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
관계의 의미를 사유하기 위한
동물되기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원래 극장 개봉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넷플릭스로 직행한 <울고 싶은 나는 고양이 가면을 쓴다>(2020)는 ‘인간의 동물되기’, 나아가 ‘동물의 인간되기’라는 판타지의 의미를 묻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다. 여중생 ‘무게’는 아버지, 그리고 아빠와 재혼한 ‘가오루’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재혼한 아빠도, 집을 나간 친엄마도 싫다. 대신, 무게는 짝사랑하는 같은 반 남학생 ‘히노데’가 삶의 낙이다. 그를 향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만, 히노데는 그런 그녀를 부담스러워하며 외면한다. 축제날에 만난 마스크 장수로부터 산 고양이 마스크를 쓰고 아기 고양이 ‘타로’가 되어 히노데 앞에 나타난다. 평소에 무뚝뚝하기만 했던 히노데는 환한 표정으로 타로를 품에 안는다. 무게는 비록 고양이의 모습으로나마 히노데의 사랑을 받을 수 있어 행복할 따름이다.
도예가를 꿈꾸는 히노데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는 타로를 품에 안고 말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싫어하고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도 싫을 것 같다고. 이 말인즉슨,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불만의 대상은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불편한 관계 논리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타로 역시 세상의 일부이며 그와의 관계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말 없는 동물들과의 정서적 교감에 몰입하며 도피처를 찾는다. 어느 날, 히노데는 무게에게서 타로와 같은 냄새를 맡게 된다. 아니, 원래 그 냄새는 무게의 것이었다. 그것은 치장할 수 없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의 본질적 요소이자 편견 없이 서로에게 다가간다는 증거로서 두드러진다. 히노데에게 동물은 아무런 가식 없이 자신을 대하는 존재로, 그가 원하는 관계 맺기의 단서를 제공한다.
무게는 용기 내어 고백을 하지만 실패로 끝이 난다. 결국 무게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완전한 고양이가 되고자 집을 나간다. 그런데 뒤늦게 무게는 히노데의 진심을 알게 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한편, 가오루가 어린 시절부터 키워온 고양이 ‘기나코’가 인간 마스크를 쓰고 그녀 행사를 하고 있다. 고양이가 되려는 무게의 대척점에는 인간이 되려는 기나코가 있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기나코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낸 가오루 곁에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무게의 모습으로 그녀 곁에 좀 더 머물고자 한다. 히노데와 기나코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하는 듯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사랑하는 사람 곁에 오래 머무는 것. 여기에서 핵심은 관계이다. 자신이 갈망하는 관계를 위해서 태생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 그것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런데 기나코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다. 가오루가 사라진 기나코를 잊지 못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관계도 영원할 수 없으며 상실을 감내하고 애도해야만 한다. 상실을 마주하는 용기는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시발점이 된다. 이제 다시, 인간은 인간으로, 고양이는 고양이로 제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세상 저편의 고양이 세계에는 인간이 싫어 고양이가 된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고양이(인간)가 되고 싶어서 고양이(인간)가 된 것은 아니다. 관계적 사유를 통해서 관계 안에서 가장 필요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나갔을 뿐이다.
특히, 인간이 고양이와 같은 귀여운 동물되기는 정동적 전환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이다. 동물성을 경유하는 것은 인간의 관계를 근원에서부터 재사유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것은 어떠한 복잡한 인간적 이해관계를 떠나, 마주 보고, 안아 주고, 냄새 맡고, 먹여 주는, 가장 원초적인 돌봄 행위 안에서 함께 하는 관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