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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 | 인터뷰 [인터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재호 전북지부장
김하람(2019-08-14 15:21:35)



"그들은 단 한 번도 처벌 받거나 그들이 누렸던 지위, 명예, 재산이 국가로 환수된 적이 없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대물림 했으며, 그 속에서 독립 운동가들은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했다."


해방으로부터 74년, 일본과의 관계는 여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독도, 강제징용,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와 그에 대한 한국의 불매운동까지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바로잡아야 할 역사가 일본과의 관계뿐이라면 낫겠지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민족반역자라 부르는 친일파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그리고 현재까지 여전히 한국사회에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 친일파 세력. 이들이 왜곡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투쟁의 한 가운데 서있는 사람이 바로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이다. 늘 역사를 좋아하고 민족의 분단, 통일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김재호 지부장은 20대부터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분단의 이유가 무엇인지 또 왜 여전히 친일파들이 한국사회에 규정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들은 민족문제연구소와의 인연을 만들어냈다. 2005년 미당 서정주를 친일파로 단죄하는 싸움을 시작으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의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2011년 지부장이 되어 8년째 그 자리를 이어가고 있는 김재호 지부장. 8월이면 더욱 뜨거워지는 친일청산 문제를 그와 함께 들여다봤다.



현재의 문제 해결을 위한 과거 청산
민족문제연구소는 1965년 한일 회담의 반민족적 성격에 분노한 임국종 선생이 만든 '친일문학론'이라는 책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책은 박정희 독재정치시대 친일에 대한 아킬레스를 건든 일대의 사건이었다. 당시 이미 친일파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임국종 선생은 자신의 아버지 임문호의 친일 행각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먼저 정죄하여 진정성을 드러냈다. 임국종 선생의 유지를 잇고자 임 선생의 빈소에서 결의하고 출범한 것이 민족문제 연구소이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협력하거나 협조했던 세력들이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온존하면서 한국 사회의 주류, 지배세력으로 커왔고, 이들에 의해 한국 사회가 결정되고 있어요. 이들이 거의 정점에 서서 강한 규정력을 가지고 있기에 역사적 과오나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지 못하는 현재의 문제를 짚다 보니까 친일인명사전을 펴내게 된 것이에요"


프랑스의 경우 4년이 안 되는 시간동안 나치 협력자등 민족반역자를 다 쳐냈다.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드골은 나치 협력자를 청산한 뒤 "프랑스는 외세의 침입은 받을지언정 다시는 민족반역자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적어도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독일에 협력했던 자들을 흡족하지는 않지만 과감하게 청산했다는 자신감이 담긴 말이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민족반역자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청산해 본적이 없다. 해방 이후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역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지금까지 반민특위 내에서도 기소자가 겨우 680여 명 밖에 안돼요. 을사 늑약 이후 45년 8월 15일까지 기간으로 35년 11개월 동안 680여 명만 친일을 했으며 그들만 조사를 하면 된다는 것은 합당한 논리가 아니에요. 게다가 680여 명 중 실제로 교도소로 들어간 사람은 일곱 명뿐이고, 그 일곱 명 조차도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다 풀려났어요. 결국 우리는 단 한명도 역사적으로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단죄한 적 없는 거죠. 그래서 부끄럽고 자존심 상하는 거예요"


일제 35년, 친일파 4389명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한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간단체에서 맡아서 하기에 35년간 한반도에서 살았던 인물들의 행적은 너무 방대했기 때문이다. 헌병보조원, 순사, 면서기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버리고 그들을 정죄하자면 대한민국사회에서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따라서 기준을 세우는 일이 매우 중요했다.


"우리의 기준은 자발성, 적극성, 지속성이에요. 자발적이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을사늑약부터 해방 시점까지 국권을 침탈당했다거나 일제에 협력했다거나 독립운동을 탄압했거나, 일본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들이 신체적 정신적 물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거나 피해를 준 경우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어요."


그렇게 해서 나온 숫자가 4389명. 등재된 친일파는 직접적 행위자와 지위와 역할이 친일 행위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자로 분류된다. 후자는 판사 검사 등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한 경우로 일제의 고등관 시험에 합격하려면 웬만한 충성도를 서약하지 않으면 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 식민통치기구의 주요한 위치에 있기에 친일파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예외조항을 뒀다. 판사, 검사라도 독립운동에 협조했거나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나오면 즉각적으로 빠지게 된다. 이런 예외조항에도 해당되지 않는 것이 가미가제 특공대로 가서 죽은 사람들, 간도특설 때는 독립군을 때려잡던 조선인부대장들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자는 병, 장교를 가리지 않고 전부 친일파로 등재돼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외부적으로도 많은 도전을 받았다. 대한민국이의 권력의 중심부에는 친일파들이 득세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친일인명사전은 족쇄와 같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역대 해군참모총장, 경찰 국장 등 고위 관료의 초창기 멤버는 다 친일파였어요. 놀라운 사실은 이들이 실제로 역사와 민족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자신의 잘못을 용서를 구한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예요. 전부다 승승장구했죠."


그들은 단 한 번도 처벌 받거나 그들이 누렸던 지위, 명예, 재산이 국가로 환수된 적이 없이 주류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대물림 했으며, 그 속에서 독립 운동가들은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했다.


"독립 운동했던 사람들이 300만 명으로 추산돼요. 그 중에서 독립운동 국가유공 서원을 받은 사람이 15,500명 정도예요.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독립 운동가들이 대우받지 못하고 관심 받지 못했기에 나온 결과예요. 제대로 된 나라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말하다보니까 화가 나네요."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라
친일인명사전을 중심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각 지역에 지부를 만들어 지역의 친일 잔재 세력을 단죄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김재호씨는 지부장이 된 이후로 진안 북위면에 있는 윤치호 불망비 옆에 단죄비를 세우고, 민비 살해범중 하나이며 호남지역 동학농민군 학살을 핵심적으로 수행한 이두황의 단죄비를 세우는 일을 했다. 또 상산고가 2014년도에 국정화교과서인 교학사의 뉴라이트 교과서를 채택하자 당시 39개 단체에 제안을 해 한국사 국정화 반대 전북지역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상산고 국정화교과서 채택을 해제시키기도 했다.


"전범기업 미쯔비시의 창업주인 이와사키 아카로의 호를 따서 지은 '동산동'의 이름을 바꾸는 일에도 참여했어요. 올해 들어서 가장 뿌듯한 일 중 하나예요. 주민 설명위, 자치위원 설명위 등을 다 제가 준비해서 진행했어요. 결국 주민의 90.7%가 행정동명을 바꾸는데 동의했어요. 동산동 주민들의 승리죠. 저는 쪽구름동을 원했는데, 그것이 되지는 않고 여의동이 채택됐어요. (웃음)"


문화계에서 권위를 가진 미당 서정주의 친일 행각을 밝히며 2005년부터 해마다 고창에 가서 10년 이상 싸우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우리나라의 주류로 커오다 보니까 한 다리 건너면 다 친일파의 제자고, 형님 동생 하는 사이, 아니면 대 스승 이런 식이기에 극복하기 힘들기도 하다.


"우리의 주요한 캐치프레이즈는 이거예요. '될 때까지 한다' 싸움 하나 하나가 어려운 싸움이고 바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잘 없어요. 그래서 보다 대중적인 싸움으로 이어지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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