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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 | 인터뷰 [지금 이 사람]
조선의 여자 극작가 최기우
임주아(2021-03-04 13:44:29)

지금 이 사람 | 극작가 최기우


“누가 쓰기 전에 내가 먼저 쓴다, 

부지런하게, 폭발적으로” 극작가 최기우


임주아 사진 윤정아





유수의 연극제에서 굵직한 상을 다수 수상한 최기우 극작가의 작품 <조선의 여자>가 최근 출간됐다. 대한민국연극제와 전북연극제에서 작품상·희곡상·연출상·연기상 등 7개의 상을 수상하며 ‘희곡의 힘’을 보여준 이 작품은 (사)한국극작가협회가 주관하는 ‘한국희곡명작선’에도 선정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작가는 “평론가의 평가를 받을 기회조차 없는 지역 작가의 현실에 뜻깊은 주목을 받게 돼 기쁘다”면서도 “어떤 공모에 내놔도 쉽게 밀쳐지지 않을 거라 자신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여자>는 어떤 이야기일까? 그리고 최기우는 어떤 작가일까? 눈 내리던 2월 16일 전주 최명희문학관 앞 카페에서 그와 만나 근황과 작품 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든 게 바뀌어있을 것 같았던 2000년 새해 아침, 일간지 지면에 '최기우'라는 이름이 크고 진한 글씨로 박혔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막 28살이 된 새천년의 청년이 그해 전북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재즈바에서 거울을 보다’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앞으로도 우리 삶의 굴곡들을 들여다보는 일 또한 게으르지 않겠지만 통일과 같은 시대적 화두에 주목하고 싶다”는 당선자 인터뷰 속의 그의 말은 지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소설가의 길을 걷나 싶었는데 “창작극을 해보고 싶다”는 후배 최지훈의 부탁으로 우연히 연극 한 편을 쓰면서 급작스럽게 극작가의 무대로 뛰어오르게 된다. 


“형, 나 창작극 하고 싶은데, 하나만 써 줘.”

“내가 희곡을 어떻게 써?”

“소설이나 희곡이나 그게 그거 아냐? 소설 쓴다고 생각하고 대사 많이 넣으면 되잖아?”

지훈이가 무식해서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술잔이 꽤 분주하게 오갔고, 지훈이는 나를 설득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형 ‘캐라’도 있어.”

아! ‘캐라’. 몇 달 연습하고도 공연이 끝나면 10만 원 안팎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의 입에서 나오는 캐라가 얼마나 되겠냐마는, 나는 돈이 급했다. 무작정 자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뻔뻔한 캐라’를 받으며 작품을 쓴다.

ㅡ최기우 첫 희곡집 <상봉>(연극과인간) 367쪽, 

‘덧대는 말’ 중에서



●소설가, 극작가가 되다  

2001년 가을, 그가 쓴 첫 희곡 작품이 극단 창작극회 무대에 올랐다. 제목부터 강렬한 <귀싸대기를 쳐라>.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못된 짓 하는 사람을 찾아가 ‘귀싸대기를 때리자’하며 의기투합해 실행에 옮기는 블랙코미디다. 타락한 성직자, 바람피우는 남자, 퇴폐 광고물 부착자, 청소년 성매매자까지 사정없는 귀뺨 세례가 이어진다. “저런 놈은 귀싸대기를 한 대 때려야 하는데…….” 배우들의 찰진 대사가 소극장 암전을 깨우는 이 작품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학가에서 왕왕 공연되는 '최기우 고전(古典)'이다. 


이후 그는 <상봉>, <정으래비>, <은행나무 꽃>, <교동스캔들>, <녹두장군 한양 압송 차次>, <달릉개> 등 고이지 않은 우물에서 의미 있는 작품을 길어 올렸다. 줄곧 전북 지역의 역사와 이야기를 녹여낸 작품을 썼다.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아들을 둔 이야기를 그린 <상봉>(2003)과 전주 한옥마을의 600년 된 은행나무를 소재로 쓴 <은행나무 꽃>(2004)으로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을 두 차례 거머쥐기도 했다. 특히, <은행나무 꽃>은 완전한 우리 지역 소재로 인정을 받은 작품이라 뜻깊었다. 그는 “작품상으로는 최상위권이 아니었지만, 희곡상을 받아 어리둥절했다.”라고 말했다. 이후 판소리극 <달릉개>에서는 그간 공부했던 전주의 문화콘텐츠를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이 작품으로 전북작가회의 <작가의 눈> 작품상을 받았다. 그의 작품 성취는 우리 지역의 사건과 이야기를 탐구하는 지역성에서 도드라진다. 그가 작품에 지역의 무늬를 새겨 넣는 가장 큰 이유는 뭘까?


“작가가 자신이 사는 고장을 탐구하는 건 당연한 예의이자 도리다. 내가 전라북도에 사는 사람이라 전북을 더 구체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누가 쓰기 전에 내가 먼저 쓰는 거다. (웃음).”


창극, 국악뮤지컬, 칸타타, 마당극 등 그가 쓴 무대극의 종류도, 영역도 다양했다. 극마다 높낮이가 다른 화법을 이해하고, 색깔 다른 장르끼리 예외의 결합을 만들어내며 이것도 써보고 저것도 올려보며 달려왔다. 그렇게 2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집필한 극작품은 100편이 넘었다. 일 년에 다서 작품 이상을 쓴 셈이다. “쓰는 내내 한 번도 게을러 본 적 없다”는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아니 무시무시하게 들려온다. 



●작품으로 중요한 목소리를 내다

“세상과 이별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서 <조선의 여자>를 집필하게 됐다.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고 발언하는 것이 작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이번에 출간된 수상작 <조선의 여자>(평민사·2021)는 1943년 해방 전후 전주 인근 마을의 송 씨 가족 이야기다. 태평양 전쟁과 일본군 ‘위안부’, 창씨개명, 신사참배, 미군정 등 해방을 전후로 근현대사를 치열하게 살아온 우리네 가족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판소리를 좋아하는 열일곱 살 동심과 도박판을 전전하다 딸을 팔아넘기는 아버지 막봉, 아들의 일본군 입대를 막기 위해 후처의 딸이 위안부로 끌려가는 것을 모른 척하는 본처 반월댁, 아들을 낳아주기 위해 들어온 후 딸을 낳고 식모처럼 사는 세내댁, 철없는 언니 순자, 횡령죄로 쫓겨난 직장에 다시 들어가기 위해 처제를 팔아넘기는 형부 건태, 일제에 충성만을 생각하는 남동생 종복 등이 주요 인물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릇된 욕망에 사로잡힌 개인이 초래한 가족의 비극 서사인 듯하지만, 들여다보면 한 가정의 딸이었던 지극히 평범한 여성이 국가의 폭력으로 어떻게 희생되고, 희생을 강요당하는지 고발하고 날카롭게 조명하는 작품이다. 


최기우 작가는 “가족이라는 틀에서 서로를 옥죄며 거칠고 불편하게 살아간 이들을 통해 여전히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곁의 여성들을 중심에 뒀다”고 말한다. 가족이 가족을 위안부 팔아넘기고 말았던 시대의 아픔을 돌아보며 또 한 번 작품으로 중요한 목소리를 낸 그는 이번 이야기를 쓰기 위해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파헤쳐 보니 완전히 달랐다. 위안부 할머니들 구술 자료를 전부 찾아 읽었다. 실제로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이야기가 무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스스로 반성하게 됐다.” 


● 집중력을 쏟아 폭발적으로 쓰다

‘본정통 금은방에 가면 수도가 콸콸 나온다’는 대사 한 줄을 쓰기 위해 '전주시맑은물사업소' 홈페이지 등을 몇 시간 동안 뒤졌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1940년 전후로 수도가 있던 가정이 있었을까, 작두가 있었을까, 수도세는 얼마나 냈을까, 파악해 본다는 말이었다. “공부하지 않으면, 확신이 서지 않으면 단어 하나도 제대로 쓸 수 없다.”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다. 


그가 2004년 익산 서동요를 소재로 어린이희곡을 쓰면서도 50편이 넘는 논문을 봤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기본 뼈대 위에 상상의 범위를 넓히고, 어떤 연구자가 와서 네 상상은 잘못됐다라고 말하더라도 작가의 논리로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상상의 폭과 깊이에도 타당한 이유가 필요하고, 결국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서일까. <조선의 여자>를 집필하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관객들의 평도, 평론가의 평도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전북연극제 심사위원들은 일제강점기 한 가족의 삶을 통해 그 시대의 아픔과 역사를 다룬 희곡의 완성도가 매우 높은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된다.”라며 위안부 문제의 비극적 시선을 국가의 폭력에 의한 가족의 해체와 붕괴로 접근한 극의 구성과 이야기의 탄탄함, 연기력의 앙상블, 간결한 무대 연출 등 창작초연작품의 완성미를 구축했다.라고 평했다. 극에서 일본군에 딸을 빼앗긴 세내댁의 대사는 그가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이 묻어나 있다.


살어. 살어라. 천배 백배 만배 피값 받아낸다고 맺힌 원한이 풀리지는 않것지만, 그놈들 죄상 낱낱이 밝혀내니라. 우리는 때를 잘못나서 거시기혔지만, 니들 새끼들 사는 시상까장 그라믄 쓰것냐? 그 시상에도 동심이도 있고, 순자도 있고, 종복이도 있고 느그 아부지 가은 사램도 있것지만, 그럴수록 이 악물고 꼭 살고, 총기 놓치지 말고…… 근디. 시림 가죽 뒤집어쓴 승냥이들이 사램 말을 알아 들을랑가? 참말로 딱허고, 딱허다, 잉.


ㅡ최기우 <조선의 여자>(평민사) 세내댁의 대사. 

세내댁을 연기한 연극배우 김경민 씨는 최근 ‘대한민국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작가는 일단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생각만 하면서 산다. 한번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완성되기 전까진 절대 빠져나오지 않는 몰입형. 쓰기 위한 생각의 날을 갈고 있다가 써야 하는 순간이 오면 주저 없이 내리찍어 뾰족하게 베어진 작품을 내놓는다.

 

빨리 쓰는 게 아니라 집중력을 쏟아서 폭발적으로 쓰는 거다. 처음 10년 정도는 창작의 고통이란 말도 꺼내곤 했는데, 시나브로 쓰는 것 자체를 즐기게 됐다. 예컨대 마당극의 풍자 대사를 고통 속에서, 울면서 쓸 순 없는 노릇이다. 일단 내가 즐거워야 대사도 잘 나온다. 내 느낌을 관객도 그대로 받을 거다. 그런 작품을 계속 쓰고 싶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별다른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너무 급하게 살지 말자는 생각은 갖고 있다. 작품이 곧 기록이니 책도 꾸준히 내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해가자고 말이다.

단일 희곡이 책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는 그는 세상을 일방적으로 살았다.”라고 고백한다. 작품 하나가 한 권의 책으로 나오는, 마치 싱글앨범 같은 <조선의 여자> 책을 두고서다. 2009년 이후 조용했던 책 출간이 2021년을 기점으로 다시 물줄기를 트며 올해 네 권의 책을 연이어 낼 예정이다.





•최기우 극작가

1973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토론전문사이트 <토로> 발행인을 시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 전북일보사, 전북작가회의 등에서 일했고, ‘문화연구, 에서 오래 활동 중이다. 청년 시절부터 몸담았던 최명희문학관에서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2019년부터 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1<귀싸대기를 쳐라>를 시작으로 <정으래비>, <춘향, 네 개의 꿈>, <교동스캔들>, <춤추는 상쇠, 필봉연가> <월매를 사랑한 놀부> 등 연극·창극·뮤지컬·창작판소리 100여 편을 썼다. 전북일보 신춘문예와 대한민국연극제 희곡상(2), 전북연극제 희곡상(4) 등을 수상했으며, 희곡집 <상봉>(2008)<춘향꽃이 피었습니다>(2009), 인문서 <꽃심 전주> <전주, 느리게 걷기> <전북의 재발견>(12) 등을 냈다.

소설가로 데뷔했지만, 원래부터 연극을 좋아해서 대학 시절 미팅을 해도 연극 먼저 보고 커피숍에 들어갈 정도였다. 연극 마니아였으나 정작 희곡 창작은 낯선 일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우연은 필연이라는 말처럼 지금 그에게 희곡은 운명과도 다르지 않다.


•임주아 시인•물결서사 대표

전주 선미촌에서 시를 쓰며 창작자 동료들과 책방 ‘물결서사’를 운영하고 있다. 첫 시집 출간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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