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책이야기 | 에밀리 넌 <음식의 위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글 이휘현 KBS전주 PD
지은이 에밀리 넌
출판사 마음산책
서른세 살의 평범한 주부 앤 와이스는 외동아들 스코티의 여덟 번째 생일을 며칠 앞두고 동네 쇼핑센터에 자리한 베이커리에서 멋진 케이크를 주문한다. 초콜릿 케이크 위에 하얗게 뿌려놓은 별들. 그 밑에는 우주선이 설치된 발사대. 그리고 반대쪽 빨간 행성 아래에는 아이의 이름 ‘스코티’가 초록색으로 새겨질 예정이다. ‘이 케이크를 보면 엄청 좋아 할거야.’ 즐거운 마음의 앤은 제빵사에게 집 전화번호가 담긴 메모지를 건넨다.
하지만 생일 케이크의 촛불은 켜지지 않는다. 스코티가 생일 아침 등굣길에 차에 심하게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기 때문이다. 병원에 실려간 스코티는 좀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앤과 그의 남편 하워드는 미동도 없는 아들의 병실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두려움에 떠는 이들 부부에게 담당의사는 “아드님은 곧 깨어날 겁니다”라면서 안심시킨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스코티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앤과 하워드는 집과 병원을 교대로 오가며 잠과 식사도 잊은 채 아들이 일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기다림과 조바심에 서서히 지쳐가던 두 부부의 바람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스코티가 눈을 뜬다. 그러나 아들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온다. 그게 스코티의 마지막 숨결이었다.
아들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 앤과 하워드.
늦은 밤 집에 도착하자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다. 그 고르지 못한 숨소리 너머 들려오는 기계음. 스코티가 사고 나고 며칠간 앤과 하워드가 번갈아 집에 들어왔다가 받게 된 정체불명의 전화도 비슷한 배경음이 있었다.
스코트. 케이크. 전화번호. 앤은 이 정체불명의 전화가 누구에게서 걸려온 건지 감지한다.
“그 놈이야. 그 개자식. 죽여버릴 거야.”
쇼핑센터로 곧장 달려간 앤과 하워드는 베이커리의 닫힌 문을 두드린다. 이내 뚱한 표정의 제빵사가 얼굴을 내민다. “만든 지 사흘이나 지난 케이크를 가지러 오셨다 이거지?” 앤과 제빵사 사이엔 가벼운 설전이 오간다.
“우리 아들은 죽었어요.” 앤은 냉정하고 침착한 목소리로 잘라 말한다. “그애는 죽었어요. 그애는 죽었다구, 이 못된 놈아!” 앤은 무너지고 만다.
그 순간 놀란 제빵사는 앞치마를 풀고 앤과 하워드에게 접이식 탁자를 하나씩 꺼내준다. 그리고 아들 잃은 부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넨다. “아마 제대로 드신 것도 없겠죠.” 그는 구운 지 얼마 안 된 계피롤빵을 가져온다. 커피도 한 잔씩 건넨다.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앤은 문득 허기를 느낀다. 롤빵은 따뜻하고 달콤하다. 제빵사는 얘기를 하기 시작한다. 중년을 지나며 갖게 된 자신을 향한 복잡한 심경, 제빵사라는 직업의 고독감, 매일 오븐을 빵으로 가득 채웠다가 비워내는 반복되는 일상 등등. 지치고 비통한 마음은 여전하나 부부는 제빵사의 시시콜콜한 말에 귀 기울인다. 그리고 빵을 먹는다. 그렇게 그들은 이른 아침까지 이야기를 나누지만 창 너머 햇살이 환해졌는데도 좀체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의 단편소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은 언제 읽어도 마음속에 잔잔한 감동을 안긴다. 아들 잃은 고통과 슬픔이 빵 몇 조각과 싱거운 말 몇 마디로 어찌 치유될 수 있을까. 하지만 갑작스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에게는 입속에 맴도는 빵의 달콤한 향만으로도 아주 잠깐일망정 치유의 순간을 맞을 것이다. 그 만큼 그들에게는 위로가 절실하다.
아마 에밀리 넌(Emily Nunn)도 위로가 간절했던 듯 싶다. 미국의 유명 잡지에서 음식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그녀의 삶은 오빠 올리버의 죽음(자살) 이후 끊임없이 추락한다. 결혼생활은 파탄 나고 알콜중독자까지 된 그녀는 일상을 재건하기 위해 계획을 하나 세운다. 이름하여 ‘위로 음식 투어’
고향을 찾아간 그녀는 오랜만에 일가친척들과 만나며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그 음식들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 추억이 점점이 박혀있다. 그녀는 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되새기고, 이 과정을 통해 큰 위로를 얻는다. 음식 칼럼니스트답게 각 에피소드의 중간이나 끝에는 글에 등장하는 각종 요리의 레시피를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그렇게 이야기의 부피가 늘면서 책이 한 권 탄생했다.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된 <음식의 위로>는 올해 5월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었다.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이 지나치게 많이 기록되어 있고, 글에 등장하는 요리 레시피가 지극히 미국적이라 글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풍미는 많지 않다. 한국 독자들에겐 이게 큰 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위로가 절박한 누군가들에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일상에서 찾게 되는 조금은 특별한 음식일 수도 있다는 사실. 그 단순한 진실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큰 힘을 발휘한다.
그레이스 정(Grace Jeong)은 2001년 여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21년 전 이민 간 내 큰 누나의 둘째 딸이자 내 사랑스런 조카이기도 하다. 작년 봄 큰 누나 가족이 한국에 몇 주 머물다 갔다. 당시 토론토의 유명 대학 입학을 앞둔 그레이스를 두고 큰 누나 부부는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아내 몰래 현금 2백만 원을 뽑아 그레이스의 첫 등록금에 보태라며 큰 누나에게 안겼다. 일명 ‘삼촌 장학금’을 수여한 셈이었다.
그레이스는 지난 5월 말, 열아홉 번째 생일을 두 달 남겨두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19로 대학교가 휴강하자 고향집에 내려와 있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은 내 조카의 죽음은, 나에게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참척의 고통에 시달리는 누나 가족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저 머나 먼 이국땅 휴대폰 너머로 울먹이는 누나를 향해 나는 이렇게 말할 뿐이다. “누나, 매형이랑 바람도 좀 쐬고 일부러라도 맛있는 것들도 만들어 먹고 그래.” 그러마고 건성으로 답하는 누나가 물 말은 밥 한 숟가락 제대로 넘기지 못할 거란 거 잘 알면서도 나는 매번 그렇게 말한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음식이 분명 있을 거라 믿으면서.
하루라도 빨리 하늘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누나 가족과 만나 맛있는 요리 만들어 먹으며 실컷 울고, 또 웃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