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영 복원, 전라도 역사를 바로 잡는다
글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 관장
우리 역사에 행정구역으로 ‘도(道)’가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이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이 고려시대에 탄생되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의 도는 행정구역으로서 도이고 통치행정상의 도는 아니다. 감영이 설치되고 감사가 임용되어 일도를 총괄하는 통치행정상의 도는 고려말 1388년(창왕 원년) 도관찰출척사가 파견된 데서 비롯되었다.
전라감영은 조선시대 전라도 일도를 총괄하는 도내 최고통치행정기구이다. 전라감영에 전라감사가 임용되어 전라도, 즉 오늘날의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제주도까지 다스렸다. 감사는 또 지금의 도지사와 달리 행정만이 아니라, 사법, 군사까지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전라감사는 왕권을 위임받아 전라도 일도를 통괄하는 도내 최고통치행정권자였다.
이러한 전라감영이 전주에 설치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전라감영은 임진왜란 후에도 경상감영과 충청감영과 달리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않고 전주에 있었다. 조선 건국 후 각 도의 감영은 임금의 덕이 순차적으로 내려간다는 전제하에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으나, 17세기에 감사가 감영에 머물며 다스리는 유영제로 바뀌면서 감영은 도의 지리적 중심지로 옮겨졌다. 그런데 전라감영만은 조선 후기에도 전주에 그대로 있었다. 아마도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 풍패인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전주는 이런 곳이었다. 조선왕조가 일어난 풍패지향으로 조선의 근본이 되는 땅이었으며, 전라도 일도를 전제하는 전라감영이 소재한 호남의 수부였다. 고려 후기 전라도안찰사영이 전주에 설치되었고, 이어 조선시대 전라감영이 전주에 설치되어 조선말까지 이어졌던 곳이다. 전주는 전라도 천년의 중심이요,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전라감영의 복원은 이러한 전라도 천년의 중심 전주의 역사적 위상을 바로 세우고, 전라도 천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전주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일이다. 그래서 호남의 수부로서 전주의 역사성을 대내외에 분명히 하고, 전주와 전북인의 자긍심과 자존감을 드높이며, 역사도시 전주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전북 미래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
전라감영은 또 문화관광의 명소로서 전주의 가치를 드높이고, 원도심을 전통문화권역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중심적 축이다. 전라감영 복원은 역사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어느 문화시설을 건립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차별성이 있고 흡입력이 강한 것이 아니라면 역사를 자원화하는 전라감영 복원만 못하다. 전라감영 복원은 조선시대 지방정부의 형태를 보여주고, 한옥마을에서 전주객사에 이르는 조선시대 지방통치 거점도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어 향후 또 한 단계의 발전을 그려 볼 수 있다.
현재 복원된 것은 전라감영 동편 전라감사 영역이다.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당을 중심으로 제2 정청이라고 할 수 있는 관풍각, 감사의 처소인 연신당, 감사 가족들의 생활공간 내아, 선화당으로 들어오는 내삼문이 복원되었다. 전라감영의 핵심 공간이 복원된 것이다. 감사의 사적 보좌관인 비장들의 근무처 비장청만 내삼문 동편에 복원되었으면 전라감사 영역의 골격을 다 갖추게 되는데 여건상 그러지 못했다.
전라감영이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남은 과제도 만만치 않다. 우선 전라감영 영역의 서편과 남쪽을 복원해 감영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 지금 복원된 것은 전라감사 영역이다. 전라감영의 핵심영역이지만 감영의 규모와 위상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감사영역만으로는 대구감영, 원주감영, 공주감영과 별 차별성이 없다.
40여 채에 이르는 모든 감영 건물들을 복원하자는 것이 아니다. 감영 전체 영역에 핵심 건물들만 복원하자는 것이다. 여전히 서편에 문화시설을 건립하려는 생각이 한편에 있다. 그러나 그 반쪽 난 땅에 다른 시설이 들어서면 어정쩡한 것이 되어 전라감영도 못 살리고 문화시설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전라감영의 서편과 남쪽편은 통치행정과 문화예술의 중요 건물들이 자리한 공간이다. 도정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인 영리들의 관서 영리청은 서편에 큰 규모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 위쪽으로 종9품 심약이 근무하는 심약당, 검률의 근무처 검률당이 있었다. 감사의 보좌관 종5품 도사의 집무처 현도관은 감영 영역을 벗어나 객사 앞 동편에 있었다.
감영의 남쪽, 지금의 완산경찰서 자리에 감영의 군대를 관장하는 정3품 무관 중군의 집무처 중영이 있었고, 감영 내의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들의 관서 작청이 있었다. 완산경찰서 사거리, 작청 쪽으로 전라감영의 정문인 포정루가 있었다.
전라감영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시설들은 감영 서편과 남쪽에 있었다. 종이 만드는 지소와 책을 찍는 인출방이 서편에 있었고,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이 감영의 남쪽 지금의 완산경찰서 서편에 있었다. 감사 영역 서편에는 또 대사습의 산실 통인청이 있었다.
여기에 전라감사 영역에서 빠진 비장청이 복원되면 전라감영의 핵심건물들이 복원되는 셈이다. 향후 이상의 주요 건물 10여 채 정도만 더 복원하면 전라감영의 전체 모습을 갖추어 그 위상과 규모가 나온다. 1단계 동편 복원작업은 마쳤으므로 이를 오픈하여 원도심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하면서, 향후 2단계로 서쪽 부지를 복원하고, 그 다음 단계로 완산경찰서를 이전하고 감영 남쪽을 복원하는 방식이다.
전주만큼 감영부지를 다 확보한 곳이 없다. 이전에는 감영부지가 구 도청부지를 넘어선 넓은 영역일 것으로 보았지만, 2017년 전주역사도시 연구조사를 통해 감영의 동서편 영역은 구 도청부지가 전체이고, 남쪽으로는 완산경찰서와 구 국민은행 자리까지임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렇게 감영이 있던 역사적 자리에 감영 건물을 전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은 전주밖에 없다. 이 강점을 살려야 한다.
완산경찰서 이전에 대해 주변 상가들이 반기지 않고 있다. 그나마 경찰서 근무자와 유동인구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복원된 동편 영역 활성화가 중요하다. 복원된 동편 영역이 관광자원으로서 긍정적 싹을 보여주면 향후 감영 복원 작업이 탄력을 받을 수 있다.
전라감영의 향후 또 하나의 중요 과제는 국가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는 일이다. 원주감영에 에 이어 근래 대구 경상감영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아직은 사적으로서 부족하더라도 향후 변화된 여건하에 사적 지정을 검토할 수 있다. 사적 지정을 염두에 두고 한 걸음씩 나가야 한다. 예전처럼 사적이라고 해서 활용을 위한 시설을 못하는 시대는 아니다.
하나의 바람을 더 가져 보면 전라감영 복원을 기념해 전주와 전북, 나아가 전라도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학술대회를 매년 연차적으로 열어갔으면 한다. 전라감영과 지방통치만을 주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라감영으로 상징되는 전주와 전라도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을 주제로 한 학술대회이다. 전라감영에서 전라도의 역사성을 회복하고 새 역사를 써가는 것이다. 전라도의 역사를 바로잡는 전라도정명(正名)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라도는 오랜 역사에 걸쳐 위정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다. 조선왕조가 전라도를 충절의 고향이라고 했지만 그에 맞게 예우했는지는 의문이다. 전라도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 강하였고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변혁적 성향이 강했다. 이는 위정자들에게 부담이었다. 전라도의 역사는 그래서 왜곡되었다. 이것을 전라감영의 복원과 함께 전주, 전북에서 바로잡고 새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