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영화 읽는 영화 | 빛과 철
미스터리를 넘어 인간의 죄책감을 집요하게 응시하다
‘희주(김시은)’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선 침범이라는 그의 과실로 의식불명이 된 피해자에 대한 책임까지 져야만 했다. 그 후 고향을 떠났던 희주는 2년 만에 돌아와 예전에 일했던 공장에 재취업을 한다. 그런데 그 공장 구내식당에는 피해자의 부인 ‘영남(염혜란)’이 일하고 있다. 희주는 영남을 계속 의식하며 피하지만, 무슨 의도인지 영남은 자꾸 희주에게 말을 건다. 거기다가 영남의 딸 ‘은영(박지후)’까지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희주의 주변을 맴돈다. 그 모녀는 희주가 겪어야만 했던 부당한 고통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나 죄책감을 가지고서 접근한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을 추동하는 정동은 죄책감이다. 그들은 사고 이전에 남편 혹은 아버지가 드러냈던 죽음 충동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해왔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슴 깊이 억눌러 놨다. 아버지가 일부러 죽으려고 사고를 냈다는 은영의 고백은 그동안 죄책감에 억눌려 살던 희주를 뒤흔든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피해자라는 확신을 가지고서 사고의 재조사를 경찰에 요구한다. 그러나 사고를 구성하는 진실의 조각들을 하나둘 찾아낼 때마다 점점 모호해져 가는 가해와 피해의 경계 앞에서, 아니 오히려 자신의 남편이 정말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단서들 앞에서 좌절한다. 또한 은영의 고백 사실을 알게 된 영남 역시 흔들리기 시작하고,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자살을 암시하는 듯한 말을 전해 듣고는 무너져 내린다.
사실 영남의 남편은 같은 공장의 직원이었으나 산업재해를 당해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청 업체 소속이라는 이유로 10년 넘게 일한 그의 산재 인정을 회사가 거부하자 분노하며 차를 몰고 사장에게 간 것이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 사고가 항의를 위한 최후의 발악으로 의미 부여가 되어서는 곤란하기 때문에 함구하고 있었다. 즉, 그는 사고의 피해자로 남아야만 했다. 결국 그 사고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였다. 그리하여 죄책감의 칼끝은 마침내 관객에게로까지 향한다. 우리는 과연 그 사고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 묻는다.
죄책감에 잠식되어 버린 희주와 영남은 더 이상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관계로 마주한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 앞에서 그들은 서로 너무 닮아버렸다. 희주가 영남에게 내뱉는 말들은 곧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희주가 영남을 향해 “당신 남편, 목숨 버리는 생각하는 동안 당신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잖아? 다 알고 있으면서, 끝까지 아닌 척, 모르는 척!”이라는 매서운 외침은 곧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어느새 그들은 서로의 거울이 되어있었다.
영남은 남편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희주와 함께 차를 타고 병원으로 향한다.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노루 앞에서 급정거를 한 뒤, 놀란 눈으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영화는 그들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노루의 모습으로 끝을 맺으며, 그 지난한 미스터리의 해결을 기대한 관객을 배신한다. 영화의 반전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들처럼 남편들도 노루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중앙선을 넘어 허무하게 사고를 낸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노루는 사건의 진실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일 것이다. (그래서 앞서 한차례 등장했던, 로드킬 당해 도로가에 버려진 노루는 중요한 복선이었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노루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며 진실을 좇던 그들을, 또 관객을 당혹스럽게 한다. 동물의 맞은편에 선 희주와 영남은 그저 죄책감으로 가득한 같은 인간으로 뭉뚱그려진다. 인간의 사건에 동물의 시선이 개입할 때, 그것은 다른 층위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이제 남은 건 인간의 서슬 퍼런 죄책감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