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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 | 연재 [임안자의 꿈꾸는 인생]
스위스에서 50년, 스위스에서 산다는 것 (19)
우리들의 신혼살림
임안자 영화평론가(2021-07-09 10:22:17)

우리들의 신혼살림

임안자 영화평론가


앞에서 말했듯이 페터와 나는 에멘탈 지역의 시골 랑나우에서 결혼을 했다. 우리는 칸짜리 아파트에서 단촐한 신혼살림을 차리고 2년을 그곳에서 살았는데 생전 처음으로 집같이 느껴졌던 아늑한 공간이었다. 나는 전주 예수간호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어머니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머니도 나도 정이 없는 둘째 의붓오빠 가족에 얹혀살았던 지라 항상 남의 집에서 사는 같았다. 이후에도 전주에서부터 랑나우에 정착하기까지 내내 기숙사에서만 살아서 포근한 집이 그리웠었다. 그래서 랑나우의 셋방을 신혼부부의 아기자기한 보금자리로 만들려고 아파트 구석구석을 예쁘게 가다듬고 꾸미느라 꽤나 애를 썼다. 처음으로 해보는 일이라서 모든 서툴렀지만 그런대로 결과에 흐뭇했고 자랑스러웠다. 


결혼하기 전에 우리는 거의 4 가까이 사귀었으나 실지로 같이 지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하필이면 처음 만나는 페터가 자신을 가리켜 마르크시스트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그의 좌파 정치성이 겁나서 그날로 헤어졌다. 그러다 1 뒤에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와 다시 만났다. 하지만 우리는 프리브룩과 바젤에서 따로따로 떨어져 살아서 서로 알지 못한 부부가 됐다. 그런데다 대부분 국제결혼이 그렇듯 우리 역시 생활 습관과 문화의 전통이 서로 다르다 보니 신혼살림 초기에는 아닌 아니라 일상의 먹거리에서 문화적 기호까지 이런저런 차이점들이 제법 드러났다. 그리고 말의 표현과 이해의 차이로 상대방의 의도와는 달리 오해를 하여 더러 말다툼도 했다. 대개는 설익은 독일어 때문이었다. 결혼할 무렵에 독어 수준은 일상적인 대화는 그런대로 통했지만 정치 사회 문학을 토론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그렇다고 말다툼이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둘이 따지고 캐묻는 성격이 아니라서 혹시 화가 나고 속상해도 어지간한 문제는 말로써 처리했다. 그럼에도 토론 중에 독일어 부족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을 없을 때엔 모국어를 없는 처지가 답답하고 억울(?)하여 멍청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페터는 도무지 슬픈 것을 견디지 못했다. 혹시 내가 울거나 슬퍼하면 그는 금방 울상이 되어가지고 어떻게든지 서러움을 풀려고 무진 애를 쓰곤 했는데 나를 웃기려고 힘쓰는 그의 딱한 모습을 마주하다 보면 울분은 제풀에 가라앉았다.    



한국의 어느 친구는 장난삼아 우리를김치 아내, 치즈 남편이라고 이름 지어 줬는데 우리가 결혼 초에 겪은 음식 맛에 대한 경험은 그와 조금 달랐다. 랑나우는 한국에도 알려진에멘탈 치즈 주요 생산지다. 그러나 나는 치즈의 구린 맛이 역겨워 처음엔 입에 대지도 않았다. 페터 역시 김치는 처음부터 매워도 먹었으나 생선조림과 된장찌개는 비리고 구린 냄새 때문에 질색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고, 일이 년이 지나 나는 에멘탈 치즈보다 구린내가 심한 치즈들을 먹을 있었고 특히 퐁듀와 라클렛 (Fondue, Raclette) 구린 맛을 좋아했다. 그건 페터도 마찬가지로 생선요리와 된장찌개 냄새에 생각보다 빨리 익숙해졌다. 뒤로 그는 한국음식이라면 개고기와 삼계탕을 빼놓고는 모두 먹었으며 그에서 발짝 나아가 한국 음식의 독특한 맛과 다양함을 은근히 즐기고 자랑스러워했다. 생선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가 결혼할 때만도 스위스, 특히 독어권 지역 사람들은 생선요리를 비린 냄새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바다가 없는 스위스에서 바닷물고기는 모두 수입품이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산골의 강물에서 자라는 숭어 또는 호수에서 잡히는 대여섯 종류의 민물고기가 대부분이었는데 냄새도 그렇지만 가격도 비교적 비싼 편이어서 생선 요리는 대체로 일반대중 보다는 소수가 즐기는 음식으로 여겨졌었다. 


문화적 취향에서 페터와 나는 많이 달랐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줄곧 문학 쪽에 마음을 기울였다. 그와 달리 페터는 음악을 아주 좋아했다. 그는 어릴 시절부터 집에서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커서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 괴티를 따라 음악회에 자주 다녔다. 그리하여 서구의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음악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을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떨어질 없을 정도로 음악을 무한히 좋아했다. 음악에 한해서 나는 초보에 불과했지만 지식이 풍부한 음악 애호가인 남편 곁에서 귀동냥을 하고 연주회에 자주 참여하면서 페터의 음악 세계와 발맞추려 했다. 페터는 재즈에도 아주 열광적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재즈에 몰입되어 재즈의 팬이 되었으며 뉴올리언스 스타일 재즈의 리듬을 타고 우리는 한마음으로 뭉쳐 연인이 되었다. 


음악 이야기가 나온 김에 윤이상 작곡가(1917-1995) 관련된 이야기를 여기에 덧붙인다. 페터는 한국 음악에 호기심이 많았지만 직접 들을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1967년에 윤이상 작곡가의동백림 사건 스위스에 알려지면서 그는 작곡가의 고난스러운 삶과 그의 음악에 마음이 끌려 70년대 초부터 음반을 모았다. 시절 바젤은 윤이상 작곡가와 인연이 깊었다. 국제적 명성의 오보이스트이며 작곡가인 하인즈 홀리거(Heinz Holiger,1939-) 바이올리니스트 한스하인즈 쉬네베르그(Hansheinz Schneeberger,1926-1919) 바젤 출신으로 윤이상 작곡가와 친한 친구 사이었으며 또한 윤이상 음악의 대가들이었다. 윤이상은 특히 하인즈 홀리거와 그의 아내이며 하프 연주가인 우슬라 홀리거에 몇몇 작품을 헌정할 만큼 가깝게 지냈다. 밖에도 윤이상의 마지막 작품인 현악사중주 6번은 바젤에서 태어났다. 위의 작품은바젤 실내악협회에서 현대음악으로 새로이 떠오르는 바젤의 아마티 현악사중주단(Amati Quartett)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윤이상 작곡가에게 특별히 작품을 위탁함으로 거둔 성과물로서, 1992 7 4일에바젤시의 음악당 카지노”(Stadt Casino)에서 아마티 현악사중주단의 연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여기서 말머리를 바꾸자면, 아마티 사중주단은 세계 초연을 나흘 앞두고 마지막 공연 연습을 바젤 우리 집에서 했다. 원래는 베를린에서 계획이었으나 작곡가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아마티 사중주단의 대표이며 바이올리니스트인 빌리 짐머만이 우리에게 급하게 도움을 청해서 이뤄졌다. 우리와 친한 짐머만은 페터가 윤이상 음악에 관심이 많은데다가 옛날에 우리 집에서 열린 가정음악회에 그가 두어 참석한 있어 실내 구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을 꼽았던 것이다. 작곡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망설이다가 남편이 내과전문의라는 말에 안심하고 우리 집에 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페터는 그의 방문 소식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짧은 시간에 가족과 친구 음악 전문가 20명을 음악회에 초청하고 고급 포도주를 특별히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한국 친구 명의 도움으로 열성껏 김밥, 잡채, 호박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행사 전날에 짐머만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윤이상이 바젤로 떠나려던 아침에 어느 교포가 한국 정부에 고자질을 하여 그가 동백림 사건에 또다시 휘말리게 됐으며 그로 인한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바젤에서 멀지 않은 독일의 쉬발즈발드 병원(Schwarzwald Spital) 응급환자로 입원했다 너무도 참담한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집에서의 공연 연습은 서글프고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가까스로 끝마쳤다. 그리고 윤이상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이 처음으로 빛을 발하는 바젤 공연에 참여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병원에서 외롭게 앓아누워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베를린의 고자질 사건은 증거가 없는 거짓말로 밝혀진 뒤에 흐지부지됐다.   

                                                                   8월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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