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안자의 꿈꾸는 인생|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⑱
시집 식구들과 나
임안자 영화평론가
괴티와 나
괴티를 나는 처음부터 좋아했다. 페터의 영향도 컸겠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씀씀이와 기질이 내 친아버지와 비슷해서 괴티라고 부르긴 했지만 사실 나에겐 아버지와 다름없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애들에게 시아버지와는 달리 괴티를 독일어 대신 한국말의 할아버지로 부르게 했고 그걸 그는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페터와 베라에게 그랬듯이 그는 우리 애들을 친손자들처럼 귀여워했다. 내가 바쁠 때면 애들을 집으로 데려가 하루 내내 돌보고 애들이 좋아하는 동물원에도 자주 데려갔다. 애들에게 얼마나 동물들에 관해 설명을 잘해줬던지 유치원 나이에 애들이 곰은 뭣을 먹고 원숭이 고향은 어데고 코끼리는 얼마나 오래 사는가를 외울 정도였다. 그는 우리 집에 올 때면 애들 나이에 잘 들어맞는 장난감과 그림책 또는 동화책을 들고 왔으며 애들과 게임을 하고 동화를 읽어줬다. 애들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스위스 고전문학에 관련된 책들을 사주고 나중에 내가 영화일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러시아와 유럽 나라들의 영화에 대해 나와 열띤 토론을 했다. 그는 내가 애들 옷을 만드는 걸 봤다며 하루는 노란색 공단의 옷감을 ‘어느 한국 장학생한테 오래전에 받은 선물’이라며 갖다줬다. 우리에 대한 그의 지극한 사랑은 시어머니의 오랜 질병 때문에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변함없이 계속됐는데 괴티가 시어머니 없이 홀로 남게 돼 너무 불쌍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자고 몇 번이나 졸랐으나 그는 한결같이 ‘고맙지만 가끔 만나는 게 더 반갑다’며 웃어넘겼다.
괴티는 1987년 8월에 75살을 맞자 큰 음식점으로 가족과 친지들을 모두 점심 식사에 초대했다. 시어머니 사망 일주년이 막 지난 뒤였던 지라 생일 축하장은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였지만 괴티의 재치 있는 농담에 여기저기서 가끔씩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날 초청 절차는 식사 전에 몇몇 친구들이 괴티의 삶에 대해 축하 말을 하고 괴티가 뒤에 감사말을 하는 것으로 짜여있었다. 그러므로 서너 명 친구들이 먼저 축하 말을 한 다음에 쾨티가 그 뒤를 이었는데, 친구들의 축사에 감동되어 눈물을 글썽이던 괴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간단히 감사 말을 끝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곁에 앉아있는 베라의 어깨에 머리를 살며시 얹고는 바로 숨을 거두었다. 그 순간 베라가 마구 소리를 지르고 페터는 정신없이 뛰어가 인공호흡을 시도했지만 괴티는 반응하지 않았다, 심장마비였다. 페터가 괴티의 사망을 알리는 찰라 실내는 온통 울음소리뿐이었다. 우리 애들도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엉엉 울고 있었는데 애들을 끌어안고 나도 실신한 사람처럼 울었다.
시누이 베라와 나
시누이 베라는 1942년생으로 나와 동갑이다. 그녀는 바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에 결혼하고 나중에 대학을 마쳤다. 14살이 위인 남편은 변호사 출신으로 중년기에 바젤 사회민주당의 3기 국회의원으로 12년 동안 활동했으며 80년대 중반에 남녀평등의 월급 제도를 법적으로 성공시키는데 한몫했던 이름난 정치가였다. 그는 국제적인 교섭에도 활발하여 1972년 국회의원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에 사무 겸 부부 여행을 함으로 정계와 미디어의 화젯거리가 됐었다. 그런 한편 시누이는 대학을 끝내고 딸 둘을 낳은 뒤 남편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1972년에 사민당의 바젤 시의원으로 뽑히면서 주로 교육과 문화 그리고 반핵운동에 관여했다. 하지만 1년도 못 가서 정치 생활을 그만두고 취리히 대학에서 심리학을 배웠다. 그리고 졸업 이후에 바로 심리 상담소를 열고 남편과 이혼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사민당의 동료와 재혼했다. 그녀가 시의원의 자리를 빨리 내던지고 심리학 쪽으로 방향을 바꾼 데는 시어머니의 정신적 지병과 그 이후 외갓집의 비극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가족의 위기에 대해 베라가 나중에 50장이 넘는 수첩에 쓴 글의 일부를 여기에 인용하면, ‘....어머니를 포함한 우리 외갓집 친척의 광기와 변수를 가족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그 광기가 젊은 세대로 이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했다. 그녀가 글에서 지적한 가족의 광기는 시어머니의 자살 말고도 스피츠 호텔주였던 큰 외삼촌과 베른의 변호사 외삼촌이 몇 년 사이를 두고 모두 자살을 한데다가 네 형제자매 중 둘째인 프레니도 노년에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타계한 끔찍스러운 연쇄 자살을 뜻한다. 베라의 글은 외갓집 가족에 덮친 비극이 외할아버지의 자식들에 대한 잔인하고 독선적인 교육 방식과 외할머니의 자식들에 대한 냉정함과 무관심에서 시작됐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베라를 70년대 중반에 페터의 안내로 그녀의 집에서 만났다. 그 시절 그녀는 바젤의 부유층 지역인 부르더홀즈(Bruderholz)의 큰 집에서 살았는데 그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던 딸들은 아프리카나 네덜란드에서 온 오 페어(Au Pair, 가사 보조 여학생)가 돌볼 정도로 그녀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상당히 바빴던 시기를 맞고 있었다. 그녀의 사회적 지위나 활동 범위에 비하면 나는 그때 늦은 나이에 막 대학을 시작하고 말도 어눌해서 첫 만남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의문스러웠다. 그런데 내 앞에 나타난 그녀는 활짝 웃으며 ‘너에 대해 동생한테서 여러 번 들었는데 반갑다’며 시원스럽게 인사를 하고는 ‘외국에서 어려움이 많을 텐데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했는데 탁 트인 인상이 페터와 비슷했다. 그 뒤로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가끔 시누이 부부 집에서 저녁을 하고 한두 번은 바젤 지역의 정치 문화계 거물들이 만나는 정원 파티 자리에 우리도 참가했다. 2000년 초에 내가 전주영화제를 위해 체코의 영화감독 이리 멘젤과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시누이 부부의 감독과의 우정 덕분이었다. (체코 출신으로 세계적 권위의 영화감독 멘젤(Jiri Menzel, 1938-2020)은 1968년에 일어난 반 소비에트 운동 “프라하 봄”에 참여했으며 그로 인해 1970년에 감독 자격증을 잃었다. 그 뒤 스위스 바젤 연극계의 초청으로 그는 바젤 무대에서 연극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반년 넘은 체류 기간을 시누이 부부의 집에서 보냈다).
시누이는 페터를 끔찍스럽게 사랑했다. “부모의 이혼 이후에 계모로부터 동생을 잘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시작된 버릇이라‘고 베라는 이유를 댔는데, 내가 시어머니 때문에 고통을 당하자 그녀는 전적으로 내 쪽을 편들면서 시어머니의 광기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위로했다. 내가 아프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애들을 돌봐주고 둘째 애를 출산했을 때도 큰 도움이 됐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라를 현이의 대모(Gotte)로 택했고 그녀를 우리 애들은 한국어 고모로 부른다. 베라와 나는 시누이, 올케 사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친한 친구가 됐다. 우연찮게 둘 다 책 읽기를 좋아하여 3년 전에 우리는 공동으로 ”문학의 밤“ 모임을 만들었다. 그런데 모임은 얼마 안돼서 6명으로 회원이 늘어났고 모두가 여성이다. 문학의 밤은 두 달마다 만나고 장소는 돌아가면서 회원의 집에서 열리는데 모임의 자리엔 항상 음식과 술이 준비돼 있어 즐거움을 더한다. 우리는 주로 여성문학가 작품을 중심으로 토론을 했으며, 지금까지 한국 작가로서 소개된 독어판 작품들은 한강의 “채식주의자”, 비엔나 김안나의 “위대한 귀향”, 김영하의 “검은 꽃”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스위스에 한국 출신의 스타 작가들이 두서넛 나타나 나뿐만 아니라 베라도 기대가 크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로 2020년 10월부터는 우리는 줌 화상을 통해 소통하는데 포도주를 곁들여 지껄거리던 아기자기한 맛이 없어 좀 아쉽다. 7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