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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 | 연재 [연재/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⑦]
뻬쩨르부르그로의 귀환, 하지만…
상처받은 사람들
이휘현 KBS전주 PD(2021-05-10 09:39:02)



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상처받은 사람들>




뻬쩨르부르그로의 귀환, 하지만… 

이휘현 KBS전주 PD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오다


1857년 2월, 서른여섯 살의 도스또예프스끼는 ‘세미빨라찐스끄의 연인’이자 아들 딸린 미망인이었던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와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결혼 후 신혼의 단꿈에 잠시 젖어 살았으나 이제 두 식솔을 거느리게 된 가장으로서 도스또예프스끼는 생계에 관한 고민을 떠안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시베리아를 배경으로 하는 소극() <아저씨의 꿈>과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을 써서 발표했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작가로서의 명성에도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누가 뭐라 해도 도스또예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의 작가’였다. 그가 가진 생산 능력이라고 해봐야 글쓰기가 유일했기에, 그가 먹고사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은 바로 ‘뻬쩨르부르그로의 복귀’였다. 다행스럽게도 도스또예프스끼의 뻬쩨르부르그 복귀는 외부적으로 여러 가지 좋은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우선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1세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를 정치범으로 체포해 죽음 직전으로까지 내몰았던 장본인 니꼴라이 1세가 크림전쟁 패배 후 낙심 끝에 죽음을 맞이했다(1855년). 그리고 황제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은 알렉산드르 2세였다. 그는 평화와 개혁을 표방한 자유주의 성향의 군주로서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 곳곳에 봄바람을 불어넣었다. 훗날 러시아의 고질적 계급제도였던 농노제를 폐지한 이도 바로 알렉산드르 2세였다. 


개혁 군주의 즉위는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슴에 희망의 불을 지폈다. 그는 뻬쩨르부르그 인맥을 동원해 그의 귀향을 바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지속해서 제출했다. 그리고 그의 끈질긴 노력은 빛을 발했다. 1859년 3월 황제 칙령을 통해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군부대 전역’이 공표되었던 것이다. 결혼 후 2년 만에 이루어진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말, 도스또예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시베리아로 유배된 지 거의 10년 만에, 그는 자유인이 되어 꿈에도 그리던 뻬쩨르부르그로 입성하게 되었다.


형 미하일과 함께 <시대>를 창간하다


뻬쩨르부르그로 복귀한 도스또예프스끼는 희망과 열정에 가슴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우선 자신의 청년기 작품들을 모은 문학집 발간을 서두르면서 새로운 작품의 구상에도 매진했다. 아울러 그는 형 미하일과 함께 또 하나의 큰 문학적 야망을 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 형제가 잡지를 직접 발간하는 일이었다.

사실 그의 형 미하일은 표도르가 시베리아에서 머무는 사이 사업가로 나름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것은 담배 사업이었는데, 미하일은 사업 수완을 발휘해 담배에 사은품을 끼워 파는 아이디어로 큰 재미를 보았던 모양이다. 지금이야 흔한 일이지만 당시 러시아에서 이런 사업 수완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고 전해지니,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표도르와 달리 형 미하일은 이재에 무척 밝았던 것 같다. 

그런 미하일이 동생의 문학적 재능을 위해 기꺼이 사업을 접고 잡지 출간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입장으로서는 잡지의 직접 출간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야망을 맘껏 표출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뻬쩨르부르그 복귀 후 1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드디어 1861년 1월 <시대(Vremia)>라는 이름의 월간지를 창간하게 된다. 형 미하일이 잡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 되었고 동생 표도르가 잡지의 예술과 비평 분야를 주관하는 식으로 역할이 분배되었다. 이 새로운 잡지의 등장은 당대 러시아 문단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시대>의 창간이 갖는 의미 자체가 한때 촉망받던 청년작가 도스또예프스끼의 뻬쩨르부르그 문단 복귀를 공표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그 반향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호응하듯 도스또예프스끼는 <시대>의 창간호에 자신의 신작을 발표했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15년 전 자신이 누렸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했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재능이 아직 죽지 않았음을 온 천하에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 몇 달간 연재되어 독자들로부터 꽤 큰 사랑을 받은 이 작품의 제목은 바로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상처받은 사람들> 이야기


중산층 정도의 재산을 가진 소지주 이흐메네프와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발꼬프스끼 공작은 서로 원수지간이다. 원래 둘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공직에 몸담고 있는 발꼬프스끼 공작은 성실하고 믿음직한 이흐메네프에게 자신의 영지 중 일부의 관리를 맡겼고, 이흐메네프는 발꼬프스끼 공작이 흡족해할 만큼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교활한 성격의 발꼬프스끼 공작과 세상 물정 모르고 농사일에만 전념해 온 이흐메네프 사이에 무슨 공감대가 형성될까 싶지만, 어쨌거나 둘은 서로를 신뢰했고 그 덕에 어울리지 않는 둘의 우정은 깊어갔다. 그런 두 사람 사이가 뒤틀리기 시작한 건 발꼬프스끼 공작이 자신의 아들 알료샤를 이흐메네프의 시골집에 위탁하면서부터였다.


홀아비인데다가 정부 관료로서 공사다망했던 발꼬프스끼 공작은 아직 철부지인 아들 알료샤를 제대로 양육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알료샤의 제대로 된 교육을 위해 자신의 영지에 믿음직하게 자리 잡은 이흐메네프를 위탁 교육의 적임자로 꼽았다. 알료샤는 그렇게 이흐메네프의 시골집에서 한동안 머물게 되었다. 이 계획은 꽤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위탁 기간이 끝나고 다시 아버지 발꼬프스끼 공작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알료샤가 이흐메네프 가정에서의 잔류를 원하자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이흐메네프 부부 사이에는 나따샤라는 아리따운 딸이 있었는데 알료샤가 이 또래의 소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집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 관계를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흐메네프 부부였다는 얘기까지 돌자 발꼬프스끼 공작은 발끈하게 된다. ‘순진한 내 아들을 꼬드겨서 내 재산을 가로채려고??’ 이흐메네프는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한 번 시작된 발꼬프스끼 공작의 의심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둘 사이에 고성과 욕설이 오가고 급기야 법정 다툼으로까지 사태가 비화하고 만다. 발꼬프스끼 공작은 알료샤를 데리고 뻬쩨르부르그로 떠나면서 이흐메네프의 영지관리인으로서의 지위를 박탈하고, 이로 인해 이흐메네프 가족은 하루아침에 생계난에 허덕이게 된다. 그렇게  두 집안은 철천지원수지간이 되어버렸다.


한편 이십 대 초중반의 청년작가 바냐(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이흐메네프 가정의 의붓아들로 자랐다. 친남매처럼 지냈던 나따샤와는 어느 순간부터 연모의 정을 쌓아나가기 시작했고, 결혼을 생각해도 될 어엿한 성년의 나이에 이르자 나따샤에게 어렵사리 청혼해 그녀로부터 수줍은 승낙을 받은 상태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는데 그사이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 나따샤가 부모의 원수인 발꼬프스끼 공작의 아들 알료샤와 진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졸지에 실연을 당한 소설가 바냐의 입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원수의 아들이자 이 모든 파국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했던 알료샤와 결혼하겠다는 딸 나따샤의 선언에 이흐메네프 부부는 노발대발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알료샤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빼면 모든 면에서 무능력한 미성년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나마 악당의 면모를 가진 아버지 발꼬프스끼 공작과 달리 착하고 순수한 심성을 가졌을 뿐, 알료샤는 세상 물정 모르는 그저 잘생긴 백치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따샤의 결정은 확고했다. 그 결정이 매우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것임을 빤히 알면서도 나따샤는 알료샤에게 빼앗긴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끝내 알료샤와 결혼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가는 나따샤.한편 이 해괴망측한 연애 소식을 접한 발꼬프스끼 공작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알료샤를 뻬쩨르부르그 사교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던 숙녀 까쨔와 정략결혼 시키기 위해 열심히 발품 팔기 시작한 것이다. 막대한 재산의 상속자인데다가 수려한 외모와 지성미까지 갖춘 까쨔는 어느새 알료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에 나따샤는 버림받는다. 


결국 이흐메네프 부부와 소설가 바냐는 나따샤에게 상처받고, 나따샤는 또 알료샤에게 상처받는 꼴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선량한 사람들이었는데 말이다. 반면 알료샤를 결혼시킴으로써 양육의 책임으로부터 해방되고 또 막대한 부까지 아들을 통해 보장받게 된 발꼬프스끼 공작은 승자가 된다. 이 와중에 발꼬프스끼 공작이 십여 년 전 혼외정사를 통해 얻은 딸이 하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딸을 철저하게 방치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지만, 이 스캔들은 숨겨둔 딸의 죽음으로 인해 조용히 묻히고 만다.


소설의 말미. 발꼬프스끼 공작은 십 대 중반의 어리고 예쁜 소녀를 새로운 신부로 맞이하면서 ‘거대 악의 승리’를 선언한다. 순수하지만 ‘작은 악’인 알료샤는 까쨔와의 결혼을 통해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는다. 이래저래 선한 사람들은 파국을 맞고 악한 존재들이 영광의 열매를 거머쥐는 서글픈 현실이 펼쳐지며 이 장편소설은 끝을 맺는다. 


<시대>의 파국


지극히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로서의 면모를 갖춘 이 소설은 발표 후 비평가들로부터 질타받았다. 가난의 심리학을 천재적인 시선으로 파고들어 뻬쩨르부르그 문단을 뒤흔들었던 <가난한 사람들>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달랐다. 비극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이 연애소설의 마력은 일반 독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도스또예프스끼의 모든 소설을 읽은 필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단순히 읽는 재미로만 따지자면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의 전 작품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대중적 인기는 그들이 발간하는 잡지 <시대>의 판매 부수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창간 1년 후 구독 예약자는 2천3백 명에 이르렀고 그 이듬해에는 4천3백 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시대>의 손익분기점은 2천5백 부 판매였고 그 나머지는 순수한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이었으니, 형제의 잡지 사업은 초장부터 꽤나 큰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잡지가 예기치 못한 필화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었을까.1863년 봄, 폴란드와 러시아 간에 갈등이 발생했다. 나라 밖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러시아 내부 또한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정부는 특히 문화 예술 분야의 검열을 강화하면서 내부 여론에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시대>에 발표된 스뜨라호프의 논설 <치명적인 문제>가 정부의 눈에 포착되었다. 그리고 이 글은 ‘폴란드 문화가 러시아 문화보다 더 우월함을 설파’하려는 의도로 쓰인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는 (1) 과거 폴란드 귀족의 문학적 업적이 대단했고, (2) 이 사실은 폴란드가 예술과 문학을 무기로 러시아를 상대해야 함을 뜻하며, (3) 따라서 러시아 문화는 폴란드 문화보다 우세해져야 최근 발생한 폴란드의 반란 같은 문제가 해소될 것이다! 라는 스뜨라호프의 삼단논법을 곡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스뜨라호프의 <치명적인 문제>는 말 그대로 <시대>의 명운에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시대>의 폐간을 결정했고, 도스또예프스끼 형제는 이 결정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1863년 6월 호를 마지막으로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2년 반이라는 짧은 영광의 시간이 끝남과 동시에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적 경제적 입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다시 빈털터리가 된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 

그는 러시아 정부의 ‘빈곤 작가 지원 기금’에서 1천 루블을 대여해 유럽으로 도피성 여행을 떠나게 된다. 아내와 아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저 먼 유럽 땅에서는 소위 ‘파리의 연인’이라 명명되는 한 젊은 여자가 도스또예프스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 인생의 가장 깊은 나락으로의 침잠을 의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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