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고 펴내는 힘으로 지역이 되산다는 허무맹랑으로부터
글 이대건 책마을해리 촌장
‘되었던’이 아니라 여전히 ‘되고 있는’ 책 공간 이야기
흉흉하다. 하루하루 커가는 ‘확진자 숫자’, 흉흉하다 못해 괴기스럽다. 그냥, 한편의 괴기영화를 보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이 여름밤 등줄기를 오싹 움츠러들게 잘 편집된 한 편의 호러영화였으면 좋겠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그럴 리 없기는커녕 날로 확산되는 이 사태에 마음 졸이며, 책마을해리는 지난 세 계절 열었다 닫았다를 거듭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흐르는 것이, 이야기가 아니라 ‘감염병’과 흉흉한 소문이 된 시절이다. 이야기를 모으고 활자가 책이 되는(아직은 ‘되었던’이라고 하지 말자) 책 공간 이야기를 시작한다.
쓰는,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려 되살려
누구나 책이 되는 책마을해리는 고창군 해리면 나성리 월봉마을에 자리해 있다. 지금은 월봉성산길이라는 길이름 주소가 되어 나성리며 월봉마을이며 오랜 지명이 자취를 감추었다. 나성리 이 공간은 지금은 책마을해리가 된 나성초등학교(초등학교)를 낳았고 그 지명 아래 수천 명 아이들에게 배움터가 되었다. 어느 날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도시로 도시로 떠나기 전까지는.
나성은, 노래에도 등장하는 이름이다.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몇 해 전 영화 <수상한 그녀> 주제곡으로 리메이크되면서 인구 회자된 추억 돋는 노래다. 그 나성은 미국 로스엔젤레스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곳 책마을해리에 오면 무엇인가를 써야 한다. 쓰는 공간으로서 정체성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가져다 붙인다. ‘아무려면 어떤가’. 쓰는 잃어버린 감각을 되살려 인류공영에 이바지하자는 것인데. 게다가 로컬의 바탕을 다시 풍요롭게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니.
읽고 쓰고 펴내고, 생각이 글과 이미지로 피는 여행
인류는 마을을 이루며 좀 더 구체적인 관계 잡이를 시작했다. 먹을, 입을, 살 것들을 함께 만들어 내었던 전통적인 마을 구조, ‘만듦’과 이어져있다. 책의 마을이라면, 당연 책을 만드는 마을이다. 책마을해리는 쓰는 감각을 이어 펴내는 데까지 나아간다. 모두가 작가, 누구나 저자가 되어보자는 것이다. 2012년부터 이어온 출판캠프는 시인학교, 만화학교, 그림책학교, 생태학교, 역사평화캠프, 출판학교라는 이름으로, 어린이, 청소년, 청년, 일반인, 교사, 어르신까지 참여해 생각이 글로, 이미지로 피는 여행이다. 이 여행은 신문이며 시집, 만화책, 그림책, 생태도감에서 기획출판물까지 다채로운 책의 형태로 끝맺는다.
2020년 상반기까지 4,200명가량 참여해 320종 출판결과물을 낳았다. 그 가운데 132종이 서점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정식 출판물이고 이 독서 가뭄 시기에 4-5쇄를 넘기는 책이 여럿이다. 게다가 2017년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고》, 2019년 《작은학교가 희망이다》, 2020년 《생태인문교실》과 《철학하는 교사 사유하는 교실》이 무려 세종도서에 선정되었다. 《흔들리며-》는 지역 고등학생들 8명이 함께 기획, 집필, 편집한 책이고 《생태-》과 《철학-》은 로컬의 교사(들)가 책마을해리와 함께 기획 집필 진행한 책이라 더 의미심장하다.
책감옥에서 읽기 읽기 읽기
쓰는 공간 책마을해리는 읽는 공간과 닿아있다. 올해 27년 차 편집자 ‘촌장’이 모아온 책들과 책마을해리 안 도서출판기역(인문교양 출판), 나무늘보(어린이청소년 출판), 책마을해리(그림책 출판) 출판브랜드를 통해 출간한 책 들, 모두 20만 권이 책숲시간의 숲, 버들눈도서관, 동학평화도서관(동재와 서재), 자료관 들에 흩어져 있다. 읽는 공간은 읽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월봉마을 이름에서 가져온 ‘부엉이와보름달 읽기모임’을 통해서다. 매달 ‘열었던’ 부엉이와 보름달은, 부엉이처럼 밤늦게까지(어떨 때는 밤새) 보름달 뜨는 주말 저녁에 모여 ‘그저 책만 읽자’는 모임이다. 월봉마을 보름달은 이름만치 정취도 그윽하다. 책마을해리 안 ‘책감옥’도 대표적인 읽는 공간이다. 오죽하면 책 한권 들고 들어가 다 읽기 전까지는 나올 수 없다. 밖에서 걸쇠를 걸고, 문에는 밥 넣어주는 ‘식구통’도 있다. 입장 전 한 가지 살피시라. 지금 책감옥에는 토지, 혼불, 장길산 같은 대하장편소설이 한켠 종이서가에 놓여있다. 하루 이틀 머물기로는 어렵다는 말씀.
종이에서 활자, 책으로 이어지는 문명의 발상
책마을해리는 책이라는 것의 바탕, 종이와 활자 감성을 키우는 공간이다. 닥나무를 심고 닥솥과 닥돌로 꾸며 만든 작은 정원 ‘종이숲’이 있고, 종이(한지)를 떠보기도 한다. 마침 이곳 고창도 한때 내로라하는 한지 생산지였다. 선운사 창건에서 이어지는 1,500년 이야기를 가진 한지 역사가 고스란한 곳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부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까지, 활자의 역사를 이끈 사람들의 생각과 손의 감각을 고스란 고스란 느껴보는 활자 다루기 체험도 진행한다. 또 마침 가까운 선운사 장경각에는 우리 그림책 출판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조선 중기 <석씨원류>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한지활자공방>에서 이 인류사의 이야기와 제작 도구를 차근 살필 수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인류 최초 목판인쇄본, 금속활자인쇄본 같은 활자는 물론, 중국 사람들이 한 장 구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천년 ‘고려지’까지 종이며 활자까지 이 땅 사람들 손의 감각을 빌었던 것이다. 몇 해 통계를 보자. 책이라는 형태 물건의 탄생, 이것을 발행이라고 한다. 해마다 8만 종 가까운 책이 태어나고 있다. 인구 대비 세계에 이렇게 높은 출간율은 없다. 아무래도 우리는 ‘이상한 사람들’의 피를 타고난 것이다.
해리포터, 책 마법을 퍼뜨리는 ‘이상한’ 체계
‘이상한’은 긍정적인 의미의 중층구조다. 그 중층인 것에서 한 층에서 마법의 기질을 본다. 책마을해리는 이름에서 여러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서해 바다 가까운 폐교에 자리한 탓에 ‘해리=바다마을’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에 시달리기도, 세계 대표 책마을 영국 웨일즈의 해이온와이와 같은 성씨라는 추궁,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과 피를 나눈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책마을해리는 ‘해리 포터’의 해리다. ‘찍는’ 행위를 통해 생각의 무한복제 상상을 현실로 구현한 사람들의 끈적끈적한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책을 내는 행위는 스스로를 복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초판 1쇄 1,000권(3,000권이던 시절이 그리워요, 흑흑). 저자 한 사람이 천 사람이 되어 사람들 사이 이야기를 흩뿌리며 새로운 이야기 주체로 살아가는 이 등식은, 홍길동이 부렸던 도술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책마을해리 해리는 마법사 해리 포터의 해리가 분명하다. 어떠 어떤 사람들은 책마을해리 촌장이 소싯적 영화 해리 포터의 주인공을 닮았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책문화생태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책마을해리는 책 생태계 시작과 끝을 구현하는 공간이다. 짧게는 촌장 가족과 편집자 들이 이주한 9년 전부터, 길게는 폐교 나성초를 다시 인수(부지와 교사 기증자는 촌장의 조부다) 한 15년 전부터이다. 그 기간 동안 책마을해리는 쓰는 행위를 통해 태어난 것들을 어떻게 사람들과 만나게 할까 고민하고 그 고민을 켜켜 공간에 부려놓아보았다. 책마을갤러리, 책숲시간의숲, 만화공방, 시인의집, 버들눈도서관, 동학평화도서관(트리하우스), 책방해리를 통해서다. 스스로 매체를 넘어 기존의 매체와 다양한 협업도 진행했다. 전주KBS <별미책방> 15회 진행, <사람과사람들>을 비롯한 여러 다큐멘터리 촬영, 배우 공유 화보집 촬영과 발간, 올 2월 <1박2일> 출연 등이다.
쓰는 행위를 통해 만들고 펴낸 것을 나누는 일은, 몇 가지 굵직한 행사로 이어지고 있다. 매달 부엉이와보름달이며 매년 열어온 <책영화제해리>를 통해서다. 책이 영화가 된 것만 3일 내내 틀고 보는 이 영화제는 숱한 영화제 풍년 속에서 영화의 바탕이 되는 ‘책’에 집중한 유례없는 시도이고 여전히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10월 9일부터 11일까지다. 동학과 평화를 주제로 삼고 평화 영화로, 평화 책으로, 평화 대화로, 99초영화제작캠프로, 평화책 출판기념회로, 글씨굿으로 함께 모여 논다. ‘함께 모여’라 쓰고 보니, 마음이 아프다. 그 10월에 우리는 함께 모일 수 있을까,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읽고 쓰고 펴내는 근본 힘으로 지역이 ‘되산다’는 증거
책마을해리는 2000년 밀레니엄을 지나며 싹이 텄다. 어린이책 출판사 편집장이던 이의 생각에서다. 당시 출판계 화두는 ‘전자책’, 중형 소형 출판사는 사활을 걸고 전자책 컨소시엄 회사에 참여했다. <북토피아> 책의 유토피아를 지향했던 그 주체는 지금 없다. 언어 행위로부터는 수십만 년 문자와 책으로는 수천 년 이어온 ‘책의 감성’이 하루아침에 바뀔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단과 실패로부터 책마을해리가 태어났다. 종이와 활자의 감성, 쓰고 읽고 펴내는 행위의 바탕을 경험하며 한 삶의 주체로 성장하거나 주체였다고 자각하게 하는 공간의 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전자책 폭풍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누군가 나라(국가출판기관)이거나, 거대 출판 자본이거나 한 주체가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던 그 편집장은, 출판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진학한다. 몇 개 출판사에서 출판편집을 이어가다가 지금은 책마을해리에 산다. 전주에서 부산에서 우리나라 지역 지역에서 인문 공간 책마을(도서관마을)이 태어나는 일 거들면서 산다. 영상 세대, 이미지 읽기 시대 친구들에게 “종이와 활자를 통해 ‘맥락을 읽는 생각 힘’을 키워 봐” 하고 나직 권하며 산다.
책마을해리는 책방해리를 통해 공간에 들어선다. 책방해리 남쪽으로 난 유리벽에 ‘바이북 바이로컬’ 캠페인 글귀가 해에도 비에도 지치지 않고 붙어있다. 책마을해리는 읽고 쓰고 펴내는 힘이 우리나라 곳곳에서 여전히 피어 만발하다(할 수 있다)는 증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