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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용기에 대하여
내가 죽던 날
김경태(2020-12-03 11:27:40)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용기에 대하여

글 김경태 영화평론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한동안 휴직을 했던 형사 ‘현수(김혜수)’는 인생의 큰 전환점 앞에 서 있다. 복직에 앞서 교통사고 관련 징계 위원회를 대비해야 하고 또한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의 이혼 소송도 준비해야 한다. 아버지의 범죄에 대한 증인으로, 섬마을에서 보호관찰 중이던 소녀 ‘세진(노정의)’이 유서를 남긴 채 바닷가 절벽에서 뛰어내려 실종된 사건을 ‘자살’로 잘 마무리 짓기만 하면 순조롭게 복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진의 실종을 탐문하는 과정은 경찰대 출신의 유능한 형사라는 허울에 기대 온 위태로운 삶에 대해 근원적 물음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



세진은 자신이 누렸던 부가 아버지의 불법적인 밀거래 덕분이란 걸 뒤늦게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 아버지가 죽자, 감옥에 있는 하나뿐인 오빠는 유산에만 관심을 보인다.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아버지의 애인이었던 ‘정미(문정희)’마저 범죄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받으면서 세진과의 연락을 끊어버린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세진은 섬에 고립된 채 외로운 생활은 한다. 그러다 자신의 보호관찰을 담당하는 형사 ‘형준(이상엽)’에게 깊이 의지하게 된다. 형준 역시 의무 이상의 친밀함으로 다가간다. 그로 인해 불편한 소문이 돌자 형준은 경찰을 그만둬 버린다. 다시 버려진 세진은 자해를 한다. 


현수는 죽음과 관련해 직간접적으로 얽혀 있는 누군가를 질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말의 생존 가능성과 구원에 대한 희망 때문에 사건에 몰두한다. 마치 그녀가 살아 있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현수는 세진의 유품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주변인들을 탐문하면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추리해나간다. 주변인들은 아무도 세진이 그냥 그렇게 죽을 아이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뿐인 혈육인 오빠는 아버지의 유산과 동생의 보험금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녀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현수는 그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들이 못마땅하다. 그것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죽은 존재와 다름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현수는 합리적 의심이 아니라 감정적 몰입 때문에 그 사건을 놓지 못한다. 심지어 CCTV에서 사건의 단서를 발견하기보다는 자신과 닮아 있는 세진의 표정에 주목한다. 어느 순간부터 현수는 세진과 동일시하며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곧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처럼 여긴다. 냉철한 접근을 넘어서곤 하는 과도한 집착은 그 사건의 중핵에 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한다. 결국 현수는 세진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정황을 포착한다. 그녀는 죽지 않았지만, 그저 살아만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다른 삶으로 다시 태어났다. 식물인간이 된 조카를 홀로 돌보는 ‘순천댁(이정은)’이 그 조력자이다. 세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부잣집 딸로서의 삶, 그리고 아버지와 오빠가 보여준 물질적 탐욕의 세계로부터 탈출한다.


진실을 목도한 현수는 침묵을 택한 채 사건을 자살로 종결짓는다. 형사로서의 직업적 윤리와 신념을 따르기보다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남성들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한 연대와 구원에 동조한다. 그러한 선택은 허울에 갇힌 삶에서의 해방으로 나아간다. 형사직을 그만두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학대했던 지난날과 작별을 고한다. 사회가 우러러보는 경력과 지위를 모두 내려놓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좇기로 한다. 세진을 통해 기존의 삶과 죽음이라는 양분화된 선택지를 넘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용기를 배웠기 때문이다. 마침내 현수와 세진은 낯선 나라에서 처음으로 조우한다. 마주 앉은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일상적인 담소를 나눈다. 영화는 그들이 함께 하는 밝은 미래를 상상하도록 하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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