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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디지털 리마스터링 시대의 영화에 대한 단상
체리 향기
김경태(2020-07-07 13:09:57)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체리 향기


디지털 리마스터링 시대의
영화에 대한 단상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최근 첸 카이커 감독의 <패왕별희>(1993)가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후 재개봉을 했고, 무려 1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재개봉이라는 특수한 여건뿐만 아니라 코로나19의 여파로 극장관객이 급감한 걸 감안하다면, 기대 이상의 성적임에 틀림없다. 관객들은 오래전에 봤던 감동적인 영화에 대한 기억을 보다 ‘선명하게’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서 극장을 찾는다. 영상의 해상도는 감동의 강도와 비례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오랜 전에 봤던 좋은 영화들이 첨단 기술의 손길로 더욱 뚜렷한 윤곽과 색감으로 재탄생하기를 늘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 하나였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체리 향기>(1997)가 마침내 영화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HD 화질로 관람할 있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참고로, 이 영화는 중년 남성 ‘바디’가 수면제를 먹고 누운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고 흙으로 덮어줄 사람을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나는 곧바로 결제를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다운로드 받아서 봤다. 쇼트 하나하나가 너무나 선명해서 신기했고, 마치 그 영화를 처음 접하는 것처럼 연신 감탄하면서 봤다. VHS나 DVD 화질로는 차마 포착하지 못한 디테일들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특히나,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 준 영화들에는 익스트림 롱쇼트가 많은 편인데, 높은 해상도가 후경의 인물까지 뚜렷하게 살려내면서 작품의 진가를 배가시켰다.



고백컨대, <체리 향기>는 내가 영화를 진지한 '학문'으로 대하는 계기가 되었던 작품이었다. 대학생이었던 나는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온 VHS테이프를 (자취방에 플레이어가 없어) 학교 도서관 시청각실의 작은 모니터로 봤다. 그때 느꼈던 그 기이한 전율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쉽게 납득할 수 없었지만, 이전에 본적 없는 그 낯선 촬영과 호흡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저급한 화질과 작은 화면도 그 감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후, DVD로 발매 되었을 때, 내심 더 좋은 화질을 기대하며 찾아봤지만,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 영화는 수면제를 먹고 흙구덩이에 누운 바디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즉 그의 생사 여부는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약 1분간의 암전이 있은 후, 촬영현장을 캠코더로 찍은 메이킹 영상이 등장한다. 흔히들 음악이나 문학의 종결부에 빗대어 '코다coda'라고 부르는 장면이다. 거기에는 영화의 무거운 주제와 달리, 배우와 스태프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나온다. 근데 그게 삭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영화학자들은 이 메이킹 영상을 중요하게 언급하며 분석해왔다. 그들에 따르면, 그 덕분에 이 영화의 의미가 보다 다층적이며 한층 풍부해진다. 요컨대, 그것은 바디의 생사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 ‘열린 결말’과 맞물려, 너무 쉽게 삶을 긍정하는 메시지를 던지지 않으려한 감독이 주는 최소한의 윤리적 배려이다. 따라서 그 터무니없는 삭제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추측컨대, 디지털 리마스터링 과정에서 캠코더로 찍어 화질 개선에 한계가 있는 그 영상을 날려버리고 결정한 게 아닐까. 메이킹 영상이니 없어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전혀 문제 될게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언제나 보다 좋은 화질을 우위에 두며 욕망하는 시대가 낳은 안타까운 사건이자, 높은 해상도의 ‘기술’이 낮은 해상도의 ‘예술’을 압도해버리는 징후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가 된다면 주변에 <체리 향기>의 HD버전 출시 소식을 전하며 적극 추천할 것이다. 삭제되어 버린 메이킹 영상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 그리하여 저화질의 가치를 한번쯤 상기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그래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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