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7 | [서평]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
『깊은슬픔』(신경숙, 문학동네, 1994)
김선경 전북청년문학회 사무국장(2003-09-24 10:25:21)
말해질 수 없는 것들, 사소하지만 누구나 느끼는 것들, 본능적인 이해와 맞닿아 있는 것들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쉽게 말해지는 것들, 특별한 사람(혹은 경우)만이 느끼는 것들, 논리적인 이해와 맞닿아 있는 것들을 표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게 느끼며 나는 살아왔다. 그것이 혼자 간직하고 말 일기 따위라면 또 몰라도, 여러 독자들을 염두에 둔 '작품'이라면 얼마나 많은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빛나는 한 개의 문장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늘 궁금해 하기도 했다. 신경숙의 소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이 여자, 얼마나 깊은 상처를 갖고 있기에 이토록 '말해질수 없는 것들'들에 매달리나, 하는 것이었다.
그를 일컬어 '문체주의자'라 하거나 작품의 근본정조를 '결핍'에서 찾는 해석들을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직은 그 무엇도 내게 신경숙의 정체를 확실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깊은 슬픔』을 통해 내가 발견한 것을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깊은 상처'를 가진 작가의 얼굴이다. 「풍금이 있던 자리」「배드민턴 치는 여자」「멀리, 끝없는 길 위에」등의 단편들이 상처에 대한 다소 경쾌한 들여다보기였다면 『깊은 슬픔』은 대단히 무겁고 섬짓한 상처에 대한 기록처럼 보인다.
사랑이 부족한 유년시절로 인해 나이 서른에 가깝도록 손가락을 빠는 여자가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 사랑 속에 놓여보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것은 다소 안됐기는 할지언정 '깊은 슬픔'에 이를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작가는 이 손가락 빠는 은서라는 여자를 너무도 담담하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마치 계절이 지나가듯 자연스럽게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을 '깊은 슬픔'의 경지로 몰고가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문체에 힘입은 바 크다.
이전에 신경숙의 소설을 읽었던 많은 사람들은 작가의 문체가 단편에 지극히 잘 어울리는 까닭에 장편을 써내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단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장편을 통해 확인된 것은, 적어도 '문체'의 측면에서는 장편을 꾸려나가는 데 이 작가가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평면적인 구성이나 단조로운 인물행동을 무한히 풍부하게 확장시켜주는 역학을 그 독특한 문체가 충실히 떠맡고 있다. 가령 주인공 은서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은 불가항력이라고 여기는 여자.(불가항력이란 얼마나 불가항력적인 말인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니, 사회통념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일이라니, 정치도 권력도 끼어들 수 없다니, 그저 심금을 울리는 그 아름다운 자유.)... 그 여자, 사랑의 등만 봤던 여자, 어쩌면 삶 바깥의 여자, 저런, 사로잡힌 여자.
지극히 단조로운 일상을 가졌던 여자, 언제나 사랑하는 남자 완이나 혹은 세에게 속해 있기를 바랐던 여자, 그렇지 못했으므로 공중에서 몸을 날린 여자, 꽃잎처럼 스러진 여자, 모든 '잔치가 끝난 서른 살' 어름에서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 그 여자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우리의 심정은 괴롭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을 가고 겨울이, 다시 봄이 가고 여름이, 가을 가고 겨울이... 가고 마침내 그 여자 꽃잎처럼 몸을 날린 봄이 오기까지, 그 모든 치욕과 고통을 견뎌낸 그 여자에게, 우리는 눈물 한점 뿌려주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 아주 깊은 슬픔을 느끼는 것밖에는.
그러나 생각해보면 신경숙의 소설에 등장하는 절대다수의 여성들이 이 오은서와 동일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자기 의사 표현에 어눌하고, 받는 것보다는 주는데 익숙하고,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더 깊은 눈길을 주고, 태어나는 것들에 대한 기대보다 소멸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더 많이 간직하고 있는, 그리하여 이 삶 속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그런 여자.
그리고 그런 여자에게는 늘 '어머니'가 있다. 이 작품 속에서만도 세 명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은서의 소설 속에 나오는 두 명의 어머니는 새로 들어온 계모이거나, 동생만 데리고 재가해버린 냉정한 어머니다. 현실 속에서 은서의 어머니는 한때 은서아버지와 은서들을 버리고 가출해버린 어머니며, 다시 돌아와 함께 살기는 하지만 더 이상 '곁을 줄 수 없는'어머니다.
어머니들에 집착하는 작가의 태도는 그러나 뚜렷한 의도의 표출이기보다는 아주 오래된 상처의 드러냄처럼 보인다. 신경숙은 90년대 작가, 신세대 작가의 대표주자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이 작가에게서는 신세대의 발랄함보다는 암울하고 아득한 시기의 슬픔과 상처의 흔적이 너무 많이 묻어난다. 이 아무것도 아닌)?사랑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한 번 더 읽었던 것도 되돌아보기 싫은 상처를 정면으로 직시하는 작가의 용기와 힘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경쾌한 문장 뒤에 숨어있는 토속적인 향기와 따뜻한 눈길, 오래된 기억들의 섬세한 긴장.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독자가 느끼는 깊은 슬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작가는 '말해질수 없는 본능의 세계'에 눈길을 끌고 있으려나? 우습고 무섭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1994년 6월에 은서의 고통은 너무 아름답고 순결해서 감히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혹시 그녀는 세상의 모든 말해지는 것들, 말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너무 무심한 대가로, 말해질 수 없는 걸들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그것을 작가가 안다면, 외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은 미안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