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자리가 남긴
상처에 건네는 위로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에는 두 쌍의 남매가 나온다. 누나 ‘옥주(최정운)’와 남동생 ‘동주(박승준)’가 어린 남매를, 그리고 그들의 ‘아빠(양흥주)’와 ‘고모(박현영)’가 어른 남매를 이룬다. 어른 남매는 각자의 말 못 할 사정으로 할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 살기 시작한다. 급기야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낸 뒤에 그 집을 팔아버릴 궁리를 한다. 그들은 부재의 자리를 마주하며 과거를 돌아볼 겨를이 없어 보인다. 한편,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살뜰히 챙기는 어린 남매에게는 이혼하고 집을 나간 엄마의 부재가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특히 옥주는 재개발로 인해 살던 집을 버리고 아빠를 따라 할아버지 집으로 떠나야하는 순간이 오자, 잠시 머뭇거리며 추억이 새겨진 공간에 애도를 보낸다. 아마도 그 애도의 대상은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엄마의 흔적일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 옥주는 엄마를 만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동생인 동주가 만나는 것조차 못마땅해 한다. 영화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려주며 관객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며, 그만큼 부재의 사실만을 부각시킨다. 어쩌면, 옥주의 시점에서 이혼의 사유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 엄마의 상처에 공감하고 선택을 존중하기에는, 엄마가 부재한 자리를 감당하며 어린 나이를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쌍꺼풀 수술을 위해 돈이 필요한 옥주는 아빠가 노점에서 판매하는 운동화를 몰래 훔쳐 직거래를 시도한다. 그러나 진품이라 여겼던 운동화가 가품임이 드러나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이내 아빠에게 들키고 만다. 후에 옥주가 할아버지의 허락 없이 집을 팔려는 행위의 부당함을 따지고 들자, 아빠는 자기 운동화를 훔쳐서 팔려 했던 사건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즉, 아빠는 운동화와 집을 그저 물질적 가치로만 환원하고 있다. 그러나 옥주에게 그것들은 ‘시장 가격’에 따라 값어치가 매겨지는 상품,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선물로 준 운동화의 가치는 그것의 진품 여부가 아니라 그녀의 진심에 달려있다. 그래서 그 운동화를 벗겨 도로 가져온 것은 가짜를 선물했다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선물의 의미보다는 진위에만 관심을 보이는 그의 태도에 대한 불만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집은 오랜 세월 정주해 온 할아버지의 자리를 품고 있다. 그 집이 할아버지의 소유인 근본적인 연유는 집문서의 명의가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채취가 집 안 곳곳에 깊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아빠로부터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접한 옥주는 홀로 동주를 데리고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무덤덤한 동주와 달리 옥주는 혼란스러워하며 넋 놓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조문을 온 엄마가 온 가족과 화목하게 식사를 하는 꿈을 꾼다. 현재의 부재 위로 보다 오래된 부재를 치유하는 기억이 꿈처럼 내려앉는다. 결국, 보고 싶지 않다는 건, 간절하게 보고 싶지만 그럴 용기가 없다는 것의 다른 말이었다.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부재의 감각이 보다 뚜렷하게 날을 세운다.
옥주는 아빠와 동생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다가 복받쳐 울음을 터트린다. 익숙한 공간에 와서야 그 공간을 말없이 채우고 있던 이의 부재를 실감하게 된다. 엄마가 부재한 자리를 겨우 견디고 있던 그는 이제 또 다른 부재의 무게마저 감당해야 된다. 텅 빈 누군가의 자리를 마주할 때 느끼는 상실감을 밀어내기 위해, 그 자리를 다른 무엇으로 쉽게 채워내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 버겁다. 옥주의 서러운 울음을 뒤로하고 카메라는 마당으로 나와, 그럼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을, 변함없는 풍경을 몽타주로 보여주며 짧은 위로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