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2월 15일, 아직 가시지 않은 겨울의 아침 냉기를 체감하며 일군의 사람들이 영등포 교도소 앞을 지키고 있다. 당대 저항시인 김지하가 문밖으로 나오길 기다리는 기자들이 그들이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이 슬슬 얼어가는 손과 발을 비비고 동동거려가며 시인을 기다리지만, 그는 좀체 교도소 밖을 나오지 못한다. 자리를 뜰 수 없어 배달시킨 짬뽕은 국물이 진작 식어버렸다.
기자들은 투덜거린다. 구치소 측에 항의와 욕설을 퍼붓기도 한다. 어느 새 해가 저물어 간다. 어둠이 짙어갈수록 추위는 더해갈 것이다. 그 때 교도소 길 건너편 어느 골목을 조용히 서성거리며 추위에 떨고 있는 초로의 여성이 한 젊은 기자의 눈에 잡힌다. 그는 조용히 다가가 여인을 살핀다.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듯한 한 아기를 포대기에 감싸 업고 있는 이는 김지하의 장모였다. 기자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시인의 장모를 긴 시간 바라본다. 그 풍경이 제법 스산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출소한 시인 때문에 교도소 앞이 잠시 들썩거린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구호와 박정희 정권의 패악에 대한 성토가 이어진 후 시인은 그를 기다리던 일행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향한다. 기자들도 우르르 뒤따라 행선지를 잡는다.
시인의 눈에 띄지 못한 그의 장모는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핏덩이 손자를 꼭 끌어안고 다시 택시에 올라탄다. 젊은 기자는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그 모든 상황들을 눈에 담는다. 젊은 기자의 눈에 잡힌 여인의 뒷모습은 무척 쓸쓸했을 것이다. 이제 영등포 교도소 앞은 늦겨울의 찬바람만 남는다.
그날 밤 젊은 기자가 쓴 기사에는 그가 보았던 시인의 장모 이야기가 실려있지 않았다. 기사를 송고하고 늦은 밤 귀가한 기자는 아내에게 간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자의 아내가 안쓰럽다며 눈물을 찔끔거린다. 기자는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야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쓴다. 그때 아이를 들쳐업고 있던 이는, 바로 한국 문학의 대모로 불리는 박경리였다. 그리고 그 추운 겨울의 복잡미묘한 풍경을 자신의 눈 속에 고스란히 담아두었던 스물일곱 살 신참 기자는 훗날 기사가 아니라 소설로 '글밥'을 먹게 된다. 그의 이름이 김훈이다.
(김훈, <바다의 기별>(생각의 나무, 2008) 중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 내용을 재구성함)
십 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회고의 글을 읽으며 언론인 김훈이 맞닥뜨려야 할 운명은 결국 소설가로서의 삶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이 오십이 넘어 작가로서의 삶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그에게, 소설이란 예정된 종착지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그가 소설가로 밥벌이를 시작한 이유는 그의 문장도, 그의 상상력도 아닌, 바로 세상과 사람을 향한 섬세한 시선에 있었다는 것을.
여기 또 한 명, 기자 출신의 유명한 소설가가 있다(사실 그런 사람은 많다!). 우리에게는 <노인과 바다>가 가장 익숙할 테지만 그가 남긴 소설 중에는 흔히 하는 말로 걸작이라 불리는 것들이 많다. 비단 내용뿐인가? 군더더기 없이 간명한 문장은 오랜 세월 많은 문학청년들에게 귀감이 되어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렇게 우리에게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져 있고, 또 읽히고 있다.
그런데 여기 또 한 권의 번역서가 놓여있다. 소설가가 아닌 기자로서의 재능이 빛나는 문장들. 우리에겐 생소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알게 된다. '아! 역시, 헤밍웨이구나!' 아울러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될 즈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헤밍웨이가 결국 소설로 글밥을 먹고 살게 된 것은 예정된 운명이었구나' 라고. 그 이유 또한 그의 문장이나, 그의 상상력이 아닌, 그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에 있었다는 것을.
"좋은 글이란 진실을 쓰는 거지. 작가가 인간의 삶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갖고 있고 얼마나 충실하게 삶을 살았는지에 비례해서 이야기가 더 진실되게 느껴지거든. 그래야 지어낸 이야기라 해도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 거야."
-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245쪽-
소설가를 꿈꾸는 한 젊은이에게 헤밍웨이가 건네는 말이다. 그가 소설가로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문학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가 잘 드러나 있다.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작가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헤밍웨이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소설가가 아닌 기자로서 써내려 간 그의 글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그가 저널리스트라는 직함으로 남긴 글들은 방대하다고 전해지니 이 작은 책으로 그의 모든 실체를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허나 번역자의 심사숙고를 통해 엄선된 이 기사들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의 삶과 문학을 관통하는 '진실성'을 엿볼 수 있다.
때로는 유머와 위트로, 때로는 거침없는 비판자로서, 또 때로는 거대한 비극과 마주하는 한 나약한 실존인의 심정으로 써 내려간 다채로운 기사문들.
쓰여진 시점으로부터 80년 혹은 100년 가까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그 문장들이 우리 시대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헤밍웨이의 남다른 통찰력 덕분일 것이다. 특히 그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1920년대 중후반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온 지구가 전쟁이 남긴 후유증으로 신음할 때였다. 그는 전쟁이 외쳐대는 휘황찬란한 구호 속에서 어떻게 개인들이 고통을 겪는지, 그 존엄이 어떻게 훼손되는지, 자신이 목격하고 또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저널리즘의 그늘 아래 피아의 구분 없이 글로 풀어내었다. 문장은 그 현장을 아무런 감정도 싣고 있지 않은 듯 관찰자의 시점으로 묘사하지만, 그 건조한 문체 속에는 거대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음을 독자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극심한 우울증 끝에 자살로 끝내버린 그의 인생 말미가 못내 걸렸던 탓일까? 나는 <노인과 바다> 달랑 하나 읽어본 후 헤밍웨이의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다. 괜한 선입견이 내 독서의 행로에서 헤밍웨이라는 기항지를 외면해 버린 것이다.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그런 내 선입견을 나이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시점에서 깨주었다. 알록달록 빛나는 내 20대 독서의 추억에 제대로 자리 내준 적 없는 헤밍웨이지만, 이제부터라도 그의 문학 속에, 그리고 그가 문학을 통해 붙들고자 했던 '삶의 진실성'에 푹 젖어들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나이 들어갈수록 생각의 부피를 도톰하게 만들어주는 김훈의 문학처럼, 헤밍웨이도 따뜻한 인간의 시선으로 채 아물지 못한 내 안의 어느 곪은 상처를 포근히 감싸주지 않을까?
이제 헤밍웨이를 제대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