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학폭미투를 돌아보다
학폭 미투, 어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글 정우식 퇴직교사, 사)전북청소년교육문화원 이사장
학폭 미투가 번지면서 학교폭력이 또다시 커다란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우리 지역 출신 쌍둥이 자매 배구선수 사건에서 불붙기 시작한 학폭 미투가 체육계, 연예계로 확산되고 있는데, 주변의 반응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 같다. “10년, 20년 전의 오래된 일이라도 잘못이 그냥 덮여지면 안 된다. 언젠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는 일임을 깨닫게 해야 한다.”는 반응이 대다수지만, “초등이나 중학교 같은 아주 어린 시절의 실수일 수 있는데 한 번 잘못으로 영원히 사회에서 퇴출되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는 반응도 적지 않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 사태를 바라보는 심정은 착잡하기만 할까? 여전히 응징과 복수 같은 부정적 접근만 난무할 뿐, 피해자 회복과 문제 해결을 위한 발전적 접근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피해자 회복이 가장 우선되어야 함에도, 언론은 여기에는 관심이 없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진실 공방에만 초점을 맞춰 선정적으로 다루면서 갈등을 부추기기만 하니 씁쓸함이 더해지는 탓이다. 또 당시 학생이던 가해자들에게만 모든 책임을 둘러씌우며 마녀사냥한 뒤 본질적 접근은 실종될까 싶어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공동체로서 함께 지켜주지 못했다는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가해자로 지목된 특정인 죽이기에만 나선다면, 학폭의 사회적 성격과 책임을 외면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학폭 사태는 구체적인 면에서는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따로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보다는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사회 성찰적 측면에서 접근해보고자 한다. 사회가 폭력적인데 학교만 폭력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인식에서 이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쉽게 폭력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이미 우리들 안에 내재화되어 버린, 그러나 반드시 인지해서 극복해야만 할 우리 사회의 여러 폭력문화와 양상을 살펴보고, 그러한 폭력문화를 걷어내기 위해 어른인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를 성찰해보려 한다.
양극화야말로 거대 폭력이다.
학교폭력은 왜곡된 권력 구조에서 나온다. 일종의 계급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왜 학교뿐 아니라, 체육계와 군대에서도 심각한 폭력 문제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오는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학교폭력과 체육계 폭력, 군대 내 폭력은 궤를 같이한다. 모두 구성원들의 관계구조가 집단적, 폐쇄적, 수직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권력이 상하관계 둘로만 양극화되어 있다. 양극화는 힘의 불균형과 권력관계의 왜곡을 불러와서 필연적으로 폭력으로 작동한다.
나아가 모든 양극화는 그 자체가 폭력을 내포한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개선 노력이 부족하면 폭력 문제의 근본적 해결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 시대 어른들이 노력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양극화 해결이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쉽지 않은 문제이지만 어려울수록 조금이라도 일찍 서둘러야 한다. 안타깝게도 ‘빈익빈 부익부’는 갈수록 심화, 고착화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니까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내면화하는 단계에 와 있다. 비단 경제면에서뿐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쟁주의와 능력주의는 양극화가 내면화한 단적인 예다.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되고, 그 안에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능력 있는 사람은 무한히 가지는 반면, 능력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사회, 그것이 공정한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능력을 타고 나지 못했거나 해도 안 되는 사람은 낙오자로 전락하여 소외당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사회, 돈 있는 사람은 뭐든 할 수 있는 사회, 권력이나 정보를 가진 사람은 온갖 특혜를 다 누리는 사회, 이 모두가 양극화가 된 사회의 단면들이고 폭력이 아닐까?
폭력이 내면화된 사회, 학폭만이 문제일까?
매체마다 유행하는 ‘먹방’이 오래 전부터 폭력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의아해할지 모르지만 그랬다. 누군가는 아직도 몇천 원이 없어서 배를 곯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기도 하는 현실에서, 지상파고 종편이고 할 것 없이 나서서 웬만한 사람들은 평생 한 번 먹어보지도 못할 킹크랩에, 한우에, 고가의 음식들을 취미생활처럼 마구 먹어대는 모습을 방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잔인하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세월호 유가족의 단식투쟁 앞에서 소위 폭식투쟁을 일삼던 극우커뮤니티들의 폭력적 행태와 과연 크게 다를까? 폭력은 누군가 더 힘들어 하는 사람을 배려할 때 조금씩 줄여갈 수 있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복불복’ 문화 또한 폭력적이지 않은가? 꼭 복을 혼자서 독차지해야만 더 복된 일이 될까? 남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집안에 의사, 검사, 판사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넋두리가 자연스레 받아들여지는 사회, 거대 미디어들조차 사람의 성적 가치와 외모를 앞세워 상업적으로 소비하는 사회, 승자 독식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 갑질 문화가 일상이 된 사회,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돈과 권력과 능력을 쟁취해 남보다 윗자리에 오르고픈 사회, 윤리적 잣대로 학생을 재단하여 옭죄는 교사들, 학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받아주지 못하는 교사들... 이 모두 폭력일 수 있다.
모든 차별은 폭력이다.
사회에서는 차별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아이들에게는 차별하지 말라고?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피부색이 다르면 차별하고, 성 정체성이 다르면 차별하고, 종교가 다르면 차별하고, 아파트 크기가 다르면 차별하고, 사상이 다르면 차별하고, 지역이 다르면 차별하고, 나이로 차별하고, 외모로 차별하고, 능력으로 차별하고, 가진 게 없다고 차별하는 사회. 이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인데, 아이들의 왕따를 탓할 수 있을까?
비록 많이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어른들은 차별 금지를 위한 사회적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엄격한 수준의 차별금지법을 시급히 제정하여야 한다. 어떠한 차별도 폭력이고 범죄임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내재화할 수 있도록 함께 나서야 한다. 타인이 싫어하는 행위를 집단적으로 하면 훨씬 중한 범죄라는 인식을 명확히 가르치고, 작은 범죄라도 반드시 다 같이 나서서 해결한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나의 돈과 권력과 능력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뤄낸 성취일 수 없다는 사회적 책무와 연대 의식을 복원하고 사회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승자독식사회를, 서로 돕고 나누는 사회로 바꾸어가야 한다. 사회에 만연한 천민자본주의적 속성과 물신주의를 혁신적으로 걷어내 가야 한다.
부모나 교사나 선배인 어른들이, 자녀와 학생들을 훈육과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어른과 동등한 인격체로 대접하는 수평적 관계 회복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