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인생을 담다
글 백희성 KEAB 건축디자인 연구소장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정도가 되려면 자녀의 나이가 부모의 나이처럼 드리워져야 할 것이다. 예전의 선비들은 그러한 이유로 자녀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보아야 할 서적이나 글귀를 유산으로 남기곤 했다. 자녀는 부모의 나이가 되었을 때 부모가 남겨놓은 서신의 깊이와 의미를 깨닫게 된다.
건축공간에도 이런 식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남기는 메시지가 있다. 군산의 작은 언덕에 지어지는 미술관의 이야기이다.
처음 만났던 그 건축주는 남다른 풍모에 흰 백발의 멋진 신사였다. 남부러울 것이 없던 그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작은 언덕에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내어주며 살고 싶다고...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자녀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 좀 더 청했다.
젊은 시절부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소위 말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사람이랄까? 취업률이 거의 100퍼센트에 육박하던 그 시절에 그는 취업을 못했다. 여러 가지 임용시험을 보았지만 그마저도 안 되었다. 결혼까지 한 그에게 돈을 벌지 못하는 가장의 역할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소방대원의 길이었다.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직업이었다. 그는 그렇게 수 십 년을 소방대원의 삶을 살았고 그러면서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는 이것을 운명이라 했다.
그의 바람은 간단했다. “자녀에게 인생을 살다 보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길이 아니어서 뒤돌 수밖에 없는 순간에 운명이 가리키는 길이 있으니 용기를 잃지 말라!“ 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은 것이었다. 그것을 공간 속에...
이 공간에서는 내가 바라보는 방향과 실제로 거닐면서 다닐 수 있는 방향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이 사진처럼 문을 열고 나오면 언덕이 보이는 곳으로 시선을 이끌지만, 실제로 가야 할 곳은 언덕이 아니라 또 다른 실내공간이다.
그 실내공간에 올라서면 언덕이 일부만 보인다. 그리고 가야 할 다음 길이 보이지 않는다. 언덕을 가까이서 보려 발걸음을 가까이하면 그제서야 측면에 숨겨진 작은 문이 보인다.
이 공간은 이런 메시지를 나타낸다. “가고 싶은 길과 가야 할 운명의 길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운명의 길은 끝까지 닿아야 다음 여정이 열린다.”
이렇듯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은 한 인간의 삶의 철학을 아주 깊게 담아낼 수도 있다. 훗날 시간이 지난 후 부모가 몸을 벗으시고 세상에 없으실 때, 자녀는 부모를 생각하며 이 미술관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남겨준 정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억이고 우리네 삶을 담는 건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