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②
죽음 직전의 남자,
그리고 미완으로 남게 된 대기획 :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글 이휘현 KBS전주 PD
1분 후 나는 죽는다!
1849년 겨울,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둔 어느 아침 뻬쩨르부르그의 세묘노프 연병장에서 일군의 젊은이들이 사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4월 말 경찰에 체포된 삼십여 명의 ‘반란자들’ 중 사형을 언도받은 열다섯 명의 젊은이들이었다. 그중엔 스물여덟 살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겨울바람은 그날도 어김없이 매서웠다. 도스또예프스끼는 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칼이 우리들 머리 위에서 쨍그렁거리고, 우리의 마지막 수의(하얀 셔츠)가 준비되었습니다. … 숨이 붙어 있을 시간은 채 1분도 안 남아 있었습니다.”
사형 선고문이 낭독되고, 한 사제가 십자가를 든 채 사형수들에게 마지막 참회를 종용했다. 그 후 앞줄 세 명은 총살당할 세 개의 기둥에 차례로 묶여 사격대를 바라봐야 했다. 총구는 이들을 향했다. 여섯 번째 줄에 있었기에 다음 총살형에 처할 운명이었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모든 광경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의 한 조가 되어 옆에 서 있던 두 친구를 안고 미리 작별 인사를 건넸다.
‘1분 후 나는 죽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 순간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서 후세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상상력과 영감을 떠올리게 하는 일화로 회자되고 있지만, 결국 그 당시의 진짜 마음은 오로지 당사자만이 알 것이다(이때에 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공포스러운 회상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야 소설 <백치>의 주인공 미쉬낀 공작의 입을 통해 상세히 전달된다).
어쨌거나 죽음의 시간은 다가왔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가 불과 몇십 초에 불과했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황제가 보낸 전령이 갑작스레 등장했다.
“사형을 중지하시오! 그리고 죄수들을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시오!”
전령의 손에는 감형장이 들려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렇게 극적으로 생환했다. 이 이름 모를 황제의 전령이 세계사 불멸의 캐릭터로 등극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진실은 따로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인생과 정신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이 극적 이벤트는, 알고 보면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니꼴라이 1세의 각본 연출로 빚어낸 하나의 ‘정치쇼’에 불과했다는 사실 말이다.
사형보다도 더 공포스러운 정치쇼
저간의 사정은 이러하다. 1849년 4월 22일과 23일 양일에 걸쳐 뻬쩨르부르그의 젊은이 서른네 명이 체포되었다. 뻬뜨라셰프스끼라는 외무성의 젊은 관리와 그 주변 인물들이 종종 밤에 모여 불온사상을 공유하고 국가 반란을 모의했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뻬뜨라셰프스끼와 동갑내기였던 도스또예프스끼는 체포되기 2년 전부터 이 저녁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당시 이 체포 작전을 진두지휘했던 니꼴라이 1세에게 이들은 괘씸하고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다. 더군다나 바로 전해인 18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던 일을 러시아 황제는 누구보다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골칫거리가 될 만한 것들은 아예 그 싹부터 도려내야 한다!’
황제는 이 뻬뜨라셰프스끼 모임에 한 젊은이를 프락치로 잠입시켰다. 그리고 계략은 주효했다. 1849년 4월의 대규모 소탕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니 말이다.
체포당한 해 9월부터 11월까지 속개된 군법회의 재판에서 이들의 상당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일은 12월 말로 정해졌다. 하지만, 형을 집행하기 3일 전 니꼴라이 1세는 감형을 결정했다. 대신 그는 이 감형 사실을 죄수들에게 숨겼다. 그리고는 형 집행관에게 실제로 사형을 진행하는 듯한 쇼를 벌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마도 이유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 죽음 직전까지 가는 극한의 공포를 통해 다시는 그런 모임을 결성하지 못하게 하려는 극한 처방. 그리고 두 번째, 사형 직전에 감형장 공개라는 극적 이벤트를 통해 자신이 정적들에게도 비교적 관대한 황제임을 과시하려는 선전 효과.
이 두 가지 의도는 꽤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 정치쇼의 무대에 서야 했던 젊은이들은 이후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심지어 이날의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에 걸려 죽은 청년도 있었다). 아울러 후세에 알려진 바(그 진실은 감춰진 채!!) 도스또예프스끼를 극적으로 생환시켜 뒷날 그의 위대한 문학이자 인류의 유산을 지구상에 남길 수 있게 해준 꽤 멋진 그리고 관대한 통치자로 니꼴라이 1세의 이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순전히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어쨌거나 이 무시무시한 정치쇼를 통해 주동자 격인 뻬뜨라셰프스끼는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한편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징역 4년과 출옥 후 사병 복무 4년 이렇게 도합 8년의 시베리아 유형이 벌로 주어졌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진짜 혁명가였나?
그렇다면 우리가 이 대목을 지나며 좀 더 꼼꼼하게 되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정말 혁명가였는가 하는 물음말이다.
이 연재 글을 쭉 읽어온 독자라면 알겠지만, 사실 청년 도스또예프스끼는 글 쓰는 재주를 빼면 여러 면에서 평균 이하의 삶을 살아왔던 생활 무능력자였다. 낭비벽에 도박벽까지 갖춘 그는 윤리적인 측면에서 여러모로 혁명가라는 타이틀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경찰이 엉뚱하게도 무고한 그를 끌고 갔던 것일까? 아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러시아의 전제정치를 반대하고 농노제 폐지를 주장했으며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일군의 젊은이 집단에 속한 엄연한 일원이었다. 그중에서도 꽤나 급진적인 그룹에 속해있었던 게 바로 도스또예프스끼였다. 하지만 그를 ‘진짜’ 혁명가로 분류하는 건 무리가 따른다.
기독교의 박애 정신에 기반을 두고 그 연장선상에서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던 이 젊은이들은 유럽에서 불어오는 혁명의 기운을 하나의 유행처럼 받아들였지만, 서방과는 상황이 다른 러시아에 이 급진적 사상을 어떻게 현지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젊은이로서의 치기와 열정은 넘쳐났지만 현실성은 현저히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말로는 민중을 얘기하면서도 젊은 인텔리였던 그들의 삶 자체는 민중적인 것과 거리가 있었다. 말 그대로 앎과 삶의 괴리가 존재했다.
도스또예프스끼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에게 혁명가와, 낭비벽에 도박벽으로 얼룩진 생활 무능력자라는 상극의 두 궤도는 애초에 공생하기가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이 이율배반적 삶은 결국 자기성찰이 아니라 공권력에 의해 끝장났다!
이 정치적 사건이 도스또예프스끼의 폭주하던 청춘에 제동을 걸어준 약이었는지, 아니면 무르익어가던 문학에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었는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것은 딱 하나가 아닐까 싶다. 빚에 허덕이며 함량 미달의 중단편 소설을 정신없이 써대었던 청년 도스또예프스끼가 그 시절 진심을 가지고 매달렸던 ‘대기획 소설’ 하나가 이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결국 미완으로 끝장나버렸으니 말이다.
미완의 대기획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소설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자신의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로 유명세를 치르다가 두 번째 작품 <분신>으로 낭패를 본 후 절치부심하며 기획한 대작이었다. 1846년 말에 시작해 1848년까지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던 그의 첫 장편소설은, 총 6부로 기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절반도 되지 않는 3부의 중간 즈음에서 영원히 멈추고 말았다. 이것저것 펼쳐놓았던 이야기들은 전혀 마무리되지 못했고, 그 탓으로 도스또예프스끼의 대표작 반열에 끼지 못하는 게 바로 이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라는 미완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에 주목해야 할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적어도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첫째, 도스또예프스끼가 거의 최초로 여성을 서사의 중심에 오롯이 세웠다는 것. 둘째,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이 가진 암울한 분위기와는 달리 이야기나 캐릭터의 분위기가 밝은 톤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는 지극히 상대적인 개념임을 염두에 두자!). 셋째,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이 소설은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라는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각 부는 각자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1부는 네또츠까의 계부이자 음악가인 예피모프의 예술가로서의 광기가 주 테마이고, 2부는 살아온 환경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동년배 소녀 까짜와 네또츠까 사이의 갈등 그리고 소녀적 감성에 기반한 둘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3부는 정숙한 부인 알렉산드라의 비밀 서고에서 우연히 그녀가 옛 애인으로부터 받은 연애편지를 네또츠까가 발견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이 3부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체포되면서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따로 중편소설로 발표했어도 좋을 만큼 각 부의 분위기나 이야기들은 이질적이다. 다만 그것을 연결해 주는 장치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인 네또츠까 네즈바노바인 셈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애초에 따로 보면 독립적인 중편소설이면서 쭉 나열해 놓으면 하나의 장편소설이 되는 형식을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썼다고 훗날 술회했다. 따라서 분위기는 좀 달라도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어린 소녀 네또츠까가 각 부에 새로운 인물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맞이하면서 서서히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독자인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목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동시기 도스또예프스끼 작품 속 수많은 주인공들이 끝 모를 어둠 속에 휘둘리다가 결국 망가지고 파국으로 치닫던 과정과는 엄연히 결이 다른 것이었다(이 시기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세계에서 이런 성장소설은 <꼬마영웅>이라는 단편 외에 이 <네또츠까 네즈바노바>가 유일하다!).
도스또예프스끼 스스로도 이 작품에 강한 자신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1847년의 어느 날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이 소설은 올해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다. … 그리고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라면, 그것은 올해 ‘최고의 작품’이 되어, 나를 매장시키려고 필사적으로 애쓰는 친구들과 <동시대인>(한때 도스또예프스끼를 추켜세웠다가 나중에는 조롱을 일삼았던 네끄라소프와 그 주변 사람들의 동인지)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것이다.”
애초의 계획대로 6부까지 마무리되었다면, 우리의 주인공 네또츠까는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어떻게 난관들을 헤쳐나가며, 또 누구와 인연들을 맺어나가게 되었을까. 이제 그 상상의 영역은 독자의 몫으로 남게 되었다. 섣불리 단언하긴 힘들지만, 이 작품이 완간되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세계문학사에서 제인 에어나 안나 까레니나 못지않은 불멸의 여성 캐릭터를 하나 더 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야심찬 기획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는 그렇게 미완의 철창에 영원히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스물여덟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던 밤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하고 수갑에 묶인 채 뻬쩨르부르그를 떠나야 했다. 도스또예프스끼와 동료 죄인들을 실은 눈썰매는 시베리아를 향해 힘차게 내달렸다. 그 후 그가 정든 도시 뻬쩨르부르그 땅을 다시 밟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오롯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