자리를 지켜 온 음향 경력 21년차의 베테랑이다.
"공연 장르, 형태, 음색이 연주자들마다 다 달라서 한편으로는 서비스업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일반적으로 음향 스태프라 하면 엔지니어나 기술자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공연자의 세세한 요구와 맞닥뜨리는 서비스맨이기도 하다. 연주자의 요구에 맞춰 더할 부분은 더하고, 뺄 부분은 빼면서 함께 최고의 소리를 만들어 가는 그 모습이 마치 이인삼각 경기를 보는 듯하다.
"요구가 있다고 해서 100% 맞춰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기술이나 환경적으로 불가능한 부분도 분명 존재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음향의 일이란 공연자가 원하는 소리와 무대를 함께 쫓아 주는 동반자 같은 것이겠죠. 그들이 원하는 형태에 저희들이 아는 지식을 최대한 더하여 만족할 만한 무대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 완벽한 무대는 없지만, 완벽에 가까워지도록 같이 노력하는 거죠."
결국 사람과 하는 일, 좋은 무대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서로 간의 합이 중요하다. 그래서 박 감독은 공연 때조차 손은 콘솔의 스위치를 만지고 있을지언정 눈과 귀는 항상 배우와 연주자의 모습을 쫓는다. 무대 위에서 보내는 공연자의 미세한 신호 하나조차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소리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행동에 나타나거든요. 그런 부분을 예민하게 캐치하기 위해서 집중하다 보면 한 것도 없이 진이 다 빠져 버리기도 해요."
공연 때 긴장하는 이가 연주자뿐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비록 관객의 주목을 받는 무대 위는 아니지만, 무대 뒤에서 공연자와 한몸이 되어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못하는 것은 박 감독도 마찬가지다. 길 때는 서너 시간 동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할 때도 있다. 함께 만드는 무대라는 말이 비로소 피부에 와 닿는다.
그런 박 감독이 음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만족'이라고 짧고 담담하게 답했다.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들이 다르겠죠. 누군가는 음색을, 또 누군가는 전달력을 중요하게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것들 모두 중요한 지점들이지만, 저는 반드시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만족이라고 답하고 싶어요. 공연자와 스태프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소리, 결국 음색이나 전달력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모두가 만족하길 바라서잖아요. 무엇이 먼저인지 우선순위를 정하게 되면, 작은 지점들에 대한 고민은 저절로 해결되는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 해도 순간순간 예측을 벗어나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무대이기 때문이다.
"같은 레퍼토리의 공연을 올리더라도 똑같은 공연은 될 수 없어요. 공연자가 라이브로 무대를 진행하는 이상 그것은 이미 다른 무대라고 봐야 돼요. 리허설 때 충분히 만족할 만한 소리를 뽑아 냈다고 해도 본 공연에선 달라질 수 있어요. 항상 긴장하고 예민하게 반응해야 비로소 만족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거예요."
항상 0에서 출발했다
"일에서 재미와 보람을 찾지 못하면 오래 하기 힘든 것이 또 무대 뒤 일이에요."
모든 일들이 그렇겠지만, 무대를 준비하는 이들에겐 특히나 그런 재미와 보람이 중요하다. 공연 후 덤덤하게 치워지는 무대들을 볼 때마다 공허감이 컸다고, 박 감독은 말한다. 쏟은 애착이 크면 클수록 공연이 끝났을 때 느끼는 상실감도 무척이나 컸다.
"힘들게 준비했던 무대가 공연 한두 번하고 치워지는 걸 볼 때마다 힘들었어요. 휑하니 비워진 무대를 보면서 내가 무엇을 했었지, 라는 생각도 들고."
그때마다 무대 위를 거쳐 간 많은 이들의 한마디가 그에게 큰 힘과 위로를 주었다. "감독님 덕분에 오늘 공연 편하게 했어요." "간만에 다른 데 신경 안 쓰고 집중할 수 있었어요." 아무리 녹초가 됐어도 그 한마디면 모든 피로가 날아갔다. 어떤 미사여구를 섞은 칭찬보다 가슴을 울렸다. '좋았다'는 세 글자, 박 감독에게 이 이상 가는 찬사는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최고의 무대일 수는 없는 노릇, 그에게도 힘들었던 무대가 있지는 않았을까 넌지시 묻자 잊어버렸다는, 다소 어리둥절한 대답이 돌아왔다.
"공연에 점수를 주고 싶진 않아요. 나빴던 공연은 나빴던 대로 잊어버려야 하고, 좋았던 공연은 좋았던 대로 잊어버려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서로 비교를 하게 되잖아요."
박 감독은 어떤 공연이든 항상 0에서 출발해야 된다고 말한다. 초심을 지키며 0에서 다시 최고점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작업을 반복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해도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럴 때 웃어 넘기지 않으면, 결국 비난의 화살은 남을 향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좋았던 기억도, 나빴던 기억도 부러 남기지 않는다. 언제나 처음처럼, 초심에서 최고를 쫓는다.
음향 한길, 명인을 꿈꾼다
"음악 듣는 걸 정말 좋아했어요. 그래서 이런 쪽에 어떤 일이 있을까 찾아보다가 결국 여기까지 다다르게 됐네요."
어린 시절, 악기를 배워 보기도 했지만,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악기의 소리를 조절하는 패널 쪽에 더 마음이 갔다고. 한창 무대 위에 서서 주목받고 싶은 나이였을 텐데도 이미 그의 관심사는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이쯤 되면 날 때부터 음향의 끼(?)를 타고났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처음 음향 일을 하게 됐을 때 너무 행복했어요. 겨우 몇십만 원 받으면서 일했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거기다 돈까지 받는다니 최고였죠."
그렇게 발을 딛게 된 음향의 길, 그는 여전히 꿈꾸는 청년처럼 일을 즐긴다. 21년이나 종사해 온 일이지만, 여전히 배움을 마다하지 않으며 일상을 새롭게 꾸미고 있다. 그리고 우직하게 경험을 포개며 깊이와 연륜을 더한다.
"오래할수록 인정받는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스태프 쪽은 나이가 들면 구세대 기계처럼 취급을 받아요. 감각이나 여러 신체 기관이 말을 안 듣게 되니까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외국에서는 나이를 먹어도 노련미 같은 점을 인정해 주거든요. 우리나라에서는 스태프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아서 그냥 바람이지만, 그 경험과 지식을 인정해 주는 토양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단순한 기술자와 장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면, 그를 포함한 선배들 역시 장인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나의 무대를 올림에 있어서도 진심을 담아 고민하며, 더 나은 무대를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정신은 한결같이 최고에 이르고자 한 장인 정신과 맞닿아 있다.
"당장 눈에 보이진 않지만,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 언젠가는 결과물로 나타나리라 생각해요. 그래서 나중에는 엔지니어나 기술자, 감독이라는 말 대신 명인이라 불리고 싶어요. 지금은 아직 멀었지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