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현의 도스또예프스끼 읽기 ⑧ <지하로부터의 수기>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글 이휘현 KBS전주 PD
꼬여버린 도스또예프스끼의 중년 인생
1864년 1월, 죽어가는 아내 곁에서 도스또예프스끼가 펜을 든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은 그의 표정은 몹시 복잡하다. 지난 몇 주 사이 그는 몇 번의 간질 발작을 겪었고, 고질병인 치질 때문에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수중에 돈은 없다. 폐병으로 바싹 말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아내를 위해 맛있는 식사 한 끼니 제공할 돈이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는커녕 빚만 잔뜩 쌓여있다. 게다가 천덕꾸러기 의붓아들 빠벨은 도대체 어디서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정치범으로 체포, 사형 판결, 시베리아 유형 10년… 산전수전 다 겪어본 인생이건만 요즘처럼 이렇게 내 삶이 꼬인 적이 있던가?’
하지만 신세 한탄만 하고 있기에는 스스로가 몹시도 부끄럽다.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이 지난 반년 남짓한 시간 동안 저지른 패악들을 떠올리면 말이다. 불륜과 도박으로 망가져 버린 그 시간들을 되돌아보니 당장 벽에 머리라도 찧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에게는 숙제가 남아있다. 형 미하일과 함께 새롭게 창간하려 하는 잡지에 실릴 소설을 써내야 하기 때문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는 노트를 펴든다. 작년 10월부터 틈틈이 써두었던 원고를 가지고 그는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로 결심한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나는 악한 인간이다. 나는 호감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내 병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으며 사실 어디가 아픈지조차도 잘 모른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니면 자신의 배배 꼬여버린 주변 상황에 대한 솔직한 푸념? 혹은 변명? 지나온 삶에 대한 가슴 절절한 참회?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세상을 향해 도발하는 악의와 반항?
수많은 모순된 감정들이 응축되어 폭발한 이 소설은 그해(1864년) 3월 세상에 공개된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독자들에게는 흔히 <지하생활자의 수기>로 널리 알려진 소설이 바로 이것이니, 우리는 이 작품의 탄생 배경을 통해 그의 60년 인생 중 가장 암울했던 한 시절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유럽으로 도피하다
1861년 1월, 형 미하일과 의기투합해 창간한 월간지 <시대(Vremia)>는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다. 우선 시베리아 유형 10년(1849-1859)의 문학적 공백기를 딛고 마흔 줄에 접어든 도스또예프스끼가 이제 어엿한 중견작가로서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마중물 역할을 해주었다. <시대>를 통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죽음의 집의 기록>이 완결되었고, 아울러 이 월간지에 몇 달간 연재한 <상처받은 사람들>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던 것이다.
<시대>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도스또예프스끼 형제의 주머니도 그만큼 두둑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앞날이 탄탄대로일 것 같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인생사는 잡지 창간 2년여 만에 파국을 맞게 된다. 잡지에 실린 글 하나가(스또라호프의 논설 <치명적인 문제>) 정치적 필화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시대>는 결국 1863년 4월 강제 폐간되기에 이른다.
작가로서 그리고 출판인으로서 이중의 타격을 입은 도스또예프스끼는 허탈감에 빠졌다. 모처럼 고취되었던 의욕은 꺾였고 경제난에 다시 봉착해야 했다. 10년 동안 발이 묶여있던 시베리아에서 그토록 간절히 돌아오길 원했던 뻬쩨르부르그였건만, 이제 이곳은 그에게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은 그저 지긋지긋한 도시가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몇 달 후 그는 정부에서 받은 ‘빈곤 작가 지원 기금’ 1천 루블을 들고 유럽으로 향하게 된다. 첫 행선지는 프랑스 파리였다.
그해 8월 유럽행 열차에 몸을 실은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음은 조급했다. 원래 6월로 예정되었던 유럽행이 아내 병수발로 두 달이나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에서 한 여인과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수슬로바’. 스무 살 연하 미혼 여성이었는데, 쉽게 말해 그의 유럽 여행 목적은 바로 그녀와의 ‘외도’였던 것이다!
‘수슬로바’라는 여인과의 악연
나이 마흔을 넘긴 중늙은이 도스또예프스끼와 갓 스물이 된 싱그러운 처녀 수슬로바. 두 사람의 인연은 <시대> 창간 직후인 1861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빼어난 미모의 한 문학소녀가 자신의 작품을 잡지에 실어달라며 도스또예프스끼를 찾아왔다. 두 사람이 언제부터 연인 사이로 발전했으며 또 얼마만큼 깊은 관계를 맺었는지에 관해서는 훗날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일은 오로지 두 사람만이 정확히 알 수 있는 법. 다만 수슬로바와 유럽 여행을 꿈꾸었던 건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슴에 바람기가 잔뜩 들어있었다는 것만큼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여하튼 스무 살 연하의 애인을 파리에 홀로 두고 두 달 동안 발이 묶여있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젊고 예쁘고 똑똑한 수슬로바를 파리의 놈팽이 녀석들이 가만둘 리 없어. 나의 수슬로바! 그런 덜떨어진 놈들의 꼬임에 넘어갈 리 절대 없겠지? 수슬로바는 똑똑한 여자니까. 행여 그런 일이 벌어졌기만 해봐. 그냥 확!!’
폐병으로 죽어가는 아내도, <시대>의 폐간으로 시름에 젖은 형 미하일도 뒤로 한 채 파리의 연인을 찾아 나선 도스또예프스끼는 그 도중에 어느 도시의 도박판에 끼어들어 꽤 많은 돈을 날리는 엽기적인 행각까지 벌이게 된다. 1863년 여름, 도스또예프스끼의 인생은 그렇게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파리에 도착해 수슬로바를 만나보니 도스또예프스끼가 갖고 있던 우려는 현실이 되어있었다. 그 사이 수슬로바가 스페인 출신의 한 젊은 의사와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도스또예프스끼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수슬로바와의 인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남매 같은 사이로라도 다시 관계를 맺자며 도스또예프스끼는 수슬로바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둘은 ‘합방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유럽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함께 도박판을 기웃거렸다.
이런 기이한 애정행각의 결과는 뻔했다. 도박으로 돈을 잃은 둘은 갖고 있던 금품까지 전당포에 저당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묵고 있던 호텔 숙박비도 지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도스또예프스끼는 지인들에게 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바닥이 드러났다. 악연으로 얽혀 빈털터리가 된 둘. 유럽에서 두 달간 벌인 외도와 도박의 콤보 파티는 그렇게 끝장나고, 도스또예프스끼는 혼자서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다.
‘세기’의 창간, 그리고 새로운 소설
그 사이 형 미하일은 새로운 잡지 창간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다행히 정부로부터 <세기(Epokha)>라는 이름의 잡지 출간을 허락받았다.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던 형 미하일은 동생에게 1864년 1월 창간호에 실을 작품 하나를 의뢰했다. 하지만 유럽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이전과 같은 창작욕이 잘 타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상에 누워있던 아내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었다.
‘아내가 죽어가는 데 젊은 것에게 눈이 멀어 가족을 내팽개치다니! 그나마 갖고 있던 돈마저 도박으로 다 날려버렸으니 이제 아내의 진료비와 약값은 어떻게 해결하지? 이 한심한 중생아!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이 시절 도스또예프스끼의 자기 모멸감은 아마 최고조에 달해 있었을 것이다. 20대인 1840년대는 그가 촉망받는 신진작가로서 어느 정도 대접받던 시절이었고, 비록 문학적 공백기이기는 했지만 30대인 1850년대의 시베리아 유형은 그에게 ‘억압받는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도덕성을 훈장으로 달아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1860년대 중반을 향하던 이 시기의 도스또예프스끼는 그저 실패한 인간의 전형에 불과했다.
세상은 등 돌렸고, 가족은 절망에 허덕이고 있으며, 자신은 인생 그 자체로부터 버림받은 기분. 사방으로부터 고립된 도스또예프스끼가 갈 곳은 어디일까. 빤하지 않은가. 볕 하나 들지 않는 어느 지하 골방으로의 은둔. 그리고 그곳에서의 소리 없는 외침! 도스또예프스끼 문학세계의 중기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그렇게 탄생했다.
‘지하인간’의 탄생
총 2부로 구성된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괴팍한 소설이다. 중편 분량의 짧은 소설이지만 다 읽어내기가 녹록잖다. 별다른 서사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듯한 제1부 ‘지하실’이 특히 그렇다. 1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향해 온갖 악담을 퍼붓는 듯한 이 1부는 읽는 이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사십 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화자는 전직 공무원으로 지금은 골방에 처박혀 누구 하나 들어줄 것 같지 않은 ‘지하인간’의 철학을 읊조린다. 그 언어 속엔 인간과 세상과 삶에 관한 어떠한 희망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왔기에 그는 그토록 절망의 고치에 틀어박혀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제2부 ‘진눈깨비 때문에’는 시곗바늘을 되돌린다. 1부로부터 20년 전 주인공이 현직 공무원이고 또 20대였던 시절의 이야기로 시간 역순의 구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에도 지독한 외톨이였던 주인공은 어느 날 한 사건에 엮이게 된다.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하게 된 그(심지어 누구도 그를 초대한 사람이 없었다!). 한 친구의 환송회 자리는 술과 이야기로 무르익어 가는데, 이들을 속물이라 여기는 주인공은 한쪽 구석에서 술만 축낸다. 경멸의 눈초리는 끊임없이 친구들을 향한다. 그러다가 결국 주인공은 악담을 퍼붓게 되고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동창들은 그를 놔두고 서둘러 술자리를 피한다. 동창들을 뒤쫓던 그는 어느 유흥가에서 ‘리자’라는 스무 살의 창녀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둘은 긴 대화를 나눈다. 며칠 후 주인공의 집에 찾아와 호감을 표시하는 리자. 그녀는 어쩌면 이 외톨이 주인공에게 구원의 여인이 되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심하게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우리의 ‘지하인간’은 리자를 받아주지 못하고, 결국 여자는 떠난다. 그렇게 주인공은 다시 외톨이로 남는다.
인생의 나락, 절망의 손끝에서 써 내려간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세기> 창간호와 2호(1864년 3월, 4월)에 순차적으로 실려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는 곧 세계적 대문호로 추앙받게 될 도스또예프스끼가 훗날 자신의 대작들 속에 페르소나로 등장시킬 복잡다단한 인물들의 한 전형, 즉 ‘지하인간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울러 수많은 러시아문학 전공자들이 이 작품을 도스또예프스끼 5대 걸작(<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서설’이라 칭하는 이유일 것이다.
비극은 끝날 수 있을까?
<지하로부터의 수기> 공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 마리야 드미뜨리예브나가 세상을 떴다. 1864년 4월의 일이었다. 애통함에 젖은 도스또예프스끼의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해 7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형 미하일마저 세상을 등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늘이 무너질 듯한 절망감. 비극의 수렁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던 도스또예프스끼의 지옥 같은 한 시절.
‘이제 나의 뒤뚱거리는 인생 항로는 어디로 향하게 될 것인가!’
허나 쥐구멍에도 볕 뜰 날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나락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지하인간’ 도스또예프스끼를 향해 달려오는 하나의 인연이 있었으니, 훗날 소위 5대 걸작을 탄생시키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될 한 여인이 그의 인생 반경의 언저리에 서서히 진입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