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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 칼럼·시평 [문화칼럼]
판데믹 이후 뉴노멀은 어떻게 올까
김소연(2020-07-07 10:53:06)

판데믹 이후 뉴노멀은 어떻게 올까
글 김소연 연극평론가 /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지난 6월 14일 있었던 방탄소년단의 첫 유료 온라인콘서트 ‘방방콘 더 라이브’의 흥행에 관심이 높다. 최대 접속자가 75만 명이 넘었고, 접속자 수에서 추론한 매출액이 220억이란다. 접속 지역도 한국, 중국, 미국, 영국 등 107개국이었다고 한다. 5만 명 스타디움 공연을 15회 개최한 것에 맞먹는다는 것은 단지 숫자의 크기만이 아닌 것이다. 한 회의 온라인 콘서트가 월드투어의 효과를 올린 것이다. 이미 지난 4월 SM과 네이버TV가 슈퍼엠의 ‘비욘드 라이브’를 시작으로 온라인 유료 콘서트를 이어가고 있었고 이 역시 성공적이었지만 방탄소년단의 ‘방방콘 더 라이브’에 대한 관심은 기획사의 자평처럼 “전 세계에서 진행된 유료 온라인 콘서트 중 가장 큰 규모”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도 앞선 흥행을 훌쩍 뛰어넘는 ‘가장 큰 규모’다.


관심은 언론만이 아닌 것 같다. ‘방방콘 더 라이브’ 직후인 6월 19일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K팝 연예기획사, 대중음악협회 관계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온라인 유료 콘서트의 성공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기사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박양우 장관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적이고 수준 높은 디지털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앞으로 한류 성패의 지름길” “5G와 인공지능, 가상현실(VR) 등 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서 더 좋은 문화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등등을 역설했다고 한다. 대중음악이라는 특정 업계 관계자들과의 만남이라는 점을 감안 하더라도 국가 문화정책의 수장이 지금의 위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발언들이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인가

이들의 성공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위기는 기회’라는 달콤한 슬로건의 증명인가. 물론 그렇다. ‘방방콘 더 라이브’의 성공은 분명 판데믹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판데믹이 아니었다면 방탄소년단은 예정대로 4월 다시 월드투어를 시작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들의 성공은 새로운 것인가. 쏟아지는 기사들이나 문체부 장관의 ‘입’을 통해 다시 반복되는 새로움이란 그다지 새롭지는 않다. 더 큰 흥행, 더 많은 매출에 대한 관심이란 판데믹 이전부터 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매출과 수익을 성공의 지표로 전제하는 ‘성패의 지름길’ ‘좋은 문화상품’ 같은 말들은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다. 열거되는 기술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도 그런 것이 대규모 흥행을 성공시킬 만큼의 안정성을 갖추고 있는 기술들인 것이다. 물론 새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기대와 예상에 머물러 있던 매출과 수익을 실현했다. 그런데 이들의 놀라운 성공이 단지 기술에 대한 발빠른 적응 때문일까. 과연 관객들은 디지털 신기술을 보기 위해 돈을 지불했을까? 당연히 아니다. 관객들은 방탄소년단을 보기 위해 기꺼이 티켓을 구매한 것이다. 방탄소년단 그리고 그들을 만나고 싶어하는 팬덤이 먼저 있는 것이다. 기술은 판데믹의 위기 속에서 이 양자의 만남을 가능하게 했다. 수익을 현실화하는 데에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지, 기술이 곧 수익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새로움은 온라인 접속에서도 여전히 유지되는 ‘관계’다. 비단 대중음악의 월드스타들만이 아니다. 코로나19로 락다운이 시작되면서 세계 유수의 극장들은 주요 레파토리들을 온라인에서 무료로 상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들 역시 놀라운 조회수를 보여주면서 작품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었다. 비단 조회수만이 아니다. 온라인 상영은 무료로 이루어졌지만 많은 극장이 운영이 중단된 상황에서 후원이 쏟아졌다. 방탄소년단의 매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매출과 수익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는 엄청난 위기에 직면해있다. 후원으로 지탱할 수 있는 위기가 아니다. 극장들이 후원을 독려하고 관람객들이 후원에 참여하는 것은 ‘후원’이 경제적 행위인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원은 극장 문이 닫히고 막을 올릴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함께 극장과 공연예술을 지지한다는 연대를 드러내는 행동이다. 월드스타들의 온라인 콘서트라고 다를까? 이미 거대한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스타들이다. 그들의 온라인 콘서트 티켓을 구매하는 것은 디지털 기술을 소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타에 대한 팬들의 지지의 표명에 가깝다. (대중문화산업에서 팬덤은 산업의 중요한 토대이고 팬덤의 지지를 수익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대중문화산업이 꾸준히 발전시켜온 것이지 않은가.) 온라인 콘텐츠에 호응이 클수록 콘텐츠 자체에 대한 소비보다는 ‘함께’하는 이벤트로서의 효능이 더 크다. 관객은 기술의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온라인으로 공연영상을 감상한다는 것은 단지 평면의 모니터를 통해 시청각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만은 아니다. 공연영상이 상영되는 플랫폼에서도 관객들 간의 교류가 일어난다. 실시간 스트리밍은 더욱 폭발적이다. 비록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연시간에 맞추어 극장에 입장하여 공연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관객들은 플랫폼에 접속해서 공연의 시작을 기다린다. 빠르게 넘어가는 채팅창의 글들은 마치 공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객석의 웅성거림 같다. 흥미로운 점은 채팅창에서의 대화는 극장의 웅성거림보다 훨씬 폭넓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더라도 같은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사를 나눈다. 누군가 질문을 하면 답글이 달리고 잘못된 정보인지 아닌지를 두고 설전이 오가기도 한다. 이러한 대화는 상영 중에도 일어나는데, 진행되고 있는 장면에 대한 감상이 올라오면 호응하는 글들이 올라온다. 물론 이러한 대화가 극장에서 벌어지는 생동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니 그것과는 또 다른 감상의 집단 경험을 만들어낸다.


온라인 공연상영을 두고 새로움을 이야기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과거의 시간을 실어나르는 것에 가깝다. 단지 과거의 상영을 오늘 보여준다는 것이 아니다. 실황중계 역시 비록 극장은 닫혔지만, 극장이 닫히기 전 무대와 객석이 마주보고 있던 관계를 기술로 재현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과거의 경험으로 현재에 대응하면서 미래를 열어가는 존재다. 판데믹 이후 쏟아지고 있는 ‘새로움’이라든가 ‘전환’에 대한 이야기들에서는 종종 그 지렛대를 기술에서 찾고자 하지만, 기술이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건네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기술의 변화가 우리 삶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미래 역시 기술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 미래가 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은 때로는 변화에 저항하고 때로는 변화를 이끌면서 내일을 맞을 것이다. 그 내일이 어떤 것일지는 기술의 변화만큼이나 우리가 어떤 내일을 열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예술도 그렇다. 예술은 기술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만 예술의 혁신은 변화에 적응하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사유하는 데에서 이루어졌다. 보라. 관객들은 디지털 기술에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플랫폼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어간다. 지금 우리가 지나고 있는 판데믹의 위기는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있다. 뉴노멀은 그렇게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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