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21.1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⑬
남편의 가족
임안자(2021-01-06 11:04:59)



남편의 가족

임안자 영화평론가


“삶의 기본은 국가도, 학교도 그 어떤 것도 아닌 가족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건 통치자가 아니고, 

삶을 가르치는 건 선생이 아니라 가족의 부친이며 가족의 주부다. 한 국가의 중심적 사항은 공적인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의 뿌리인 가족의 삶인데, 그 뿌리에 따라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 발전된다.” 

이 문장은 스위스 유명 작가 에레미아스 고트헬프(Jeremias Gotthelf 1797-1854)가 쓴 것으로 

결혼 당시 국가에서 받은 “가족 등기부”에 기록된 글을 여기에 인용한 것이다.



할아버지

나는 조부모를 모르고 자랐지만 남편에게는 친아버지보다 더 사랑했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남편이 18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 카르 플루바허(1882-1964)는 칸톤 바젤란드(Baselland)의 조그만 시골에서 가난한 농부 가족의 외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러다 1920년 친지의 요청으로 리본을 생산하는 공장 세 개의 공동 소유주로 직업을 바꿨다. 바젤은 프랑스와 독일로 연결되는 삼각지대로 이들 세 공장들은 프랑스의 국경 도시인 쌍 루이(Saint Louis)와 독일 쪽의 마을 바일(Weil) 그리고 바젤시의 서북쪽에 있었는데 모두 작은 규모의 산업체였다. 그러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경제가 나아지면서 리본 수요가 급증하여 빠른 속도로 평소보다 몇 배의 수익을 거두었고 더구나 얼마 가지 않아 친지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할아버지는 뜻밖에 세 공장들을 혼자서 다 껴안는 행운을 맞았다. 남편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사회적으로 발이 넓었던 전형적인 가부장형이었지만 집에서는 아무 때나 흥겹게 노래를 부를 만큼 명랑하고 낙관적인 성격의 온화한 어른이었다. 그는 음악과 문학에도 소질이 있어 초등학교 교사 시절에는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하며 용돈을 벌었고 공장을 맡은 뒤에는 여러 편의 동화를 썼다. 그중에서 일부는 두 권의 책으로 나왔는데 “로티의 신기한 여행”(Lottis Wunderfahrt)과 “빨간 남자 검은 남자”(Roter Mann Schwarzer Mann)가 그것이다. 전자는 아들에게 헌정했으며 후자는 1930년대 후반에 바젤 시립극장에서 한 편의 연극으로 공연됐다. 사회성이 좋은 그는 공장의 성공에 힘입어 부호의 위치에 오르자 바젤의 라인강 옆에 커다란 집을 마련하고는 풍요롭게 살았다. 


그런 한편 개신교의 전통이 깊은 바젤에서 무신론자로 남아 기독교의 도그마에 대담스럽게 맞서기도 했는데, 남편 가족이 기독교와 멀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종교 대신에 그는 스위스 독어권 지역의 프라이마워라이(Freimaurei) 단체의 주요 인물이 되어 2차 대전 시절에는 나치주의 반대 운동에 협조했으며 전후에는 사회민주당을 후원했다. (프라이마워라이(영어 프리메슨스)는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중요시하는 단체로 기본 이념은 자유, 평등, 박애, 관용, 인도주의인데, 예를 들어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는 프라이마워라이의 기본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첫 결혼은 조화롭지 못했다. 독일에서 시집온 할머니는 성격과 취향면에서 할아버지와 아주 달랐다. 활달한 할아버지에 비해 그녀는 성격이 내성적인 데다 좀스러웠고 자녀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유별나게 심했다. 맏딸한테는 대체로 엄하고 소홀히 했던 반면에 여섯 살 아래인 아들 베르너에게는 ‘우리의 미래 공장주’라며 보물단지처럼 아끼고 떠들었다. 그리하여 아들은 뭐든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사는 동안에 딸 이다는 특별히 배운 것도 없이 아버지 곁에서 자잘한 일을 맡았다가 젊은 나이에 집을 떠났다. 그리고 기자 출신인 독일 남자와 결혼하여 베를린에서 십여 년을 살다 2차 대전 막바지에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부모 집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는 사이에 할머니는 남편이 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오로지 가정밖에 모르고 살다가 끝에 가서는 우울증에 빠지고 암에 걸려 65세에 별세했다.


둘째 할머니

할머니가 죽자 할아버지는 몇 년 지나서 스물다섯 살 더 젊은 이혼 여인 마리아 하르트만과 다시 결혼하고 비록 짧았지만 행복한 만년을 보냈다. 둘째 부인은 스위스 동쪽의 알프스산맥 지역인 칸톤 그라우뷘덴(Graubuenden) 사람으로 어느 음식점에서 일했다. 음식 솜씨가 뛰어난데다 빼어난 미인이었던 그녀는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그가 돌아가신 뒤에는 큰 집에서 혼자 남아 정원을 예쁘게 가꾸고 70세의 나이에도 겨울철이면 고향으로 돌아가 스키와 등산을 즐겼다. 그녀는 여행을 좋아하여 같은 또래의 여자 친구들과 함께 “이집트 문화 탐방 여행”에 몇 번씩 참가하고 옆집 친지들과 카드놀이 클럽을 이끌 만큼 노후에도 건재했다. 


다만 첫 결혼에서 낳은 아들이 어머니의 재혼에 불만을 품고 모자간의 관계를 끊다시피 하여 그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나를 친딸처럼 예뻐하고 가끔씩 시간이 나면 스위스의 특별 요리법을 가르쳐줬는데, 하루는 나를 지하실 방으로 데리고 갔다. 보통 그곳은 할아버지가 고급 포도주를 보관하던 곳으로 그녀는 널빤지 구석에 쌓여있는 세탁비누들을 가리키며 ‘저 비누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다음에 스위스 정부에서 만약을 위하여 적어도 3개월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생필품을 집집마다 저장하라는 지령을 내려서 사둔 것’이라며 나에게 ‘전쟁 때문에 고생이 얼마나 많았었느냐’고 살며시 물었다. 1950년, 그때 나는 여덟 살의 초등학교 이학년생이었다. 할머니 집 지하실에 비누들이 쌓여질 그즈음 나는 용담 시골에서 전쟁의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리며 어렵게 살았는데, 할머니의 느닷없는 전쟁에 대한 물음에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나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그러자 그녀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정스럽게 내 등을 다독거렸다. 그런 뒤 10여 년이 지나서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지하실에 남겨진 비누들은 다 나에게 넘겨졌다. 그래서 그걸 쓸 때면 다정스러운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시아버지

시아버지 베르너 플루바허(1912-2006)는 부잣집의 외아들로 호강스럽게 자랐다. 그는 소싯적부터 정치와 예술, 특히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보헤미안 기질의 행동가형이었다. 17살에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바젤 시회민주당에 속한 “노동자 일간지”(AZ)에 연극 비평을 썼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앞으로 공장을 이어받을 후계자로서 “스위스 은행”에서 견습하면서 바젤대학에서 국민경제학을 2년간 배우다가 그것도 시들해져 그만두고 철학과 미술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다가 21살에 부친이 한때 프리랜스 기자로 가끔 글을 쓰던 칸톤 바젤란드의 진보 일간지 란드쇄프틀러(Landschaeftler)의 임시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시민들의 대항에 앞장을 섰다. 히틀러의 인종차별주의 정치를 전면으로 공격하는 그의 과감한 글들이 지역에서 크게 주목을 받자 일간지 쪽에서는 그에게 선뜻 편집장 자리까지 내줬으나 거절하고 1934년 런던에서 반년 동안 영어를 익혔다. 그리고 런던에서 파리로 옮겨 파리의 예술대학 그랑 쇼미에르 아카데미 (Acadmie der la Grand Chaumièr)에서 일 년 넘게 미술공부를 하면서 소르본 대학에서 인문학의 강의에도 참석했다. 그처럼 자유분방했던 그의 젊은 시절은 그러나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1935년에 그는 결혼하고 부친의 회사(Ammann & Cie)에 들어갔는데, 입사한 뒤부터는 그도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진보 정치의 앙가주망에서 손을 떼었고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던 화가의 꿈마저 포기했다. 생활환경이 완전히 바뀌면서 그는 부친처럼 프라이마워라이 조직체 범위 안에서 사회적으로 활동하면서 회사의 잡다한 일들을 수년간 맡아하다가 1949년 37세에 부친으로부터 세 공장을 다 물려받았다. 하지만 공장주가 된 뒤에도 취향에 전혀 맞지 않는 생산업에 적응하기가 힘겨워 공장 규모를 조금씩 줄여가다 1977년에 정년퇴직을 계기로 드디어 직장 생활에서 벗어났으며 공장들은 모두 바젤의 대형 화약산업체 “산도 (Sandoz, 현재 UBS 전신)로 넘어갔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지 경제가 때마침 호경기를 타고 있던 시기에 공장들이 팔림으로써 막판에 그는 부친 못지않게 큰 부자로 공장을 떠났다. 그리고 퇴직 뒤에는 다시 예술 세계로 돌아갔다. 그중에서도 프랑스의 문화역사와 예술에 새로이 심취되어 프랑스의 여러 곳들을 수없이 드나들었고 그와 동시에 바젤의 미술협회 "Gruppe 33"의 화가들과 어우러졌다. 한마디로 그는 평생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예술에 도취돼 살았던 재기 발랄한 지성인이었다. 하지만 중년기 이후 그의 삶은 두 번 결혼에 모두 실패함으로써 정서적으로 안정스럽지 못했고 첫 부인과의 사이에 낳은 두 자녀들과도 부모의 살벌한 이혼으로 인한 심적인 상처 때문에 거리감이 컸다. 그러다 노년기에 들면서 부자간 사이는 서로의 노력으로 좀 더 다정스러운 사이로 바뀌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