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사회를 바꾸다 | 작가 정하영
마음과 마음을 이어 세상을 바꾸다
글 김하람 기자
자기 내면을 성찰하고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예술가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기를 표현하는 일을 줄이는 것과 반대로 자기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야만 작품 활동이 가능하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공감을 통해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더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법과 제도를 고치거나, 경제를 발달시키거나, 사회적인 운동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게 하며 변화를 이끌어낸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사람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는 많은 작가들이 있다. 여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작가 정하영도 그들 중 한사람이다.
개인에서 사회로 눈을 돌리다
정 씨가 처음부터 여성주의 작업을 했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첫 개인전 ‘공간의 은유’에서는 방음에 효과가 있다고 익히 알려져 있는 계란 판을 통해 단절된 과거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갔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데에는 대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동생을 잃은 사건이 크게 작용했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작가는 이른 나이에 죽은 동생에 대해 누나로서 미안한 마음과, 그리운 마음이 컸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어냈다. 2005년 한국소리문화의전당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진행한 다음 결혼과 육아에 힘을 쏟다 보니 개인전을 준비할 여력이 부족해 아이가 어느 정도 장성하고 나자 10년 만에 개인전을 하게 된 작가.
“전시를 준비하면서 언제까지나 과거에 집착하면서 그때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에서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것들을 다 풀어내고 쏟아냈어요. 그러고 나니 이제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됐죠.”
작가는 그동안은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이야기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너의 이야기이기도 한 결국은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니 ‘여성’이라는 주제가 마음에 와닿았어요.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결혼해서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것들, 가정과 사회에서 여전히 가부장적인 모습들이 생각났어요. 제가 2014년도부터 여성들을 대상으로 지역특성화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두 가지 진행했는데, 하나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나는 경력이 단절된 주부들을 대상으로 진행했어요.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풀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하루살이 미술가의 고뇌
작가가 처음 여성을 주제로 전시를 펼친 것은 2018년 gallery 숨에서 진행한 네 번째 개인전에서다. ‘하루살이 미술가의 고뇌_잠:기다’를 주제로 노란 육각형 도형이 연결되어 있는 띠가 천장에서부터 내려와 욕조를 둘러싸고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육각형 도형에는 여성들의 이름이 적혀있어요. 지금은 결혼을 해도 직장 생활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많은데, 예전에 우리 엄마, 할머니 시대만 해도 밖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없어서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 적잖아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며느리로 불리면서 자기 이름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제 전시에서 이름을 찾아주고 싶었어요.”
육각형은 면과 면이 닿았을 때 가장 튼튼한 도형이다. 작가는 여기서 착안해 육각과 육각이 모여 튼튼한 구조를 이루듯 여성이 서로 연대해서 하나의 보호막을 형성하는 의미를 담았다.
“욕조는 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에요. 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 보내고 대중목욕탕에 가서 몸을 담그는데, 너무 행복한 거예요. 욕조는 그런 소소한 행복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이며, 쉴 수 있는 편안한 자기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물소리를 백색소음이라고 해서 편안한 소리라고 하잖아요. 관람객들을 욕조 안에 앉을 수 있게 하고, 그 속에서 물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쉴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죠.”
욕조 안에서 의외의 편안함을 느꼈다는 그는 다른 관람객들도 만족해하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게 됐고, 그때 여성에 대한 작업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작업이라는 것이 내가 즐겁고 하고 싶은 것을 했을 때, 공감이 되고 서로 나눌 수 있을 때 기쁨이 배가 되는 것 같아요.”
여성주의 작업을 시작하다
그는 갤러리 숨 전시를 기점으로 많은 여성주의 전시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선미촌을 여성인권 침해의 공간에서 여성인권을 상징하는 공간과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선미촌 리본 프로젝트, 전주독립영화관에서 열린 위안부 기림의 날 전시, 성매매 공간에서 노동송 주민들의 이야기와, 지역 콘텐츠를 활용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재탄생한 노송 늬우스 박물관 전시가 그것. 세 곳에서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빨간 케이블 타이를 소재로 한다.
“타이의 모티브는 육각의 모티브와 이어져요. 하나하나 엮어서 과거에 대한 것을 매듭짓고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 연대의 의미를 담았죠.”
선미촌 리본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작품은 빨간 케이블 타이로 엮어 만든 해먹. 편안히 쉴 수 있는 공간이면서 아이의 요람 같은 해먹이지만, 케이블 타이가 가시 돋친 것처럼 튀어나와있다. 잠을 자도 자는 것이 아니고, 쉬어도 쉴 수 없는 공간 속에서의 성매매 여성들의 삶을 타이로 만든 해먹으로 표현했다.
위안부 기림의 날 전시에서는 같은 작업으로 만든 기모노를 선보였다. 호텔 목욕 가운만 봐도 옛날이 생각나 밥도 먹지 못했다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사에서 착안한 작업이다. 작품 제목을 ‘Present-Present’로 현재와 선물이라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해 붙였다. 아픈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의 선물 같은 소소한 행복을 누리기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작가의 타이 작업은 노송 늬우스 박물관 전시로도 이어졌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작가의 작품은 빨간 드레스로 ‘탈드레스’를 주제로 한다. 일상적이지 않는 드레스를 여성은 보통 결혼식 때 입게 된다. 결혼과 동시에 가정을 꾸리면서 아직까지 가부장적인 사회 속에서 불평등과 부조리함을 겪게 된다. 작가는 이러한 여성의 삶이나, 드레스에 몸을 맞추고 유리방에 앉아있는 선미촌 여성의 삶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는 여기 공간에 어느 여성도 자의로 오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만약 사회적 구조 안에서 먹고 살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었다면 어느 누가 자기의 몸을 팔겠어요. 그들이 사회적 구조 안에서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모든 여성들이 과거에 대한 상처나 힘든 부분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공간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다.
대화를 통한 이해와 공감의 경험
‘나만의 공간’, ‘자기만의 방’이라는 모티브는 최근 익산여성의전화와 함께 진행한 ‘내 방, 네 방展’으로 이어졌다. 예술인파견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익산도시재생센터의 지원을 받아 진행된 전시. 이리역 폭발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익산여성의전화에서 제시한 주제는 ‘기록된, 기록되지 못한 여성’이다. 기록된 여성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록되지 못한 여성은 폭발사건 당시 역 근방에 있던 성매매 집창촌에서 폭발 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으나 관련 기사 한 줄 나가지 않았던 성매매 여성들을 의미한다. 정하영 작가를 포함해 전시를 위해 모인 다섯 명의 예술가들은 주제에 ‘현재와 미래’를 더하고 나의 방이면서 너의 방인 네 개의 방에서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한다는 의미를 담아 ‘내 방 네 방’으로 타이틀을 잡았다.
전시는 지난 2020년 12월 중앙동에 있는 익산 예술의 거리의 건물과, 창인동 여인숙 골목에 위치한 건물에서 진행됐다. 창인동의 여인숙 골목은 아직까지 성매매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다. 작가가 창인동에서 전시를 하게 된 곳은 몇 년간 비어있어 폐허가 된 건물로 밤이 되면 성매매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그 건물 앞에 주차를 하곤 한다.
층계와 층계 사이의 로비 공간을 담당하게 된 그는 그 공간을 따뜻한 메시지로 채우고 인식을 바꿔보고자 그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2018년 전시 때부터 꾸준히 이어온 육각형 모티브를 이번에는 주변 구제 옷 가게에서 구한 옷으로 만들었다. 공간 가운데 흔들의자를 두고 그 위에 쿠션을 배치했다.
“흔들의자라는 것이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잖아요. 그런 모습이 여인숙의 여성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의자가 여성들을 상징하기도 해요. 의자를 둘러싸고 있는 육각형의 천들은 그 천이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현재의 여성들을 지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구제 옷에 담긴 기억들이 모여서 방호벽을 만들고 있는 거죠.”
전시를 위한 공간에서 진행한 전시가 아니다 보니 발생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작품을 설치한 공간이 성매매를 하러 온 사람들이 주차하는 공간이어서 밤이 되면 포주가 자꾸 설치된 작품을 치우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여러 번의 대화와 설득의 과정 끝에 마음을 열고 이해해 주는 듯했으나 전시 오픈 전날, 다시 치워져 있는 작품을 보고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설치해놓아도 어차피 다시 치워질 걸 아니까 일단 두고 갔는데, 아침에 와보니 잘 세팅되어 있는 거예요. 저는 익산여성의전화 팀장님께서 하신 것인 줄 알고 연락을 드렸더니 아니라고 하시는 거죠. 알고 보니 성매매 포주분께서 하신 거예요. 그 뒤로 매번 밤이 되면 작품이 치워졌다가 아침이 되면 다시 설치가 되는 일들이 벌어졌어요(웃음). 설득하고, 취지를 설명드리는 과정을 통해서 계속 두드리고 말을 걸면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어요. 소통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죠. 익산여성의전화에서도 여인숙 거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동안 직접 접촉은 못했다고 해요. 이번 전시를 통해 그분들과 소통할 수 있어 좋았다고 해요.”
예술가로서의 역할
처음에는 개인적인 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점점 문제의식을 담은 주제들로 활동하기 시작한 그는 작업을 통해 개인적으로 치유가 되고 성장하는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작품으로 함께 공유하고 나누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작품을 통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공감하는 과정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둘째 아이인 딸이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는 그는 여성주의 작업을 시작하면서 여러 전시와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앞으로 추구하는 작업의 방향을 작품 전시에만 한정 짓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글 일 수도 있고, 같이 나눌 수 있는 사회적 운동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통해 교류하고, 작가로서 인정받았을 때도 행복하지만, 사회적인 활동을 했을 때 성취감을 많이 느끼게 돼요. 작품 작업도 계속하겠지만, 여러 사회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무서워하지 않고 도전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분명 힘들겠지만, 배우는 게 많이 있거든요. 나이가 들어도 계속 배우면서 성장하는 것이잖아요. 앞으로도 계속 기회가 되면 배우고 경험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작업, 일을 하고 싶어요.”
공감을 통해 상처 입은 마음에 위로를 건네고, 사회적 문제에 공유하고 의식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이것이 작가가 개인적인 표현에 그치지 않고,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