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 각진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그대들의 이야기
조각가 문 민
김하람 기자
2021년 문화저널은 우리 지역에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예술가들의 창작 환경을 들여다본다.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최근 입체에서 평면까지 작업 방식을 확장시킨 조각가 문민 씨다. 지난해 11월 서신갤러리에서 열린 일곱 번째 개인전 ‘나를 비롯한 그대들 : 인간기술서’에서 자신의 기존 작품의 텍스처를 그대로 살려 평면에 표현해낸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 주목을 받은 그를 만났다.
입체에서 평면으로, 표현 영역의 확장
전주문화재단에서 지역 신진예술가들을 위해 마련한 ‘전주신진예술가지원사업’에 선정된 문민 씨는 그동안 견지해온 작업의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다. 입체 작품을 평면으로 옮겨낸 그의 새로운 방식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조각의 틀에서 아예 벗어나 평면적인 작업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출발했어요. 제 작품의 질감에서 가져올 수 있는 특징을 살려 저만의 회화법을 찾고 싶었어요. 제 기존 작품의 표면을 실리콘으로 떠서 도장 찍듯이 종이에 찍어낸 방식이죠. 임의적으로 그 기법을 ‘스탬핑 기법’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특이한 작업이라는 평을 많이 받았는데, 제가 그동안 조각 작업을 하면서 표현한 질감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면 작업으로도 연계될 수 있었어요”
처음 시도해보는 작업인데다, 평면작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상황이어서 동료나 선배 회화작가들에게 자문을 구해가며 작업을 했단다.
“스케치 같은 것은 할 수 있지만, 평면작업을 안 해봤으니 과슈를 쓰는 방법이라든지, 그림의 보관성에 대해서는 잘 모르잖아요. 그런 것들에 있어서 이가립 작가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나를 비롯한 그대들’이라는 주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담아온 그는 ‘인간기술서’를 부제로 표현과 표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실리콘 판을 중첩해 사람의 얼굴 형상을 만들어낸 작가는 흑백과 컬러로 표현과 표출을 구분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담고 싶었다.
“우리나라는 표현이라는 단어와 표출이라는 단어가 구분이 돼요. 표현된 사람은 흑백으로, 표출된 사람은 컬러로 작업했어요. 표현된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의 겉모습이고, 표출된 사람은 집에 가면 풀어지는 모습 같은 것이지요. 인간관계에서의 마찰, 끼리끼리 모여서 무리를 형성하고 무리 속에서 표현하고 표출되는 것들, 험담 일 수도 있고, 혼자만의 생각일 수도 있는 감정선들. 그런 것들이 와닿았습니다. 표현된 사람들과 표출된 각자의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생각으로 작업했어요.“
조소 작업에 빠지다
작가에게 평면작업은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이다. 부모님의 권유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미술 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는 애니메이션부터 회화, 조각, 한국화 등 여러 장르를 배웠지만,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조소를 전공했다. 어렸을 때부터 만들기를 좋아했던 그는 박스 위에 집을 만들고 연못을 만들고 담벼락을 만드는 방학숙제처럼 전체 아웃 라인을 잡아놓고 그 안에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대학에서도 줄곧 조소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7회 전시회 때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죠. 입체가 아닌 평면 작업을 하다 보니 어렸을 때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의미도 있고 자극이 되었죠.”
조소 작업을 하면서 철조를 선택한 것은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목조나 석조의 경우에는 수업 시간에 경험해 봤지만 철조는 해본 적이 없어서 더욱 시도해보고 싶었던 영역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건설업을 했던 아버지를 따라 갔던 기계 고치는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용접 불빛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철조 작업을 하면서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작업을 하다 보니 저한테 잘 맞는 것 같아요. 철조는 형태가 빨리 나오거든요. 그래서 기다리지 않고 빨리 만들 수 있고, 성형하기도 편해서 철조 작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나를 비롯한 그대들 -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를 담다
주제 ‘나를 비롯한 그대들’은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 ‘급성질환 : 혼수상태•나를 비롯한 그대들’에서 부제로 처음 등장했다. 사회현상들, 들었지만 말하지 못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두 번째 개인전 이후 주제 ‘나를 비롯한 그대들’에 좀 더 집중하게 됐다.
“‘나를 비롯한 그대들’은 인간을 단순화해 사각 틀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담아내는 작업이에요.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 살고 있는 일상들을 잡아내고 기록해가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로댕이나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의 작업도 그때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는 기록적인 측면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면서 동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서 내가 현대인들의 특징을 기록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작가는 관찰한 현대인들의 특징을 사각형으로 표현했다.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잠들 때까지의 모든 과정이 사각 틀 속에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방도, 문도, 엘리베이터도, 차도, 작업실도 다 네모예요. 그 울타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참고, 사랑하며 살고 있는 내용들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 개인전에서는 ‘23세•남성•복학생’, ‘26세•여성•백화점 점원’, ‘65세•남성•정치인’ 등 나이, 성별, 직업을 명시했다.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세 번째 개인전 ‘나를 비롯한 그대들 : 사거리’에서는 날짜와 시간을 더해 현대인들의 일상을 담았다. 작품의 형태 역시 더욱 완전한 사각형의 형태를 띤다.
“세 번째 개인전 작업은 사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포착한 것들이에요. 제가 차를 타고 작업실에 다녔는데, 사거리에 멈춰 서면 사람들의 움직이는 다리들이 보여요. 겨울이면 움츠려 있다든지, 조급히 달려가는 모습이라든지, 기다리는 발동작 등에서 감정이 나타나서 그 사람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주로 비언어적인 표현을 할 때 손을 많이 사용하잖아요. 수화도 손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고... 그런데 다리로도 충분히 감정 전달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리에 포커스를 맞췄어요.”
세 번째 개인전부터 인체 형상 안에 텍스처들이 다양하게 표현된다. 작가가 불로 하나하나 녹여서 표현한 것으로 마치 사람의 지문과 같은 느낌들을 준다. 두 번째 개인전부터 시작된 ‘나를 비롯한 그대들’의 에피소드는 앞으로 3~4개 정도 남아있다. 나일 수도 너일 수도 있는 인간의 패턴을 그리는 이 에피소드들은 사람들의 하루 일상이 담겨 있다.
인생의 과정 속에서 하나의 개인전을 완성해 가는 마음으로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학교라는 울타리 밖으로 나오자마자 넓은 작업 공간을 구해야 한다는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함께하면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하는 동료 작가들과 함께 공간을 마련했다. 전주 화전동의 ‘날맹이스튜디오’다.
“조각 작업을 하다 보니 공간적인 제약이 가장 큰 것 같아요. 레지던시를 들어간다 해도 전국에서 조각을 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없어요. 그래서 공간을 마련하게 됐어요. 날맹이스튜디오는 저를 포함한 김승주, 이창훈, 이루리 네 명의 조각가가 모인 그룹이에요. 4~5년 전부터 학교 다니면서 졸업 후를 이야기하던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서로 분야가 다 다른데, 각자 작업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모였죠.“
2017년에 새롭게 공간을 마련한 뒤 지금까지 일곱 번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가졌다. 2020년에는 전주신진예술가 선정, 2021년에는 청년작가초대전에 선정됐으며, 30대라는 젊은 나이에도 벌써 작품 수만 200점이 넘는다. 그의 작품 활동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일단 제가 즐거워야 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예술을 계속하고 싶어요. 작업을 오래 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사실 예술을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끊기지 않고 작업을 오래 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작업을 선보이고 싶습니다.”
주위에서 젊은 나이임에도 작품이 잘 나왔다는 칭찬을 많이 듣지만 작가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작가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에 따라 끊임없이 작업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작업을 생각해보면 제가 죽을 때까지 하나의 큰 개인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의 과정인 거죠.”
버티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말하는 문민. 앞으로 누군가 그의 작품을 보면서 “이거 문민 작가 작품 아니야?” “문민 작가 작품 스타일 바뀌었네?”라고 말하며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자기만의 작업을 꾸준히 해나가는 일, 그가 선택한 그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