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던 2019년 한 해가 저물었다. 지난 한 해에도 전북 문화예술을 살찌우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지만, 아직 채 아물지 않은 미투의 상처와 주요 문화예술 단체 수장직 선출의 난항 등 해결해야 할 많은 사안들이 숙제로 남았다. 그럼에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역사성과 지역성을 담은 행사들이 쏟아졌고,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안장 등 기쁘고 다행스러운 소식도 적지 않았다. 2019년 눈에 띄었던 문화 소식 중 열 가지를 모아 소개한다.
정리 이동혁 기자
1. 스무 돌 성년을 맞은 전주국제영화제
지난해 20회를 맞은 전주국제영화제가 다시 한 번 총 관객 수, 상영작 매진 기록 등을 갈아치우며 국내 3대 국제영화제로서의 위상을 알렸다. 총 관객 수는 8만 5,900명을 기록하며 재작년 기록인 8만 244명을 뛰어넘었고, 19회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상영작 매진 기록도 갈아치웠다. 일반 상영작 559회 중 299회가 매진됐고, 특별전으로 선보인 VR 시네마는 총 138회차 중 91회가 매진됐다.
그전까지 영화의 거리에 집중돼 있던 영화제 공간을 팔복예술공장으로 확장한 점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영화제 20년 역사를 돌아보기 위한 특별 기획 ‘뉴트로 전주’와 한국영화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섹션도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배우상 부문을 신설하고 국제경쟁 시상 규모를 키워 영화제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도 눈여겨볼만했다.
하지만 미흡한 아카이빙 작업으로 인해 20년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기획으로는 부족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1회부터 20회까지 축적해 온 영화제의 자산을 보여 주는 기획으로는 다소 미흡했다는 지적. 그와 더불어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인력 부족 등도 문제점으로 꼽혔다.
2. 3.1운동 100년, 그날의 함성을 다시 기억하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다양한 전시와 학술대회, 출판 소식들이 줄을 이었다. 전북 지역 40여 개 박물관과 미술관이 역량을 모은 특별전 ‘만인이 한마음 대한독립만세’가 지난 10월 24일부터 12월 22일까지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열려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더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쫓아 독립운동 사적지와 후손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을 보탠 김동우 사진작가의 ‘뭉우리돌을 찾아서전’도 눈길을 끌었다. 전북사학회는 지난 10월 ‘전북 출신 3.1운동 세대의 활동’을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고, 원로작가 윤영근 씨는 애국지사 백용성 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아름다운 삶>을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친일 잔재 청산의 바람이 어느 때보다 거센 해이기도 했다. ‘전라북도 도민의 노래’, ‘전주 시민의 노래’를 작사한 김해강 시인의 친일행적 논란이 불거지면서 ‘김해강 시비’를 철거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도는 ‘전라북도 도민의 노래’ 사용을 중지키로 결정했고, 전주시 역시 ‘전주 시민의 노래’ 개정을 추진 중이다.
3. 동학농민군 지도자, 125년만의 영면
일본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무명의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125년 만에 영면에 들어갔다. 지난 6월 1일 전주시와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전주동학농민혁명 녹두관에서 ‘환국 동학농민군 지도자 안장행사’를 거행했다. 이날 영면에 든 유골은 지난 1995년 7월 25일 일본 북해도대학에서 ‘한국동학당 수괴’라는 문구가 붙은 채로 발견됐다. 이듬해 2월 당시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이었던 한승헌 변호사가 일본을 찾아 이를 확인한 뒤 유해봉환추진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동년 5월 전주입성 102주년에 맞춰 전주로 모셔왔다. 하지만 유골의 신원을 밝히지 못한 채 2002년 10월 11일 전주역사박물관 전시실에 모시게 된 것을 환국 동학농민군 지도자 안장행사를 통해 동학농민군 추모관인 녹두관에 영구 안장하게 됐다.
4. 전북 문화예술 미투 1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지난 3월 전주 우진문화공간에서 지역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북 문화예술계의 ‘미투’ 이후 나타난 유의미한 변화와 과제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다. ‘전북 문화예술계 미투 1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주제로 진통이 계속되고 있는 미투 현황에 대해 논의를 나누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우리 주위에 산재해 있다. 전북연극협회에서 제명된 A 씨는 협회를 대상으로 도리어 소송을 진행하고 있고, 전 극단 대표 B 씨는 지난 6월 열린 항소심에서 2개월 감형 선고를 받았다. 그 외에도 제명됐던 C 씨가 최근 연출과 각색을 맡은 것으로 드러나 논란이 됐으며, 미투 가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 전북 지역 사립대 D 교수는 현재까지도 교수직을 유지하고 있다. 미투 피해자들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차후 해결이 시급해 보인다.
5. 특색 있는 지역 문화 발전 위해 목소리를 모으다
지난 7월 ‘우리가 만드는 지역문화’를 주제로 ‘제2차 지역문화진흥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지역토론회’가 열렸다. 지역 간 문화격차를 해소하고 지역별로 특색 있는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열린 이날 토론회에서 팔복예술공장 예술교육팀에서 근무하는 김정현 씨는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다른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며 “지역문화진흥을 이루려면 먼저 지역의 역사성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역문화인력양성사업에 대한 당부도 이어졌다. 전주문화재단 생활문화팀 최동진 씨는 “사람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최종 목적지를 취직으로 잡아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문화계에서 활동하는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라는 것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생활문화동호회 관계자들은 활동 공간의 부족함을 호소하며 폐교 등을 활용한 공간 확보를 부탁했으며, 문화재단을 중심으로 한 지역문화 정책이 오히려 독과점으로 획일화를 불러오고 있다는 의견도 지적 사항으로 거론됐다.
6. 사회 혁신을 위해 시민들이 뭉쳤다
전북도와 전북창조경제혁신센터가 지난 7월 전북도내 19개 기관이 참여하는 ‘전라북도 리빙랩 네트워크 발족식’을 가졌다. 전북 리빙랩 실험의 장을 더욱 확대하는 자리로, 기념식과 함께 창립회의, 발표, 포럼 등을 진행하며 지역 리빙랩의 현황과 과제, 미래를 짚었다.
이와 더불어 9월에는 ‘2019 사회혁신 청년 커뮤니티 지원 사업’을 통해 성 구매 안 하는 남성 모임 ‘시시콜콜’, ‘평화담벼락’, ‘자치커스텀’, ‘누구나 배우는 영화’, ‘요즘 것들의 미술생활’, ‘동네한바퀴’ 등 전주 청년 400여 명이 지역 문제를 고민하고 탐구하는 모임 활동을 가졌으며, 전주시는 발굴된 내용을 선별해 추후 시정에 반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또한, 전주시는 10월 사회혁신 주간을 운영을 운영하며 그간 독립적으로 운영돼온 ‘행복의 경제학 국제회의’, ‘사회혁신 한마당’, ‘사회적경제 박람회’를 하나로 엮기도 했다. 전주시는 앞으로도 시민들에게 혁신의 개념을 흥미롭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7. 본격화된 복원사업, 전북가야의 정체성을 재조명하다
1,500여 년 전 운봉고원 일대에서 화려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전북가야의 정체성을 입증하기 위한 연구와 복원사업이 본격화됐다. 지난 3월 도는 발굴 조사와 학술 조사에 22억 원을 투입하고 전북가야가 가진 정체성을 입증하겠다고 밝혔으며, 문화재청은 심의를 거쳐 ‘가야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 후보로 선정했다.
지난 6월에는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추진’ 일환으로 전북가야의 역사적 위상과 역할, 문화유산 등에 대해 설명하는 특강이 펼쳐지기도 했으며, 봉수와 철기로 대표되는 전북가야의 정체성과 가야문화 확산을 위한 도민 화합의 장 ‘봉수왕국 전북가야 한마당 축제’도 11월 남원 유곡리와 두곡리 가야고분군 일대에서 열렸다.
또, 지난 12월에는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천진기)과 경북 고령 대가야박물관(관장 신종환)이 함께 전북지역의 가야문화를 소개하고, 그 중요성과 가치를 설명하는 <전북에서 만난 가야>를 펴내며 가야문화 알리기에 더욱 박차가 가해질 예정이다.
8. 국립민속국악원과 함께한 전통음악의 향연
지난 한 해는 국립민속국악원의 활동이 돋보인 해였다. 연초인 3월부터 전통음악의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고품격 예술무대 ‘토요국악 플러스’가 남원을 국악으로 물들였고, 전통 판소리 무대에 이야기를 더해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이야기가 있는 판소리-담판’도 눈길을 끌었다.
창극에 대한 열의도 빛을 발했다. 지난 8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창극 ‘지리산’을 선보였으며, 10월에는 ‘창극의 새로운 변화’를 풀어내겠다는 각오로 한 달간 다채로운 창극 무대를 선보이는 ‘대한민국 판놀음’을 펼치기도 했다. 국립창극단의 ‘변강쇠 점 찍고 옹녀’를 시작으로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의 ‘만세배 더늠전’, 연희공방 음마깽깽의 연희 ‘꼭두, 80일간의 세계일주’, 소리꽃가객단의 창극 ‘적벽에 불 지르다’, 창극의 살아있는 역사인 명인•명창을 망라하는 ‘명불허전’ 등이 국립민속국악원 일원을 풍성하게 채웠으며, 창극의 방향성을 주제로 한 토크콘서트 ‘옛설(藝設)’도 많은 시민들의 관심 속에서 치러졌다.
9. 선미촌, 예술로 경계를 허물다
이제 전국에 몇 곳 남지 않은 성매매 집결지 중 하나인 전주 선미촌. 눈에 빤히 보이지만, 쉬이 발걸음을 하기 어려운 도심 속 외딴섬인 이곳에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6월 선미촌에서 마을 주민과 함께하는 성악 공연이 펼쳐졌다.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조현상 성악가의 데뷔 공연으로, 젊은 예술인과 동네 주민 50여 명이 한데 모여 공연을 지켜봤다. 청년예술가 일곱 명이 모여 공동으로 운영하는 예술전문서점 ‘물결서사’에서 기획한 공연이었다.
선미촌 내에 위치한 물결서사는 단순한 책방을 넘어 새로운 문화의 결을 만들며 지역을 탈바꿈시키고 있다. 주민을 대상으로 한 워크숍이나 세미나, 작품 전시 등 상설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주민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또한, 기존 구도심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갈 곳을 잃은 지역 예술인들에게도 작품 활동을 이어갈 무대를 마련하고 있단 점에서 물결서사가 갖는 의미가 적지 않다.
10. 전북미술,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침체된 전북미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극복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지난 8월 ‘전북미술 이대로 좋은가’란 주제로 토론회가 진행됐다. 장석원 전 전북도립미술관장과 조병철 서양화가의 기조발제를 시작으로 자유로운 방식의 논의가 이뤄진 이날 토론회에서 장 전 관장은 전북미술의 현 상황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전주시립미술관 설립, 아시아 문화 심장터 조성을 위한 문화 정책, 시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국제적 문화 프로젝트 마련 등을 제안했다.
우진청년작가회는 “토론회를 통해 바로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었지만,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예술언어에 대해 이해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전북미술에 대해 바라보는 시간이 됐다”며 “토론의 내용을 지역 청년작가에게 전파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