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장인의 공방 ① 전주_2
고즈넉한 한옥 속 피어난 한지 꽃
색지장 김혜미자 <이지원(以紙園)>
소담한 마당을 끼고 있는 고즈넉한 한옥, 그 안은 우리 한지 빛깔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전시실 같기도 하고, 박물관 같기도 한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색지장 김혜미자 장인의 공방이다. 방방마다 놓여있는 문갑, 탁자, 반닫이, 이층장뿐만 아니라 소반, 소통 같은 생활 소품까지 전부 그의 작품이다.
자신의 자택을 공방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는 제자들과 공방을 함께 쓰며 가르치고 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색지 선택이고 그다음이 문양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색은 작품이 쓰이는 환경에 어울리게 써야 하는데, 책으로 정리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는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색과 문양을 디자인하고 있다. 아내가 머무는 안채는 화사하게, 남편이 머무는 사랑채는 침착하고 진중하게, 사랑채에서 쓰는 소통이나 지통, 연갑의 문양은 학이나 대나무 같은 지조나 학문에 관한 것으로... 많은 작품을 만들어낸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1977년부터 10년 이상 해온 꽃꽂이를 통해 색에 대한 조화로움을 몸으로 체득한 그는 그 경험을 한지로 풀어냈다. “젊은 미술 전공한 사람들이 ‘작품의 색을 보면 선생님 나이를 전혀 모르겠다, 요즘 현대인들이 입는 옷 색깔과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을 칭찬으로 알고 있어.” 예전에는 한지 색이 오방색뿐이었지만, 지금은 100가지가 넘는다. 넘쳐나는 색상 속에서 작품과 어울리고, 문양과 조화를 이루는 색의 조합을 찾아내는 것은 세심한 관찰력과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양 디자인의 경우에도 역시 전승 자료가 나 연구 자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틈만 나면 박물관이나 골동품 가게를 다니며 많이 보고 연구하고 있다.
은은한 색의 조합과 섬세하게 피어난 꽃문양으로 꾸며진 그의 작품은 한옥뿐만 아니라 아파트 거실, 서재의 책상 위 어디든 잘 어울린다. “공예품이란 자고로 쓸모에 인테리어를 더한 예술작품이어야 해.” 그는 반짇고리조차도 서랍 안에 넣어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방에 꺼내 놓아 세간살이에 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색의 조합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중국에서 넘어온 ‘전지 공예’라는 말보다 ‘색지공예’, ‘색지장’이라는 말을 더 사용하도록 알리는 것이 목표고, 전통 기법을 가지고 현대적 색체와 디자인, 문양을 통해 쓸모에 인테리어를 더하는 고급화된 문화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대한민국의 한 명 뿐인 무형문화재 색지장으로서 책임이며,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그의 정신이 계속, 계속 후대로 전승되기를 바란다.
당초 꽃꽂이 연구가였던 장인은 1980년대 중반 전통한지공예의 매력에 빠져 한지공예를 시작했다. 호진 상기호 선생에게 전지공예를, 충남무형문화재 지승장 최영준 선생에게 지승공예를 사사한 그는 박물관의 자료와 내려오는 유물을 통해 지호공예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전통한지공예의 여러 기법을 익혔다. 그중 섬세하고 고운 색지공예를 집중적으로 작업했다. 그는 전승 자료가 거의 없는 전통한지공예의 한계를 극복, 여러 박물관의 유물 등을 통하여 일상에서 쓰인 전통한지공예 작품을 복원하는데도 열정을 쏟아, 많은 유물들이 그의 손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완산구 한지길 106-2
전통의 바람, 그윽하게 불어오다
선자장 박계호 <선자청>
무더운 여름, 전통 수공예품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부채다. 지금은 그 자리를 선풍기나 에어컨에게 내주긴 했지만, 여전히 여름에 가장 많이 판매되는 수공예품으로서 부채가 사랑받고 있단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합죽선은 한국 고유의 전통 미와 예술성을 간직한 수공예품으로서 전주를 대표하는 전통 자원이기도 하다.
전주시보건소 인근에 대를 이어 전주 부채의 전통을 지켜 가고 있는 공방이 있다. 박계호 장인이 운영하는 ‘선자청’이다. 장인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부채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통로들을 열어 왔다. 아버지 대부터 시작한 드라마, 영화 부채 협찬을 비롯해 6년 전에 문을 연 선자청 역시 우리 부채를 알리는 통로 중 하나다. 공간엔 아버지 박인권 장인의 작품들을 비롯해 그가 만든 아름답고 단아한 부채들이 진열돼 있으며, 한편에는 그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들을 할애하는 공방도 마련돼 있다. 지난해부터 시민들이 부채와 더욱 친숙하게 만날 수 있도록 부채 제작 체험 교실을 열어 왔으며, 올해에도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여름부터 체험 교실을 열 계획이다.
“작업을 할 때도 전혀 일을 하고 있단 생각이 들지 않아요. 현대 사회에선 많은 사람들이 쫓기듯이 살잖아요. 그런데 공방에 앉아서 작업을 하다 보면 천천히 과거로 돌아가서 그 시간에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아요.”
그에게 부채가 만들어지는 공방은 ‘쉼터’다.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공방에만 앉으면 금세 화가 식는단다. 그런 몰입의 공간인 동시에 뿌리 깊은 전통에 대한 자긍심, 아버지 세대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을 자기 대에서 이뤄야 한다는 책임감, 어떻게 우리 부채를 더 알릴 수 있을지 앞으로의 숙제를 고민하는 사색의 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부채만을 만드는 작업장이 아니라 우리 것에 대한 수많은 고민들이 켜켜이 쌓인 거목의 나이태 같은 공간. 공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손때 묻은 도구들이 그런 고민의 흔적들에 깊이를 더한다.
옛 부채를 복원하는 작업에도 전념하고 있는 그는 다른 선자장들이 잘 만들지 않은 피선, 채화선 등의 부채를 만드는 데도 남다른 열정을 쏟고 있다. 그는 장인은 재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흔들림 없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정신력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전통의 향기가 그윽하게 배인 공방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보며 장인이 장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시금 확인한다.
장인은 1970년 진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선자장 박인권의 일을 도우며 부채를 만드는 일을 배웠다. 학생 때부터 배운 일이기에 익숙하기도 하고, 부채를 만드는 일이 재미있기도 해서 30년 넘게 부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드라마와 영화 협찬하는 일은 1991년 아버지인 박인권 장인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극에서 쓰는 부채는 역사적 배경과 생활상에 맞게 재현해서 만들고 있다.
처음 부채를 만들기 시작할 때는 왜 예전 방식 그대로 만들어야 하는지 잘 느끼지 못했지만 부채를 30년 넘게 만들다보니 왜 그렇게 만드는지 알게 되었다는 그는 옛 재료나 전수받은 기법 그대로 작품을 제작하여 옛 것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며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 지켜가고 있다.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로 29
나무로 시작해 나무로 끝나는 공간
목공예장인 박기춘 <박기춘 공방>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각종 건물과 가재 도구의 대부분을 나무로 만들어 사용했다. 궁궐과 관아 같은 공공건물을 비롯해 모든 사사로운 주택도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그 안에 비치되는 기물도 목제품의 비중이 높았다. 때문에 전통 사회에서 목공예는 일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 속 공예기도 했다.
전주 평화동성당 인근에 우리의 소중한 전통 가구들을 재현해 내고 있는 장인이 있다. 50년 넘게 나무와 부대끼며 호흡을 같이해 온 박기춘 장인이다.
그의 공방에는 가마, 교자상, 삼층장 등 다양한 형태의 목공예품들이 아름답고 단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우리나라 토종 나무들인 참죽나무, 육송, 홍송, 벚나무, 은행나무, 편백나무, 괴목 등 수북이 쌓아 올려진 각종 원목 재료들도 눈길을 끈다. 문자 그대로 나무와 함께 시작해 나무로 하루를 마감하는 장인의 삶이 단적으로 보여지는 공간이다.
전주 풍남제 행사 때 가마행렬을 위해 만든 가마도 눈에 띈다. 장인은 1회부터 3회까지 전주 풍남제 가마행렬 때 사용된 가마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목공일을 수십 년 해 온 경험 많은 목수도 어지간해서는 만들어 내지 못하는 가마를 만들어 낸 것만 봐도 그 대단한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그가 목공예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현대적 가구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전통 기법을 접한 것은 1년에 불과했지만, 타고난 눈썰미 덕분에 가구의 전체적인 형태만 봐도 어떻게 제작해야 될지 방법이 떠오른다고 한다.
“우리나라 기술은 짜맞춤이기 때문에 못을 전혀 안 쓰고 정교하게 짜맞춘 것을 최고로 칩니다.”
그 말처럼 그가 작업한 가구엔 못을 쓴 흔적이 전혀 없다. 전부 장부짜임(목재의 옆면에다 길게 홈을 파고 다른 목재의 장부촉을 끼워 맞추는 기법)과 연귀촉짜임(두 목재가 45도로 만나고 그 안에 촉을 물리는 기법) 같은 전통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통 가구를 재현함에 있어 과거의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적 조형성과 실용성을 담아내는 독창적인 시도들도 그의 감각을 엿보여 주는 부분이다. 물론 짜임 기법 등 그 기반에는 전통이 깔려 있지만, 현대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도록 전통을 풀어내려는 노력이 무척 돋보인다.
장인은 12살이 되던 해 학업을 뒤로 한 채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목공소에 들어가 목공일을 배웠다. 20세 되던 해 서울로 올라가 큰 규모의 가구점에 목공 기술자로서 ‘제2의 삶‘을 살게 된다. 설명만 하면 용도에 꼭 맞는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어내는 그의 이름이 알려지면서 큰 규모의 호텔 내부공사 일체가 주어졌다. 그러나 IMF 때 공사대금 수금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사업을 청산하고 고향 전주로 돌아왔다. 전주 평화동 인근에 목공예방을 차린 후 오늘까지도 나무와 함께 살아오고 있다.
전주시 완산구 꽃밭정5길 11
한 올에 마음을 담아 짓는 한복
침선장인 박순자 <복식문화연구원 한복의 美>
예로부터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 요소 세 가지를 의식주라 했다. 이 세 가지 요소 중 ‘의’가 가장 먼저 나오는데, 여기서 조상들이 무엇을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일찍이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던 우리나라는 불교와 유교 사회를 거치며 연장자에 대한 존경과, 신분에 따른, 상황과 장소에 따른 예를 중시했고, 이를 의복을 통해 나타냈다.
출토복식을 연구하고 재현하는 일을 하고 있는 박순자 장인은 여전히 의를 으뜸으로 여기지만, 요즘 주, 내 집 만들기, 좋은 집 마련하기에 가장 몰두하고 있는 사회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동양 철학과 한복을 접목시킨 그는 이제는 옷을 지어주는 것보다 가지고 있는 지식, 손기술, 색상, 신분, 나이에 따른 의복 예절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 세대로 이어가도록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장인이 가르치고 작업하는 공방 ‘복식문화연구원 한복의 미(美)’은 처음에는 전시공간으로 사용하다가 공간을 분리해 한쪽을 작업 전용 공방으로 만들었다. 작업실 쪽에는 모든 벽면을 꽉 채울 정도로 많은 옷장이 놓여 있는데, 이곳에는 장인과 제자들이 재현한 의복들이 가득하다. 공방 가운데에 커다란 책상을 붙여놓고 함께 바느질을 하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봐가며 작업이 진행된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단순히 한복을 배우러 온다기보다 진짜 전통 바느질을 배우고 싶어서 온다. 재봉틀이 나오기 전의 손바느질. 이것이 전통 바느질인데, 전통 바느질의 특징은 바로 올을 맞추는 것이다. “예전 할머니들이 ‘한 올만 가지고도 옷이 잘 되고 못 되고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말하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한 올이 옷을 만들고 나면 보여요.” 이 작은 올을 맞추는 것이 바로 바느질의 기초다. 특히 한복은 직선이라 한 번만 빨아도 바로 티가 난다. “올을 맞춘 옷은 어떤 방향으로 잘라도 다 이어져요. 이게 진짜 신기하고 재밌는데, 바느질하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해요” 올을 맞추기 위해서는 올을 잡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차분히 해야 한다. 그는 올을 잡을 수 있는 정신만 되면 삶도 바르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출토복식의 경우 대부분 수장고에 보관되기 때문에 이를 직접 가지고 수업하기 힘들지만, 그는 이를 다 재현했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 장인은 재현한 옷을 가지고 복식 전문 박물관을 만들어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전통 바느질을 가르치고자 한다.
장인은 결혼하고 시할머니로부터 생활 한복 만드는 것을 배웠다. 원래부터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옷 만드는 것에 흥미를 붙이고, 익산의 학원에서 양장과 한복 만드는 것을 배워 가게를 차렸다. 손님의 주문에 맞춰 옷을 만들다 보니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고, 본격적으로 한복에 대해 배우기 위해 단국대 사회교육원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곳에서 처음 ‘출토복식’에 대해 알게 된 뒤, 바느질의 아름다움과 매력에 빠졌다. 한복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에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고, 현재 원광디지털대학교, 호원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로 36 2층
소리전당에서 만나는 부채
선자장 방화선 <방화선부채갤러리>
맛과 멋, 소리의 고장 전주. 그 풍류를 한껏 즐길 수 있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 한 가운데 무형문화재 선자장 단선 보유자 방화선 장인의 공방이 있다. 2001년 소리문화의전당 개관 당시, 그가 만드는 아름다운 부채에 반한 운영단체는 소리문화의전당을 전주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으로 더욱 풍성하게 하기 위해 지금의 국제회의장 1층 로비에 자리를 마련해 함께해주기를 요청했다.
초반에는 전시장으로만 운영됐지만,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인 만큼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었던 그는 전시 공간 한편을 작은 공방으로 조성했다. 그의 부채가 전시되어 있는 매대 뒤 공간이 바로 공방이다. 따뜻한 온돌 바닥에 작업할 수 있는 책상이 놓여 있고, 어디에 앉든 손 뻗으면 닿는 곳에 부채를 만들 때 필요한 재료들과 도구들이 가득하다. 거기에 작은 냉장고와 차를 마실 수 있는 컵과 티백까지, 좁지만 없는 것이 없는,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대를 깎고, 살을 이루고, 한지에 살을 놓고, 손잡이를 깎는 과정까지 전부 공방에서 이뤄진다. 그에게는 집보다 더 오래 머무는 친숙한 곳인 동시에 소리전당을 찾는 사람에게는 언제든지 방문해 그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곳이다.
그의 부채는 더울 때 부치기 위한 부채라기보다는 하나의 예술작품 같다. 선면에 그려진 그림에 따라 부채 모양과 색, 손잡이 형태가 바뀌면서 부채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려진 그림이 꽃이면 그에 맞는 가지와 뿌리가 있어야 해. 그걸 손잡이로 표현하는 거지.” 그렇다고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의 부채는 언제 부쳐도 시원한데, 살을 고르게 놓고, 좋은 재료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스승이자 아버지인 고 방춘근 선자장은 딸이 공부를 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부채를 만들지 못하게 했지만, 어린 장인이 몰래 살을 놓은 것을 보고 잘해서 흐뭇해했을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살 놓기의 고수였다.
그는 개방된 공간에 위치한 공방의 특수성을 잘 활용하면서 이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인 부채 만드는 것에 대해 가르치는 일을 시작했다. 체험활동으로는 거의 처음 시도한 것으로 단지 이미 반절 완성되어 있는 제품에 그림만 그리는 체험이라기보다는 전주 부채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가를 알 수 있도록 구성했다.
방 선자장은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돈을 받지 않고 가르친다. 그런 제자들의 모임이 나린선이다. 단순한 체험도 가능하지만 진정으로 전통과 부채를 사랑하고, 기술을 배우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는 특별히 제자로 받아서 가르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채의 아름다움을 알기 바라며, 전주 부채의 맥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장인이 주로 만드는 부채는 부챗살에 비단이나 종이를 붙여 만든 둥근 모양의 단선이다. 전통을 잇는 또 하나의 방법은 답습이 아니라 전통을 지키면서도 재해석한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채에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기 위해 부채면에 현대적인 그림과 글씨도 넣어보고, 손잡이 부분을 전체적인 디자인에 맞춰 새롭게 조각해 보기도 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함으로 부채 틀에 한지를 입히고 문양을 그려 넣으며 아름다움을 극대화시켜 나갔다. 그는 전시 외에도 전통부채 아카데미와 체험 프로그램 운영 등 전주 부채의 대중화와 재도약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덕진구 대지길 13-4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국제회의장 1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