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사는 법
두고두고 끝나지 않을 그의 독백들
조민철 대한연극협회 전북지회장
글 이세영 문화기획자
지구에 사는 모든 인간이 코로나19로 고통을 받는다. 누구도 그 고통에서 예외일 수는 없겠으나 연극인들만큼 고통스러운 직군도 없을듯하다. 관객과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은 연극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 비대면의 시대에 연극이 갈 길을 찾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미투’의 여파를 다 해소하지 못한 전북연극계는 코로나19라는 복병에 사상 최대의 고비를 맞이하고 있다. 40여 년 연극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조민철 배우에게 있어서도 코로나 시대는 고역이었다. 더구나 2년 전부터 대한연극협회 전북지회장직을 맡아 협회의 일까지 해결해야 하는 그의 어깨는 더욱 무거웠다. 그는 연극인으로서, 지회장으로서 사는 그의 삶이 궁금했다. 지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지난 2년 동안 전북지회장이라는 직함으로 수많은 고비를 넘겨왔지만 거대한 쓰나미를 마주해야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다시 스멀거린다고 했다. 첩첩산중. 평소에도 ‘엄근진’ 아우라를 뿜어대던 그의 얼굴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미투’는 여전히 진행형
2018년 초 한 연극인의 고백으로 시작한 전북연극계의 ‘미투’는 연극계의 성폭력 문제를 직시할 수 있게 했다. 3명의 회원이 제명되고 2개의 극단이 해체됐다. 그렇지만 단편적인 사건 해결로는 연극계의 분위기를 일소하는 데는 부족함이 있었다. 2019년 그가 지회장에 다시 당선된 것은 연극계에서 터져 나온 ‘미투’를 근본적 해결하라는 회원들의 의지였다. 제작공연의 일상을 포함한 연극계 모든 사람의 권리가 되찾아지기를 희망하고 그 속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성폭력, 위계에 의한 폭력, 언어폭력, 군대식 잔재들이 모두 사라지기를 바랐다.
“연극은 인간이 하는 작업이고, 인간다워야 하는 작업입니다. 피해의식 속에서, 통제나 억압 속에서 제대로 된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인간답게 스스로 연극을 만들 수 있는 연극계의 풍토가 형성돼야 합니다. 연출, 연기, 스텝, 기획의 위치에서 연극 정신과 어긋나는 상황들을 숱하게 목격했습니다. 이것들이 전북연극을 더 나아가지 못하게, 오히려 퇴보하게 만들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미투’로 촉발된 전북연극계의 혼란이 자유롭게 합의되고 갈등의 에너지가 인간 본연의 창작 욕구로 전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투 운동이 전북연극을 암흑기에 접어들게 했다고 혹자는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전북연극계에서 용기는 여성들이 ‘미투’에 나섰기 때문에 전북연극의 새로운 바탕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회에 탑을 허물고, 단단한 토대를 세워 새롭게, 더 높게 전북연극의 탑을 쌓아갈 수 있기를 그는 희망한다.
그래서 ‘미투’ 문제 해결은 그의 1순위 업무였다. 계속되는 피해 제보와 협회를 향한 고소 사건을 처리하느라 업무는 폭증했다. 성폭력 예방과 대처를 위한 기준안을 마련하고 소통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자를 위한 신고처와 판단의 절차를 만들었다. 지금은 연극협회 정관을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명시적 절차에 의해 회원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징계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지회장직을 수락할 때만 해도 이 일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사실이다. 상당한 부분에서 회원들이 인식을 같이하고 다음 걸음을 떼자는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 문제는 얼마 전 ‘미투’로 법정에 선 A 교수의 무죄판결이 나온 것이다. 기껏 험한 산을 넘었더니 쓰나미가 닥치는 격이랄까. 그는 걱정이 줄지 않는다.
친구의 죽음 앞에 맹세한 길
동문길에 있는 창작소극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0년, 전주시립극단 사람들과 월급을 모아 문을 열었던 창작소극장은 애착이 많이 가는 장소다. 이곳에 서면 젊은 날의 치기와 열정, 첫 연극의 기억까지 고스란히 떠오른다.
그가 처음 무대에 섰던 것은 전북대 독문과 원어 연극이었다. “담배 피워도 되겠습니까?” 첫 공연의 첫 대사를 하는 순간, 그는 무대의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조연이었지만 꽤 괜찮은 연기를 선보였고, 막간에는 한껏 끼를 발산하며 ‘연극 좀 하는 놈’으로 기억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연극을 계속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연극반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는 가장 친했던 친구의 추도식에서 친구의 몫까지 평생 연극을 할 것을 선언했다. 그 후 그의 인생은 어느 방향으로 가든 다시 연극으로 돌아오게 됐다.
학창시절 독문과 연극반, 군대에서의 문선대, 극단황토에서 연극 무대에 섰지만, 졸업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2년 돈 벌어 연극하고 살겠다며 연극판을 박차고 나와 전북대 앞에 생맥줏집을 차렸다. 매일 밤 극단황토, 기린극회, 전주시립극단 선후배들이 그의 술집을 찾았다. 받지 못할 외상 술값이 쌓여갔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술 좋아하는 술집 주인과 가난한 연극인들은 추억만을 쌓아갔다.
“어찌어찌, 세 극단과 인연을 맺어 제 술집엔 그들이 한데 모일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세 극단은 서로 접근 불가의 관계였습니다. 너희는 관에서 돈을 받는다,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예술을 해야 한다, 순수예술을 해야 한다, 많은 것들을 두고 싸움을 했습니다. 늘 북적거리고, 술도 마음껏 마시면서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나는 외도는 1여 년 만에 막을 내렸다. 그 후 그는 비상임 단무장을 시작으로 전주시립극단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전주시립극단에서 그는 연기는 물론 많은 작품의 연출을 하며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갔다. 외부 행사나 축제로 조금씩 영역도 넓혀갔다. 전북연극의 황금기였던 90년대, 그는 전북에서 최다 출연, 최다 연출의 기록을 세울 만큼 왕성하게 활동했다.
괜찮은 지도자가 되다
도립국악원 노조가 설립되고 전국문화예술노조가 출범하던 2000년 초반, 그는 전주시립극단에서 해고됐다. 2002년 전국연극제 상황본부장을 맡으며 무단결근을 했다는 이유였다. 이미 전주시의 허락을 받았던 일이었지만 상임연출은 그를 해고했다. 역설적으로, 그의 해고 사건은 전주시립극단 강성 노조 결성의 계기가 됐다.
복직이 결정됐지만 2년 안에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그는 극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풍남제 연출을 맡았다. 연극무대가 아닌 여러 장르의 예술을 접하면서 시각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양한 행사에서 연출과 감독으로 지내며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는 그때 바로 복직하지 않은 게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수입도 더 괜찮았고, 마흔이 되며 채워지지 않았던 무언가를 채울 수 있었던 기회였다. 그사이 그를 해임했던 상임연출이 단원들에 의해 쫓겨났고, 그의 장담대로 2년 만에 시립극단으로 금의환향을 했다.
그는 상임연출로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봄에는 고전, 가을에는 지역작가들의 창작초연을 정기공연을 올렸고 <광대학교>도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두 번의 정기공연으로는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단원들이 많았다. 특히 여성 단원들의 숫자가 많아서 여자들이 많이 등장하게 해달라고 작가에게 요청할 정도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소극장 시리즈였다. 소극장 시리즈는 단원 2~3명을 묶어 소극장에서 연극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정기공연 무대에 오르지 못한 배우들이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단원들의 학력을 높이는 데도 힘썼다. 정규학교를 못 가더라도 대학 졸업장은 따두길 바랐다. 민간극단활동도 무제한 출연할 수 있도록 했다. 시청에서 뭐라 하든, 최대한 편의를 봐줬다. 그의 재임 동안 7~8명 단원이 학사, 석사를 졸업했고 그들의 활동에 여러 극단이 태동하기도 했다.
“단원들과 상임 연출로 처음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이 기억납니다. 단원 출신으로 상임연출이 됐다, 내가 할 수 있었으니 너희들도 할 수 있다, 학력과 경험을 갖춰서 내 뒤를 이으라고 했습니다. 단원 모두가 고유의 색을 내고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는 배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 컸습니다. 개중 몇은 그리됐으니 괜찮은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상임연출 7년, 그는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던 문제를 꾸준히 거론했다. 불합리함을 고치고 내재해 있던 문제를 수면으로 끌어내 대비하게 했다. 다수를 포용하면서도 불합리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그가 두 번의 지회장을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박동화 선생을 배우다
40년 배우 인생, 옛 무대의 감동과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어쩌면 예술정치에 발을 담근 순간 예정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아니, 오롯이 무대를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생각이 복잡해질 때면 그는 오늘처럼 박동화 선생 기념비에서 담배 한 대를 사르곤 했다.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
지구가 돌고 태양이 솟아오르고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어서
우리 인간이 호흡하고 살고있는 동안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내 몸둥아리에 죽음이라는 이름의 화려한 상장(喪章)을 둘러 마지막의 내 호흡이 끊어진다면
나와 동일한 다른 운명의 소유자가 나의 독백을 이어받아
나의 독백은 두고두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독백, 인간의 독백은 지구의 운명이 마지막 될 때 역시 지구의 운명과 같이 할 것이다
선생의 흉상 앞에서 그의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의 한 대목을 되뇐다. 그리고 선생을 처음 만났던 중학생 시절을 떠올린다. 전북연극의 산파, 전북연극의 개척자로 불리게 될 걸 몰랐지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확실히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기전여고를 다니던 누나를 따라 선생의 연극 <산천초목>을 보러 갔습니다. 생애 첫 연극 관람이었고, 흥미로운 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연극이 끝나고 객석에서 머리가 하얀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그게 박동화 선생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인연으로 그는 원로연극제에서 선생 작품을 4년 연속 연출하고 선생을 기리는 두 번의 연극에서도 선생의 역할을 맡았다. 지난해 겨울에는 <나루터>를 무대에 올려 서울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렇게 선생의 생애와 작품을 통해 자기 확신 넘쳤던 고집과 불편부당함에 눈 감지 않으려는 선생의 의지를 더욱 가깝게 접할 수 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선생의 따님인 박의원 씨로부터 “아버지와 닮아 있어 깜짝 놀란다”는 말까지 듣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테다.
“배우는 채우고 비우는 일을 반복하는 직업입니다. 때론 완전히 비우기보다 인물의 장점, 마음에 드는 성격을 남겨두길 원할 때가 있습니다. 선생의 삶과 작품을 연구하며 선생에 대한 애정이 더 커져 선생의 일부를 내 안에 쌓아 뒀을지도 모르지요. 애초에 내 성격이 선생과 같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됐든, 그분과 닮아간다니 나쁘지 않은 기분입니다.”
그래도 연극은 계속돼야 한다
코로나19에 맞서야 했던 지난해, 전북연극계는 대책이 없었다. 연기 끝에 전북연극제를 간신히 치러냈지만, 올해 무대가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다. 관객을 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연극계는 자의 반 타의 반, 공연을 영상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서 연극을 해야 하는가, 의문이 들지만, 현실이 그들을 떠밀고 있다. 지회장으로서도 배우로서도 쉽지 않다. 모든 상황이 그에게 답을 요구하는 꼴이다.
“제가 모든 것에 답을 주는 건 잘못된 겁니다. ‘이렇게 하자’라고 하기보다 ‘어떻게 할래?’라고 묻고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입니다. 회원들의 합의를 끌어내고 현 상황의 후유증을 가장 적게 남기는 방법을 찾을 뿐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전북연극계는 꽤 많은 인재가 있습니다. 정체성 혼란과 침체기를 지나면 전북연극이 다시 꽃피울 것이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 희망을 지키도록 남은 기간 힘쓰겠습니다.”
1년의 임기를 채우고 그는 무대에 더 집중하려고 한다. 매 순간 후회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게 했던 연극판으로 돌아가 그를 행복하게 해줬던 관객의 박수 소리도 마음껏 듣고 싶다. 작은 움직임으로도 큰 울림을 주는 한량무의 손짓처럼 느리지만 깊이 있고 작지만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연기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다. 미치광이 같았던 박동화 선생의 삶으로, 먼저 간 친구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불사를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독백도 두고두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세영 문화기획자 | 전북도민일보와 전라도 닷컴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문화저널 편집장으로 일했다. 최근에 무주로 내려가 살며 문화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