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⑤
잃어버린 4년 : <죽음의 집의 기록>
글 이휘현 KBS전주 PD
시베리아로 가는 길
1849년 크리스마스 전날 밤, 스물여덟 살의 정치범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를 시베리아 감옥으로 이송하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었다.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1세가 일련의 ‘반체제 젊은이들(페뜨라셰프스끼 금요 모임)’을 향해 행한 정치쇼, 그러니까 가짜 처형식을 벌인 후 이틀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 살 터울의 형 미하일이 감옥에 찾아와 표도르를 만났다. 우애가 깊었던 두 형제는 짧은 면회시간 동안 눈앞에 다가온 긴 이별의 시간을 체감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이 어딘가!’ 형제는 다만 그 사실에 안도했을 것이다.
시계 종소리가 자정을 알렸다. 크리스마스가 막 시작된 그 시각에 도스또예프스끼의 두 손에는 선물 대신 10파운드나 나가는 무거운 수갑이 채워졌다.
얼마 안 있어 도스또예프스끼는 다른 두 명의 동료 죄수와 함께(그들 또한 가짜 처형식에서 죽다 살아났다) 썰매에 태워졌다. 그리고 감시원들과 함께 유형지를 향해 출발했다. 뚜껑도 없는 썰매 위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렇게 십여 년 정들었던 도시 뻬쩨르부르그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지금 성탄절을 만끽하며 웃고 떠들고 마셔대겠지. 나는 이렇게 무거운 수갑에 묶여 썰매 위에서 차가운 길 한복판을 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떠나가면 언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자신의 삶에서 급속해 이탈해 갈 때 다가오는 허무와 공포.
뻬쩨르부르그를 빠져나온 썰매는 시베리아를 향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1849년 겨울, 도스또예프스끼의 한 시절은 그렇게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잃어버린 4년’을 추적하기 위한 세 가지 방법
감옥이 있는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죄수 호송단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 별다른 방한복이랄 게 없었던 도스또예프스끼도 살얼음 같은 추위를 무작정 견뎌내야 했다.
17일간 지속된 이 고된 행렬은 또볼스끄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잠시 쉼표를 찍을 수 있었다. 이곳에 6일간 머무르며 도스또예프스끼 일행은 마을 여인들로부터 돈과 음식 옷가지 등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뜻하지 않은 환대(?)를 이곳에서 받은 것이다. 마을의 여인들은 1825년 한 정치적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곳에서 25년째 옥살이를 하고 있는 정치범(러시아 전제정치를 반대해 봉기했다가 실패한 자유주의 성향 장교들의 모임인 제까브리스뜨 당원)들의 아내였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죄 아닌 죄를 짓고 장기수로 복역 중인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청년 정치범들의 모습이 그녀들의 눈에는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 한 중년 여인이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자그마한 성경책 사본을 하나 선물해 주었다. 감옥에서 유일하게 법이 허락한 읽을거리는 바로 성경이었기 때문이다(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성경책을 감옥생활 내내 머리맡에 두고 고이 간직했다). 그리고 도스또예프스끼 일행이 시베리아 옴스끄 지방의 감옥에 도착한 것은 그들이 뻬쩨르부르그를 떠난 지 27일 만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만 4년의 징역형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는데, 이 시기 동안 그에게는 읽고 쓰는 일 자체가 금지되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편지 쓰는 일 또한 허락되지 않았다. 왕성한 독서가이자 작가이기도 했던 도스또예프스끼로서는 그야말로 ‘잃어버린 4년’의 세월이 거대한 빙벽처럼 그의 삶 앞에 가로놓인 셈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시기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의 우리가 참고할 만한 문헌은 많지 않다. 다만 도스또예프스끼 연구가들에 의해 이 공백기에 접근하기 위한 경로로는 세 가지 정도의 텍스트가 거론되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출옥 직후 시베리아 군부대에 강제 징집되어 생활하면서(1854년~1859년) 편지쓰기가 허용되었을 때 2~3년간 형 미하일에게 써 보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서신들. 또 하나는 그의 후반기 작품 속에 직간접적으로 언급된 감옥 생활에 관한 서술.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감옥 체험을 소설 형식으로 풀어쓴 <죽음의 집의 기록>이 그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출옥 후 형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감옥 생활에 관한 사실적인 묘사들이 들어가 있는데, 다만 내용이 풍성하지 않아 4년이라는 긴 감옥 생활을 깊이 있게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더군다나 한국에는 이 편지글이 따로 번역되어 있지 않아 러시아어에 능통한 전공자가 아닌 이상 우리가 접근할 방법도 요원하다(여러 평전에서 인용되고 있는 편지의 일부를 통해 도스또예프스끼가 형에게 전하는 감옥에서의 삶은 고통스럽고 끔찍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남게 된다. 그중 하나인 도스또예프스끼의 후반기 작품 속에서(예를 들면 <죄와 벌> 같은 소설) 그의 감옥 생활을 유추하기란 매우 지엽적이고 파편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잃어버린 4년’을 총체적으로 그리고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는 결국 소설 <죽음의 집의 기록> 밖에 없는 셈이 된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이 선사한 다소 무뎌진 시각과 낭만적인 윤색 그리고 출판 당시 당국의 검열을 감안해 불온한(?) 표현을 억눌러 가며 쓴 것이 흠처럼 남아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죽음의 집의 기록>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860년 9월의 일이다. 옴스끄 감옥에서 출옥한 때(1854년 2월)로부터는 6년이 훌쩍 지나있었다. 그리고 1862년 1월에 소설의 후반부가 <시대>(형 미하일과 표도르가 함께 만든 잡지)에 실리면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죽음의 집의 기록> 출간은 도스또예프스끼 출옥 후 8년이 지나서 이루어진 셈이다.) 하지만 <죽음의 집의 기록>이 도스또예프스끼의 생애 중 ‘잃어버린 4년’으로 기억될 그 시간에 대한 가장 풍성한 텍스트라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불행한 죄수들의 천태만상
<죽음의 집의 기록>은 액자 형식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시베리아에 유배된 나(화자)는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라는 30대의 이주민 남자에게 어느 날부턴가 관심을 갖게 된다. 고랸치꼬프는 아내를 살해한 죄목으로 감옥에서 10년을 보냈는데 출옥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시베리아의 궁벽한 산골에 눌러앉아 조용히 살고 있다. 귀족 출신이자 지식인이기도 했던 그는 이 산골의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밥벌이를 했으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화자인 나 또한 고랸치꼬프에게 접근하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 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세 달 정도 도시를 떠나있던 내(화자)가 돌아왔을 때, 고랸치꼬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 병약했던 그는 약사 한 번 부르지 못하고 어느 날 그렇게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나(화자)는 고랸치꼬프가 묵었던 하숙집 주인을 돈으로 회유해 그의 소지품들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중 그가 남긴 감옥 생활에 관한 두터운 분량의 글을 유심히 읽어보게 된다. 결국 나(화자)는 이 기록 중 일부 발췌본을 세상에 공개하기로 마음먹는다. 이것이 바로 크게 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진 ‘죽음의 집의 기록’인 것이다.
소설의 표면은 이렇게 장식되고 이제 본격적으로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가 남겼다는 기록이 펼쳐지게 된다. 누구나 짐작하듯 이 기록을 남긴 고랸치꼬프는 바로 도스또예프스끼의 또 다른 자아일 것이지만 말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은 말이 소설이지 사실 하나의 기록물에 가깝다. 이야기의 흐름은 기승전결이라는 극적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마치 의식의 흐름을 어떠한 필터 작용 없이 따라간 듯 기록자인 고랸치꼬프(도스또예프스끼)의 기억이 두서없이 펼쳐진다.
여기엔 다양한 죄목으로 시베리아 감옥이라는 한 공간에 갇히게 된 수많은 죄수들의 천태만상이 펼쳐진다. 진짜 악인도 있지만 신산스러운 삶의 어느 지점에서 한 번의 실수로 끌려온 선량한 사람들도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들어온 사람들도 있고, 여느 성직자보다 더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죄수들도 있다.
감옥은 세상의 축소판이다. 같은 죄수라도 군림하는 자가 있고 복종하는 자가 있다. 이 어수선한 곳에서는 술처럼 법적으로 금지된 것들이 버젓이 통용되기도 하는데, 돈만 있으면 인근 마을로부터 공수된 여자들을 살 수도 있다. 강제 노역으로 번 돈을 이런 것들에 탕진하는 죄수들이 있는가 하면 이 은밀한 거래들을 통해 이득을 취하는 죄수들도 있다. 죄수들의 다수는 평민이나 노예들이다. 반면 소수의 귀족 출신 죄수들은 감옥 안에서 증오와 경계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러시아 특유의 체벌 형태인 태형의 공포는 꽤 상세히 묘사되어 있고, 가뭄에 콩 나듯 몸을 씻을 수 있는 공중목욕탕에서의 아귀다툼은 독자로 하여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극의 감정을 가슴 한 켠에 촉발시키고는 한다. 하지만 이곳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기는 하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에는 며칠 동안 연극 공연을 펼치는데 제아무리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지만 연극 연습에 매진할 때만큼은 순수한 소년이 된다. 각자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가끔 서로 좋은 역을 맡기 위해 다투기도 한다.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공연 날, 연극이 펼쳐지면 좁은 공연장의 객석이 죄수들로 꽉 들어찬다. 그들은 연극에 푹 빠져 깔깔거리고 웃다가 또 울기도 한다. 강제 노역이 없는 새해 전날에는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그러다가 여기저기서 싸움이 일어난다.
‘죽음의 집’에서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은 상처받은 민중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들은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지독한 배고픔과 멸시, 자학과 절망 등을 온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는 비극의 수인(囚人)인 것이다. 귀족 출신 고랸치꼬프(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아온 환경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온 그들. 감옥 생활이 아니었으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을 러시아 민중의 삶을 몇 년간 체험하며 ‘나’(고랸치꼬프이자 도스또예프스끼)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들여다보고 또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정신적으로 고독했던 나는 나의 지난 전 생애를 되돌아보았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것을 다시 취해서 나의 과거를 깊이 음미해 보고 용서 없이 엄격하게 자신을 평가해 보았으며, 심지어 어떤 때는 이러한 고독을 나에게 보내준 운명에 감사할 정도였다. 이러한 고독이 없었다면 자신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지난 생애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죽음의 집의 기록> 중에서
그 스스로가 죽음의 집이라 명명한 감옥에서의 삶은 한 철부지 청년작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을 크게 흔들어놓았음이 분명하다. 정신적 허영과 물질적 낭비벽 거기에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능력에 한없이 도취되어 허공을 헤매던 한 젊은이는 그렇게 냉혹한 현실에 발목이 잡혀 세상 가장 낮은 자리로 끌려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한때 자신의 관념(소설) 속에서 태어난 가난하고 불행했던 사람들은 비로소 죽음의 집(감옥)에 이르러서야 그의 눈앞에 엄연한 실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을 파고드는 데에 타고난 능력을 가졌던 청년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시베리아 감옥 생활을 통해 더욱 풍성한 시야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는 비극의 한 공간에 내팽개쳐졌지만, 한 명의 작가로서는 큰 도약대 위에 서게 되었던 셈이다.
1850년 1월 옴스끄 감옥에 수감되었던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는 1854년 2월 중순 풀려났다. 만 4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렇게 도스또예프스끼의 한 시절은 마무리되었다. 이제 그의 앞에는 새로운 삶이 펼쳐질 것이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격동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4년간 발목을 채우고 있던 무거운 족쇄가 풀렸을 때 도스또예프스끼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