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③
뻬쩨르부르그의 몽상가 혹은 무능력자 : <백야>
글 이휘현 KBS전주 PD
도스또예프스끼 살해당하다!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또예프스끼가 살해당한 건 1839년 여름의 일이다. 피살 당시 그의 나이는 마흔아홉이었다.
러시아 변방 리투아니아계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모스끄바에 있는 한 자선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했다. 19세기 초반 러시아에서 의사라는 직업이란 요즘처럼 그렇게 경제적 풍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경제관념이 투철했다. 착실히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자 했던 그는, 소문난 구두쇠였다. 부자 상인의 딸을 아내로 맞았지만 수전노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그는 러시아 뚤라 지방 다르보예라는 시골의 땅을 사들였다. 가난한 외국 성직자의 아들이 자수성가하여 마흔한 살에 러시아에서 지주가 된 것이다. 하지만 8년 후 그는 이곳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주가 된 후에도 돈을 더 모으기 위해 모스끄바에서 의사 생활을 지속했던 미하일은 1837년 아내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병원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신의 영지인 다르보예로 낙향했다. 미하일은 아내를 잃은 상심이 컸던 것일까? 농노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았던 그는 결국 원한을 샀고, 그렇게 쌓인 농노들의 분노는 잔인한 피의 복수로 되돌아왔다. 아내가 떠난 지 2년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그의 슬하에는 일곱 남매가 남아있었다.
이 비극이 벌어지던 당시 뻬쩨르부르그의 공병학교에서 장교 수업을 받던 열일곱 살의 둘째 아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버지의 죽음 소식에 아마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가 창조해 낸 문학세계에 아버지의 죽음이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평전을 쓴 E. H. 카는 아버지의 죽음과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세계는 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안드레이 모출스키는 반대되는 의견을 그의 평전에 피력했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있다. 아버지의 죽음이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평소 낭비벽에 큰 기름을 들이부었다는 것! 보통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있지만, 적어도 경제관념만을 따지고 보자면 도스또예프스끼 가계(家系)는 이 유전학과 거리가 있다. 아버지 미하일 도스또예프스끼가 지독한 구두쇠였던 데 반해 그의 둘째 아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는 ‘돈을 펑펑 써대는’ 소문난 바보였기 때문이다.
‘문학의 여드름’이라 불린 애송이
공병학교 졸업 후 육군 장교로서 매달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는(그의 직업선택은 역시나 경제관념이 투철했던 아버지 미하일의 입김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었다!) 아버지가 남긴 적잖은 유산까지 매달 일정액으로 받게 되면서 남부럽지 않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표도르의 경제관념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월급과 유산은 매달 받는 족족 사치와 도박 등으로 탕진하기 일쑤였고, 그리하여 한 달 중 며칠의 호화로운 날들을 구가하고 나면 나머지 날들은 다음 달 입금일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가난뱅이로 살아야 했다(이러한 생활 무능력자로서의 면모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매달 일정액으로 쪼개 나오는 아버지의 유산을 기다릴 수 없었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유산을 관리하던 누이의 남편 까레삔에게 일시불을 요구했다. 이런저런 불화 끝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그는 곧이어 육군 공병국 장교라는 안정적인 직업마저 내던지고 만다. 1844년 10월, 그의 나이 스물셋에 벌인 일이었다. 대신 그는 펜을 들었다. 펜이 앞으로 자신을 먹여 살리게 될 거라고, 그것도 아주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 줄 거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기를 즐겼던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공병학교나 군대는 어차피 체질에 맞지 않았다. 유럽 대문호들의 고전을 닥치는 대로 읽었던 그는 평소 좋아했던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를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했지만 판매 실적은 형편없었다.
이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한 후, 그는 스스로 작품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군 제대 직후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쓰였다. 이듬해 도스또예프스끼의 이 처녀작이 러시아 문단에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낸 경위, 그리고 뒤이어 착수한 두 번째 작품 <분신>이 실패의 쓴잔을 들게 되었던 것은 이미 얘기한 바이니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자신의 문재(文才)가 첫 작품부터 통했다며 들떠있던 이 애송이 문학청년은 <분신>의 실패 이후 조바심에 시달렸던 듯하다. 이후 1846년에서 1849년 4월 정치범으로 잡혀가기 전까지의 약 3년간 그는 십여 편의 중단편 소설을 꾸준히 써서 발표했는데, 하나같이 실패작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연주의 문학을 승계한 <쁘로하르친 씨>부터 독일의 환상소설 작가 E. F. 호프만의 영향을 받은 그로테스크한 소설 <여주인>, 아내의 외도를 소재로 삼은 희비극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등등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다양한 문학적 시도가 이루어졌지만, 하나같이 구성은 허술하고 내용은 산만한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게 샀던 비평가 벨린스끼 조차 등을 돌렸고, 주변의 문학청년들 또한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한때 절친이었던 뚜르게네프와 네끄라소프는 도스또예프스끼를 향해 이런 풍자시를 남기기도 했다.
“문학의 얼굴 위에 / 그대는 너무 익은 여드름 꽃을 피웠구려”
‘문학의 여드름’은 이제 도스또예프스끼의 별명이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그의 이력은 그렇게 점점 더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예술에 대해 죄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년 도스또예프스끼는 왜 이토록 주변의 기대를 하나둘 허물어가는 졸작들을 몇 년간 양산해냈던 것일까?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에서 보여주던 천재 작가로서의 번뜩임은 왜 발휘되지 않은 것일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핑곗거리를 ‘빚 독촉’에서 찾아내었다. 이 시절 출판업자 끄라예프스끼에게 그가 보낸 편지들을 잠시 들여다보자.
“당신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난 허겁지겁 또 다른 이야기를 썼으며 유일한 자산인 나의 서명을 담보로 걸었습니다,” “나는 작품을 충분히 다듬지 못한 채 마감 시한을 의식해서 써야만 했습니다. 즉 나는 예술에 대해 죄를 지었습니다.”
끄라예프스끼는 19세기 중반 당시 러시아 뻬쩨르부르그의 유명 잡지 <조국 수기>의 발행인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물건’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예의 주시하고 가난한 문학청년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다가가 적잖은 돈을 몇 차례 빌려주었다. 그게 순수한 의도였건 철저한 계산하에 이루어진 일이었건 결과는 어차피 같았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이 써 내려 갈 작품들을 <조국 수기>라는 잡지에 수년간 저당 잡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감 시한에 쫓겨가며 써 내려 간 그의 초기 중단편 소설들은, 그가 스물일곱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면, 혹은 그가 훗날 대문호로 추앙받지 않았다면 이 지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그가 위대한 소설가의 반열에 올랐기에,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의 소싯적 함량 미달 작품들을 눈여겨보는 수고로움을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젊은 시절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을 하나 끄집어 내보고자 한다. 1848년 작 <백야>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이해하려 할 때 작가의 삶과 작품을 무조건 엮어서 들여다보려 하는 자세는 위험하지만, 적어도 도스또예프스끼의 경우 이러한 접근법은 꽤나 유효하다. 따라서 작가 스스로가 ‘감상적 소설’이라 칭한 <백야>는, 애송이 문학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몽상가로서의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꽤나 흥미로운 중편소설이라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뻬쩨르부르그의 몽상가 그리고 굴절된 사랑
뻬쩨르부르그에 살고 있는 ‘나’는 외톨이 청년이다. 고독을 벗 삼아 도시의 풍경들과 마음속 대화를 나누고 이름도 모른 채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품는 몽상가이기도 하다. 사색과 산책이 하루의 일과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주인공은 어느 늦은 밤 도시 강변에서 다리 위를 서성거리는 한 여자와 마주친다. 나스쩬까라는 열일곱 살의 예쁜 처녀는 남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녀는 훗날을 기약하며 모스끄바로 떠난 한 남자를 1년째 기다리고 있다. 며칠 전 뻬쩨르부르그로 남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약속대로 자신을 찾아오지 않자 그녀는 절망한다. 주인공인 ‘나’는 나스쩬까를 가슴 깊이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조력자 역할을 자처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스쩬까는 그리워하던 남자를 만나 떠나고 ‘나’는 다시 외톨이 청년이 된다.
소설 <백야>는 두 남녀 간에 벌어진 4일 밤과 하루의 아침 이야기를 기본 얼개로 삼고 있다. ‘감상적 소설’이라는 부제답게 멜로드라마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지만, 이 두 남녀의 애정관계라는 게 상서롭지 않다는 면에서 여타 사랑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다.
보통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 ‘나’의 사랑은 무기력하다.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연적과의 관계를 맺어주는 이런 기이한 삼각관계는 다른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 속에서는 이후에도 종종 등장하고는 한다. 그 이유는 뭘까? 여러 분석이 가능하겠으나, 무엇보다도 소설 속 주인공인 ‘나’가 지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을 쟁취하고자 하는 본능까지 억제하면서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며 정신승리로 극복하고자 하는 것. 오로지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하나로 자신의 욕망마저 거세해 버리는 왜곡된 열정. 소설 속 주인공이 사교성 없는 외톨이에다가 책이라는 관념의 세계에 깊이 빠져있으며 심지어 말투까지 책 속에 나오는 문장 같다고 주변의 핀잔을 듣는 그러한 처지들이 이를 방증하고 있지 않을까.
사실 소설 <백야> 속 주인공 ‘나’는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과 다름없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신문 에세이 <뻬쩨르부르그 연대기>(1847년 발표)를 읽다 보면 이 글 속 도스또예프스끼의 정신세계와 <백야> 속 ‘나’의 그것이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약한 성격에 남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항상 신경 쓰는 센 자존심, 그러면서도 타인들을 쉽게 믿고 기꺼이 ‘호구’ 역할을 자처하는 낭비가이자 몽상가이면서 또 무능력자이기도 한 사람.
소설 중반에 집중력을 급격히 떨어뜨리는 장광설이 여전한 아쉬움을 남기지만, <백야>는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음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꽤 정직한 거울이라는 측면에서 쉽게 건너뛸 수 없는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격동 속으로
어쨌거나 이런 비현실적 몽상 속에서 몇 년을 허덕이던 도스또예프스끼에게도 19세기 중반 격동의 러시아 역사는 기꺼이 거센 바람을 몰고 찾아온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형대 앞 죽음 직전의 남자’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드디어 우리 앞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