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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2 | 칼럼·시평 [문화시평]
온길보다 갈길이 더 먼 무대 제7회 전라북도 대학연극제
박병도 극단 황토 상임연출가(2003-09-26 11:30:09)

전라북도 대학연극제는 향토 극예술에 새로운 젖줄이 되고있는 대학연극의 한해의 총결산이자 그들의 새로운 미래를 타진해보는 계기가 축제이며, 나아가서는 지방 연극토양에 뿌리어질 씨앗들의 비중실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었다.

이번의 연극제는 12 소속대학(연극협회 전북지부 산하 전라북도 대학연극 협의회) 9 대학이 신청을 하고 그중 2 대학이 도중 철회하였으며 7 대학이 예심을 거쳐 6 대학의 본선 진출로서 경연이 이루어졌다. 6편중 편이 번역극이고 편이 창작극인 것으로 보아 국내 창작극 선호도를 보여, 바람직한 작품 선택 성향을 말해주고 있다. 예년의 경우 창작극의 선택에 있어서 충분치 못한 지식으로 희곡을 접하고, 그리하여 희곡적 구성 자체가 흔들리는 작품들이 더러 보였으나, 올해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작가가 우선 천승세, 박조열, 윤조병, 윤대성 지명도가 높은 중견 극작가들로서 대표작품들을 들고 나와 작품으로서는 풍부한 축제가 수도 있었다. 번역극으로서는 1986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윌레 소잉카와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이 선보여 또한 구색을 갖춘 격이었으나,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과연 희곡이 원초적으로 갖고 있는 작품성 내지는 근본 에너지만큼을 무대에 충분히 옮겨 놓았는가이다. 아니, 충분함이 욕심이라면 최소한 극작가의 의도를 연출의 해석과 배우의 구체적 설명으로 기준치만큼이나 표출시켰느냐하는 의문을 신중하게 던지는 것이다.

이제 햇수로 7년의 세월을 쌓은 대학 연극제는 우선 전국 유일의 지방 단일 행사이고 규모 또한 현재 시행되고 있는 전국 대학생 연극 경연대회와 맞먹는 것이어서 지방 연극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것이나 질적 내용적 측면에 접근해 저으기 불안한 마음 금할 없다.

첫째, 어차피 무대위 배우의 연기도 하나의 기술일진대 기초적인 연기술을 어느 위에 올려놓고 얘기해야할지 안타까울 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한가지만을 논한다면 배우들의 대사가 갖고 있는 전달의 의미를 전혀 상실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부재현상이다. 연극에 있어서 대사가 갖는 몫이 과연 어느 수치인가를 나는 묻고 싶다. 대사가 정리되지 못하고 언어로서 기능을 상실한 것이라면 이상의 행동과 상황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둘째로, 작품에 대한 철저한 해석과 조합능력을 들고 싶다. 가장 학구적이고 실험적이어야 대학극이 기성의 언저리에서 가당치 않는 흉내에 기형적 잉태를 거듭함으로 빚어지는 오리무중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또한 바람직한 실험정신이라면 대학극의 철저한 논리성을 바탕으로, 햄릿의 머리 위에 갓을 씌우고 클로이더스의 손에 권총을 쥐어주는 예지도 번뜩일 하다.

셋째, 대학 무대는 결코 성격 교정소나 우울증 환자의 치료병상이 아닌 점이다. 무대가 갖는 신비로움은 행위자는 관객의 위에 서서, 바라는 무엇 이상의 것들을 제요건을 수반하여 창출시키는 일일진대 어쩌면 많은 재원 중에서 쉽게도 프리마돈나를 만들어 내놓는지 안타까운 것이다. 점에서는 대학 극회 나름대로의 운용의 미학을 섭렵하여 지속적인 대책을 강구해야 일이다. 나아가 다듬어진 배우는 작업을 통해 얻어진 연극적 소득을 유용할 아는 연계적 생산결과를 낳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출도 모르고 배우는 모르며 관객은 아주 모르는 식의 작품은 이제 대학극이 갖는 겉치레의 허세와 특권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넷째, 시대의 발전으로 생겨난 제반 매카니즘을 십분 활용하는 문제이다. 이제는 내가 모른다고 남도 모르리라는 안이한 자기합리화는 통용되지 않으며, 또한 무대의 환타지는 정리된 연기의 몸매에 조명·음향 제반 매카니즘의 멋진 옷을 걸쳐 줌으로서 이룩되는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관객은 20세기에 살고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서머셋 모옴은 '예술이란 옷자락에 키스하는 연인 보다는 입술에 키스해 주는 연인에게 친절히 구는 여자와도 같다.'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좀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는 연극적 사고와 제작형태, 나아가 작품의 내용이 첨예한 감각의 대동이 없이 땅에 수용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대학극이 실험과 순수의 '무기'로서 기존의 틀에 던질 있는 것은 그에 비준하는 노력과 열정일텐데, 전북연극의 유전학적 재질을 이어 받은 특별한 책임감으로 말미암아 좀더 섬세한 자기탐구가 있지 않고서야 어디 그것이 나무칼과도 같은 허무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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