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그래프 속 꾸준히 그려내는 가치
글 임주아 객원기자
2018년부터 전주 서신동에 작가 레지던시를 운영하며 신진작가 발굴과 미디어 전시 기획에 나서고 있는 ‘디자인에보’는 김현정·박세진 대표가 전주에 세운 디자인 회사로 시작해 올해 설립 11주년을 맞았다.
친구가 운영하던 학원 5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아이 젖병을 물려가며 어렵지만 치열하게 시작한 사업. 서울 직장 생활을 접고 고향 전주에서 디자인으로 자영업하며 먹고 살기란 쉽지 않았다. 잘못된 관행과 시스템 아래 시간과 노력을 갉아 먹힐 수밖에 없는 것이 디자인 판의 현실이어서다. 턱없이 적은 금액으로 견적을 요구하는 업체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고, 무리하게 시안을 요구하는 기관 담당자에게 “선(先) 시안 작업은 디자이너 생태계를 망치는 길”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다 관계가 틀어지기도 했다.
“싫은 소리해도 안 망하고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한 것 같다”는 두 사람은 우여곡절 그래프를 그리면서도 좋은 사람들의 도움과 디자인 실력으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환경도 점점 나아졌다. 2010년 좁은 첫 사무실에서 인후동 23평 사무실을 거쳐 2015년 팔복동 45평 공간으로 회사 자리를 옮기게 됐다. 여러 사람이 공간을 따로 또 같이 쓰는 ‘코워킹 스페이스’ 방식으로 작업 공간을 갖기 어려운 창작자들에게 무상으로 공간을 빌려주고 몫을 나누고 싶었다. 박세진 대표는 “누구나 자기 책상을 갖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으로, 창작자들끼리 우연한 협업도 이뤄지면서 좋은 시너지가 날 거라 기대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어요. 쥐뿔도 없는 사람들이 남 생각한다고 너네나 잘하라는 말을 들었죠.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느끼는 바도 많았어요. 문제는 그때부터 김현정 대표가 건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거죠.(웃음)”
편견과 의심, 넘어서는 시간
어떻게든 형편에 맞는 건물을 알아보자고 부동산을 찾아갔는데 시세에 비해 저렴한 교회 건물을 운 좋게 만날 수 있었다. 서신동 구시가지 골목에 버려져 있는 듯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라 좀처럼 팔리지 않는 매물이었으나 두 사람 눈에는 남다르게 빛나 보였다.
그렇게 은행과 친구를 맺고 한 달 벌어 공사하고, 모자라면 대출 받아 공사하길 반복하다 10개월 만에 새 보금자리를 갖게 됐다. 서신동 구시가지 골목, 거친 모서리라는 뜻의 ‘러프엣지’라는 간판을 걸고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박 대표는 대학에서 영상을, 김 대표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해 마음속에 늘 예술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공간이 주어진다면 신진 작가를 발굴해 전시를 기획하고 싶어 했다.
특히 레지던시에서는 적극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던 ‘미디어아트’ 장르에 무게추를 두고 싶었다. 미디어 하면 단순하게 영상 매체만 떠올리지만, 요즘 미디어아트는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며 어떤 장르보다 경계가 자유롭다. 3D 프린팅부터 설치미술, VR, AR 기술까지 포함되고 있다. 그렇게 천천히 쌓아오던 것들의 신호가 켜질까. 2018년 미디어 전문 레지던시라는 슬로건을 건 디자인에보는 전북문화관광재단 창작공간활성화사업에 처음 도전해 지원금을 받게 된다. 당시 심사위원들에게 “디자인 회사가 무슨 레지던시냐”, “수익사업 할 생각이냐”하는 따가운 눈총도 심하게 받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 돈이 더 들어간다고 받아치고, 수익구조가 따로 있다고 자신감 있게 설득했다.
우려 반, 희망 반으로 선정된 만큼 결과로 보여주자고 생각했다는 디자인에보는 첫 입주작가 공고를 내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미디어 레지던시인만큼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싶어 도내 최초로 화상 면접으로 신진작가 3명(송지연·유민석·이지연)을 뽑았다. 코로나 시대인 지금은 화상 면접이 익숙하지만 이전에는 전혀 없던 방식이었다. 비평가 매칭, 작가와의 만남, 지역 소통 프로그램 등도 차질 없이 진행해나갔다.
초기 레지던시는 서점을 겸한 커뮤니티 공간(1층), 입주 공간(2층), 부부의 집(3층), 그리고 바람이 통하는 지하 1층에 전시장이 있는 구조였는데, 박 대표가 어릴 적 살았던 팔복동 옛집을 쓸 수 있게 돼 전시 공간을 그쪽으로 과감히 옮기기로 했다. 이름은 주소를 그대로 따서 ‘팔복오길’이라 지었다. 팔복동 옛집이 작가들의 갤러리가 된 셈이다. 2019년 이곳에서 연 ‘팔복동 동네의 오래된 집이 작품이 된다’ 전시는 참여작가와 팔복동 거주민들이 함께하며 공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였다. 지난해 이곳에서 40대 입주작가들이 바라본 40년 된 팔복오길에 관한 전시를 이어가기도 했다.
새로운 동력, 계속되는 이야기
어느덧 4년 연속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있는 김현정·박세진 대표는 작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올해 3명의 예술가와 손잡고 ‘크루디에보(crewDevo)’ 그룹을 결성하면서 함께할 면면이 뚜렷해졌다. 레지던시 전시기획을 더 탄탄히 만들고, 예술가들과 창작활동을 꾸준히 열어가기 위한 그룹이지만, 궁극적으로 예술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만들었다. 크루디에보는 입주작가였던 설치미술가 이현지를 중심으로 재즈피아니스트 김성수, 비보이 정승우와 함께 다양한 큐레이팅과 그룹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레지던시도 아트페어에 나가 홍보하고, 작가들 작품이 팔릴 수 있도록 열심히 뛰어야죠.”
디자인에보는 언제까지 도내에 갇혀 있을 수 없다는 문제의식으로 2019년 서울의 조그만 갤러리의 후원을 받아 전시를 열었는데, 그것이 기회가 되어 지난해 코엑스에서 열리는 ‘어반아트페어’에 출전하게 됐다. 어반아트페어는 예술과 스트리트 문화를 기반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로 진행되는 아트페어다. 지난해 이곳에서 김성수 재즈피아니스트의 자전적 이야기를 녹여낸 ‘재즈맨’라는 미디어 아트 작품과 피아노 연주를 선보여 뜨거운 호응을 받은 덕분에 올해 열리는 자리에서도 기대 이상으로 부스를 지원받게 됐다.
앞으로 디자인에보는 지난 6월 새로운 입주작가 3인(김지수·송세희·장수지)을 선정했다. 코로나 상황이 계속되는 만큼 올해는 전북 지역 거주 작가들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전주 완산구 서신동과 덕진구 팔복동을 오가며 8개월간 창작활동을 이어갈 작가들은 창작지원금(월 50만원)과 생활공간, 전시 활동, 평론가 매칭 등을 지원받는다.
디자인에보의 지속가능성은 우여곡절에도 지지않는 꾸준함에 있다. 디자인회사를 시작할 때부터 ‘브랜딩’으로 실력을 쌓은 만큼, 레지던시도 그룹도 좋은 창작 활동으로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특히 어떻게 외연을 확장할 것인지 탐색과 실행을 반복하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어느 부분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주변의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힘으로 공간을 만들고, 지역이라는 기반을 애정하되 안주하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펼치는 디자인에보의 열기를 가만히 응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