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⑥
러브 인 시베리아 : <아저씨의 꿈>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글 이휘현 KBS전주 PD
시베리아 군부대에 징집되다
때는 바야흐로 도스또예프스끼가 시베리아 옴스끄 감옥에서의 4년 형을 마친 1854년 2월.
답답한 감옥살이가 끝났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배 생활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중죄인의 경우 보통 몇 년 간의 징역형이 끝나고 나면 다시 시베리아 오지의 군부대에 사병으로 강제 입영시키는 게 당대 러시아 유형 제도였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는 감옥에서 석방된 지 몇 주 지나
지 않아 세미빨라찐스끄라는 시베리아 오지의 러시아군 제7대대에 사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성경 빼고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고 가족에게 편지 쓰는 것조차 철저하게 금지되었던 감옥 생활에 비하면,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세미빨라찐스끄에서의 사병 생활은 약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우선 읽고 쓸 수가 있었다. 그는 형 미하일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저런 책들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목록에는 유럽의 다양한 소설뿐만 아니라 칸트와 헤겔 등의 철학 서적, 그 외 사회학, 경제학, 심지어 각종 어학 서적과 잡지 등이 뒤섞여 있었다. 정치범으로 수용되기 전 거의 문학작품만 편식했던 그였지만, 여러 해 감옥 생활을 겪고 나온 이후 그의 관심사는 문학 영역 바깥으로도 거칠게 확장되어갔다. 4년 만에 달라진 환경은 도스또예프스끼에게 큰 자극제가 되어주었고, 20대 때 채 피우지 못했던 꿈, 그러니까 러시아 문단에서 거장으로 우뚝 서고자 했던 열망이 다시 그의 마음속에 들끓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욕도 세미빨라찐스끄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금세 식어버리고 만다. 막상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시베리아의 첩첩산중에 위치한 그저 자그마한 시골 마을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한때 육군 공병대 장교로 근무했던 그가 전역한 지 십 년 만에 사병으로 강등되어 앞으로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군 생활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주둔지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그의 처지 또한 답답함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어느 날 이 적막한 시베리아 산골에 뜻하지 않은 인연이 찾아오게 된다.
시베리아의 구세주 브란겔 남작
브란겔 남작. 그는 뻬쩨르부르그 출신의 젊은 귀족으로 도스또예프스끼가 강제 입영된 해(1854년)의 늦가을 무렵 검찰관으로 세미빨라찐스끄에 부임했다. 그가 이곳에 와서 놀란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벗 삼을 것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는 적막강산에 자신이 부임했다는 사실이었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적한 시베리아 산골에서 소설가 도스또예프스끼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브란겔 남작은 도스또예프스끼가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로 뻬쩨르부르그 문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10년 전부터 이미 그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궁벽한 고장에서 한 때마다 이름을 떨친 작가와 마주하게 되다니!
이렇게 기묘한 우연으로 얽힌 두 사람은 곧 끈끈한 우정을 쌓게 된다. 브란겔 남작은 의지할 곳 없는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졸병 신세가 된 도스또예프스끼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종종 금전적인 도움도 주었다. 브란겔 남작에게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존재 자체가 무료한 시베리아 시절에 큰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두 사람은 남작의 집에서 수시로 만나 밥과 술을 곁들이며 러시아와 유럽의 정치 사회 예술 문화 등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 우정이 가장 빛을 발한 대목을 말하자면, 아무래도 도스또예프스끼의 구애 작전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첩첩산중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영혼을 뒤흔든 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로부터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절친 브란겔 남작이 물심양면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청년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음을 온통 빼앗아 가버린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위대한 작가의 진정한 첫사랑으로 기억될 그 운명의 대상! 훗날 도스또예프스끼의 첫 부인이 될 그 이름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 이사예프. 이제 그 파란만장했던 애정사를 간략히 들여다보면 어떨까.
유부녀를 사랑하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 노년의 브란겔 남작이 남긴 자서전에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영혼을 사로잡았던 첫 연모의 대상이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는 서른 살이 넘은 여인이었다. 보통 키에 가냘프고 정열적이며 명랑한 성격의 그녀는 아름다운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불길한 기운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었고, 훌륭한 교양과 탐구하는 태도를 갖추었으며, 친절할 뿐만 아니라 유달리 생기발랄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녔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그녀를 처음 본 건 1854년 봄, 그가 출옥 후 세미빨라찐스끄의 부대에 배속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마리야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버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던 것! 도스또예프스끼가 복무 중인 부대 인근에서 세무관으로 근무하는 남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데다가 그 부부 사이엔 어린 아들까지 하나 딸려있었다. 그렇지만 열정의 대상에 온 영혼을 빼앗겨버린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그따위 현실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짝사랑이었다는 것! 마리야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여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프랑스의 피를 물려받은 그녀는 열정적인 몽상가에다가 예술가로서의 기질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검역소 소장을 지낸 아버지 덕분에 넉넉한 살림 속에서 풍족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그녀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결혼 이후였다.
알렉산드르 이사예프라는 교사와 결혼해 빠벨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하나 두었지만, 그녀의 삶은 고독하고 지리멸렬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남편은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고, 그러다 보니 집안 살림은 언제나 엉망이었다. 남편이 세무관으로 복무하게 된 이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의 생활 또한 그녀에게는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불행의 감정이 켜켜이 쌓여가던 시절의 어느 날 그녀의 일상 속에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청년작가가 불쑥 찾아든 것이다.
공상가 기질이 다분했던 마리야에게 도스또예프스끼와의 만남은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은 딱 거기까지였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정치범으로 수용되었다가 사병으로 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앞날이 불투명한 젊은이였다. 도스또예프스끼를 분별없는 열정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마리야가 잃을 게 많았던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거침없이 달려들었지만 그때마다 마리야는 피해 다녔다. 그러다가 도스또예프스끼가 주저앉으면 그녀는 또 슬며시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열정에 불이 붙으면 마리야는 또 달아났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녀는 ‘밀당’의 천재였던 셈이다.
그런 그들에게도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첫 만남이 있은 후 이듬해에 남편의 부임지가 바뀌면서 마리야는 쿠즈네츠크라는 지역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유형자 신세이기에 주둔지를 이탈할 수 없었던 도스또예프스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고 홀로 남은 그는 한숨과 눈물의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야 했다. 훗날 이 시기를 회고한 브란겔 남작에 의하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병약한 몸에 술주정뱅이이기도 했던 마리야의 남편 이사예프가 끝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가족에게는 비극이었지만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변변한 유산 없이 떠나가 버린 남편을 두고 아들 딸린 홀몸이 된 마리야에게는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브란겔 남작의 도움을 받아 기꺼이 그녀의 지원군이 되어주었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1857년 서른다섯의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렇게 첫 연모의 대상이었던 마리야와 3년 만에 결실을 맺게 되었다.
가장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쓴 소설
아직 시베리아 유형자 신세였지만 이제 그는 아내와 한 아이를(비록 남의 자식일망정) 거느려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사랑도 좋지만 이제는 식솔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할 무게가 그에게 짐 지워진 것이다. 그 사이 절친이었던 브란겔 남작이 임기를 마쳐 시베리아를 떠나버리는 바람에, 이제 금전적인 도움을 청할 사람은 저 멀리 뻬쩨르부르그에서 사업을 하던 형 미하일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형에게만 의지할 수도 없는 일.
도스또예프스끼는 뻬제르부르그로의 복귀를 원하는 탄원서를 황제에게 끊임없이 보내는 한편(그 사이 니꼴라이 1세는 죽고 개혁적이면서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알렉산드르 2세가 황제로 등극했다), 소설 쓰기에 돌입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도스또예프스끼가 거둘 수 있는 수입이란 결국 소설을 통한 인세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아저씨의 꿈>과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이다.
<아저씨의 꿈>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중편소설 분량의 코미디에 가깝다. 시베리아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돈은 많지만 판단력이 흐릿한 데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 든 귀족을 한 탐욕스런 부인이 자신의 어린 딸과 결혼시켜 재산을 가로채려다가 허탕 친다는 일종의 상황극이다. 부인의 딸을 흠모했던 젊은이가 두 모녀의 계략에 넘어가 결혼을 승낙한 늙은 귀족에게 그건 그냥 “아저씨가 꾼 꿈일 뿐”이라고 얘기하면서 상황이 종료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또한 <아저씨의 꿈>과 비슷한 톤을 유지한다. 시베리아의 어느 퇴역 대령 출신 가정에는 오래전부터 하는 일 없이 빌붙어 사는 중년 백수가 하나 있다. 그는 이 집안의 어느 핏줄과 엮이지 않았으면서도 퇴역 대령의 의붓어머니를 진작에 구워삶아 하나의 권력자로 오랫동안 행세해 왔다. 귀족의 친척이자 나름 대학 공부까지 마친 젊은이(화자이자 주인공)의 눈에는 이 행태가 기이하게 여겨진다. 게다가 그렇게 빌붙어 사는 사내의 정체가 이 젊은이가 보기에는 쥐뿔도 없고 야비한 그런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집안사람들은 이 중년 백수에게 꼼짝 못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밤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퇴역 대령과 중년 백수 사이에 큰 다툼이 생기고, 그동안 꼼짝 못 하던 퇴역 대령이 괴력을 발휘해 이 의문의 사내를 집 대문 밖으로 내동댕이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이 대목을 읽는 독자들은 굉장히 통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아끼는 사내에게 폭력을 행사한 걸 보고 길길이 날뛰는 의붓어머니 때문에 귀족은 다시 사내를 집안으로 들이고, 그리하여 이 미스터리한 중년 백수는 다시 귀족 집안의 권력자로 행세하다가 나이 들어 죽는다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이다.
<아저씨의 꿈>과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은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에 걸쳐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던 뻬쩨르부르그와는 거리가 먼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했다는 차이 말고도, 작품의 톤이나 깊이 자체가 그의 여타 다른 소설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쉽게 말해 도스또예프스끼 풍의 심리 드라마적인 요소가 적고 하나의 상황극으로서의 코미디 성격이 강한 것이다. 아무래도 신혼이라는 가정환경이 주는 마음의 들뜸도 있었을 것이고, 아울러 가족 부양의 의무 때문에 소설을 서둘러 썼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 보니, 이 두 작품은 당대 독자들에게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책 판매 실적도 부실했는데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런 결과에 별다른 관심이 보이지 않고 마리야와의 달콤한 사랑에 흠뻑 젖어 살았던 듯싶다. 동시대 평론가들의 평 또한 냉담했다. 이런 세간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도스또예프스끼는 그저 하루빨리 이 궁벽한 시베리아 산골을 벗어나 사랑하는 아내와 뻬쩨르부르그로 복귀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아주 긴 세월이 흘러 그의 모든 작품들을 조망해 보았을 때 <아저씨의 꿈>과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은 크게 눈이 가는 작품이 아닌 건 분명하다.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의 한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의 사랑으로 인한 들뜬 마음이 슬쩍 스며든 이 시베리아의 소극(笑劇)을 흥미롭게 읽어 나가다 보면, 이후에 더욱 파란만장하게 펼쳐질 그의 인생사와 더불어 그 과정에서 하나하나 결실을 맺어가는 그의 대표작들을 만나는 데에 더욱 풍성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엉뚱한 결실이지만 이 또한 그의 문학적 자식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