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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 | 연재 [보는 영화 읽는 영화]
트랜스젠더이기에 앞서 인간임을 선언하는 치열한 몸부림
김경태(2021-02-03 14:22:10)

보는 영화 읽는 영화 | 걸


트랜스젠더이기에 앞서 

인간임을 선언하는 

치열한 몸부림


김경태 영화평론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6살의 트랜스젠더 여성인 ‘라라(빅터 폴스터)’는 호르몬 주사를 꾸준히 맞으며 자신을 완전한 여자로 만들어 줄 성전환 수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운이 좋게도, 아버지는 함께 병원을 방문하고 작은 고민에도 귀 기울이며 여자가 되려는 그녀의 결심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는 든든한 조력자이다. 아울러 아버지는 발레리나가 되려는 라라의 꿈을 위해 이사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그녀는 벨기에의 명문 발레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또래에 비해 뒤늦게 시작한 발레이기에 남들보다 몇 배의 피나는 노력을 한다. 여자가 되려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라라는 더욱 발레에 집착한다. 오직 발레의 아름다운 춤 선만이 그녀의 여성성을 간신히 증명하고 또 담보하고 있듯이 말이다.

<걸>은 트랜스젠더 청소년의 성장담을 다루지만, 정체성에 대한 인정 투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남동생과 이웃, 그리고 친구들은 모두 그녀의 성 정체성을 인정해 주고 호의적으로 그녀를 대한다. 특히 발레 학교의 여학생들은 그와 함께 탈의실을 쓰는데 불편해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녀를 같은 여자로 대한다. 함께 샤워하는 친구들은 그녀의 다른 몸을 신경 쓰지 않지만, 정작 그녀 본인이 의식하며 주변의 눈치를 본다. 아무리 주변이 트랜스젠더 친화적인 분위기일지라도, 예민한 그녀는 남성의 몸을 지닌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어느 날, 친구들은 라라에게 자신들의 벗은 몸을 봤으니 그녀의 것도 보여 달라고 떼를 쓴다. 같은 ‘여자’끼리인데 그게 뭐가 대수냐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라라는 정색을 하며 망설인다. 그녀에게는 그런 호기심 어린 시선조차도 폭력처럼 느껴질 뿐이다. 사실 그동안 라라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테이프로 페니스를 애써 눌러 감추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그런 눈물겨운 노력까지 10대 청소년들이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건 과욕일지도 모른다. 차이를 ‘쿨’하게 수용하며 인정해 줬다는 것만으로 타자와의 간극이 완전히 좁혀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이처럼 영화는 트랜스젠더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층위에서 출발해 그 한계를 세심하게 들춰낸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타자의 내면에 대한 불가해성에 봉착시킨다. 우리는 트랜스젠더를 집단적 정체성으로 호명하며 획일화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욕망의 깊이와 상처의 결을 지니고 있는 개별자들이다. 아무리 사회가 암묵적으로든 법적으로든 그녀를 여성으로 인정해 줄지라도, 그녀가 아무리 열심히 춤을 추며 젠더 수행을 하더라도, 그 심연까지 어루만질 수는 없다. 성별 불일치로 인한 오랜 심적 갈등과 고통은 이미 깊은 수치심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 완전한 여자가 될 때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 이후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라라는 무리한 연습과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만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성전환 수술은 무기한 연기된다. 그러자 라라는 스스로 페니스를 절단하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일각에서는 라라의 행위가 현실 속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칠 거라며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트랜스젠더 청소년을 위한 교육용 영화가 아니다. 라라는 영화 속 자신의 대사처럼, ‘본보기’가 아니라 ‘여자’가 되고 싶을 뿐이다. 여자가 되고 싶은 과잉된 욕망은 기존의 정립된 트랜스젠더 규범에 길들여지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 표출된다. 그녀는 트랜스젠더 이전에 고유한 욕망을 지닌 인간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거세는 부족한 인내심에 근거한 철없는 행위가 아니라 규범적 정체성이 구속시킬 수 없는 인간임을 선언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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