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주부의 시간
글 임안자 영화평론가
랑나우의 병원에서 남편이 외과 조수로 일하는 동안 나는 같은 병원의 산부인과와 외과 병동에서 간호사로 일 년 넘게 일을 하다가 임신 4개월이 되면서 병원을 그만뒀다. 임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전부터 쌓인 피곤이 심하여 좀 쉬고 싶어서였다. 나는 결혼 전에 스스로 돈을 벌어서 신문학을 공부하느라 휴가도 없이 3~4년을 내리 시간에 쫓기며 살았다. 결혼 뒤에 베니스에서 보낸 일주일 신혼여행은 그나마 내가 스위스에 온 뒤 처음으로 가질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휴가였다. 그러다 직장을 그만두었더니 시간이 부쩍 늘고 여유로워서 마음이 한결 가뿐했다. 남편이 출근을 하면 나는 신문을 읽든가 새로운 요리법을 배우든가 또는 날이 좋으면 집 옆의 숲속을 산보하며 마음 내키는 대로 느릿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식품을 사려고 베른(Bern)에 갔다가 한 책방에서 우연히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라는 책에 눈이 쏠렸다. 전혀 모르는 작가였으나 호기심이 당겨 책을 샀는데 단숨에 읽었을 정도로 그에 매료됐다. 마르케스 작가의 대작을 읽은 뒤에 나는 잇따라 알레호 카르펜터(쿠바), 카를로스 후엔테스(멕시코), 마리오 바르가스 리오사(페루) 아르헨티나의 줄리오 코르타자(아르헨티나)의 독어판 소설을 그치지 않고 읽었다. 오랜만의 독서 삼매경이었다. 나는 새로 발견한 남미 문학에 완전히 빠져 꼼짝 않고 책하고만 한 달을 보냈다. 그러고 났더니 지쳐있던 심신이 거뜬해지고 새로이 힘이 솟아 귀찮게 여겼던 집안일에 다시 의욕이 생겼다.
결혼 초기에는 사실 남편이 나보다 살림살이에 더 신경을 썼다. 그는 학생 시절에 젊은이들과 공동체로 살아서 청소와 부엌일에 익숙했다. 요리와 설거지는 물론 (세탁기) 빨래와 다림질도 잘했고 때로는 내 신발까지 닦아주었다. 그 시대에 스위스 남편들은 내 여자친구들만 보더라도 요리나 설거지는 잘 도와주었지만 빨래와 다림질에는 손대지 않았다. 그래서 페터에게 ‘본보기 남편’이라고 내가 우쭐하면 그는 그저 ‘당연한 것 아니냐, 가정일은 부부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한다’라며 멋쩍어했다. 하지만 그 시절 병원의 형편은 그가 맘먹은 것처럼 녹록하지 않았다. 첫째 인턴으로서 근무 시간이 다른 직업에 비해 훨씬 길었다. 그에다 자주 돌아오는 응급환자 당번 때문에 밤과 주말에도 자주 병원에 불려가곤 했는데 그처럼 일에 몰리다 보니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틈이 별로 없었다. 결국 집안 살림은 임신으로 집에서 쉬는 내가 주로 맡아 했고 페터는 시간이 나면 집 안 청소와 장보기 등 나에게 힘든 일을 도왔다.
랑나우 병원을 그만두면서 나의 경제적 자립은 끝났다. 1962년부터 1976년까지 나는 간호사 월급으로 살았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 건 내가 결정했다. 하지만 퇴직과 함께 남편의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 갑자기 남편의 돈을 쓰려니까 처음엔 어쩐지 망설여지고 불편스러웠다. 랑나우 병원에서 나는 2천 프랑 그리고 남편은 2천 5백 프랑 정도의 월급을 받았다. 내 퇴직으로 우리의 수입이 거의 반절로 줄어들었지만 남편은 자신의 월급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고 실지로 그랬다.
그런데 돈 쓰는 방식에서 우리는 똑같지 않았다. 나는 물건을 살 때에 질과 수명보다는 먼저 물건이 마음에 드느냐가 중요했고 평소에 그렇게 사치스럽진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돈이 좀 더 들더라도 고급스러운 옷과 실내 장식품을 사들였다. 하지만 남편은 무엇을 사든 먼저 값을 보았고 될 수 있으면 싼 것을 골라 샀는데 그렇다고 나한테까지 돈을 아껴 쓰라고 강요하거나 간섭하지는 않았다. 사실 남편이 그처럼 끈질지게 소박한 삶을 고집하는 데는 검소함을 강조하는 스위스 사회의 영향도 없다고 볼 수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돈을 헤프게 마구 쓰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는 그의 굳은 결심이 한몫했다. 그는 자신에겐 지독한 깍쟁이였지만 그러면서도 빠짐없이 일 년 수입에서 일정액은 사회 복지 정책을 위해 꾸준히 지원했으며 한국의 어머니, 오빠, 오빠의 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서슴치 않고 여러 번 도와주기도 했다.
흔히들 스위스 사람들을 가리켜 실용적이고 검소하다고 평하며 그건 ‘칼빈주의(독어 Calvinismus)에서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칼빈주의는 16세기 스위스 기독교의 종교개혁자로 제네바 출생인 요한네스 칼빈(Johannes calvin, 1509-1564)이 역설한 “금욕주의”를 뜻하며 교훈의 핵심은 “열심히 일하고 즐거움과 사치를 거부하라”로 해석되고 있다. 그 면에서 남편의 가족은 할아버지 세대부터 기독교 종교에 등을 돌렸기 때문에 칼비니즘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오래지만 남편의 친구들 사생활을 보면 요즘엔 드물지만 금욕주의 전통의 흔적을 얼마만큼 감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페터의 고등학교 친구 하나는 바젤의 이름난 건축회사 집안에서 태어난 건축전문가이며 부인은 취리히 상류층의 정치가 집안의 딸로 직업은 의사다. 그들은 부호층에 속하지만 절대로 돈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그 대신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조직체를 위해선 거침없이 거액을 후원한다. 그리고 최근 기후 변화 문제가 언론에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자동차를 아예 없애고 대중교통을 쓰고 있으며 여행은 비행기보다는 되도록 기차나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는데, 그들의 시민으로서의 과감한 용기와 철저히 검소한 삶에 머리가 숙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아쉬운 점은 그들의 집에 초대되면 음식이 항상 너무 허술해서 속이 언짢다. 그들의 금욕적인 일상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친구를 초청하면 정성껏 대접하는 한국의 풍속과 너무 달라서 처음에는 너무 정떨어져 말문이 막혔다. 아마도 그들은 음식보다는 친구와의 만남에 더 무게를 뒀겠지만 친구를 위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는 즐거움과 정성을 그들은 모르는 듯해서 아쉬웠다. 음식 때문에 그렇다고 오랜 우정을 버릴 수는 없는 터 우리는그들과 여전히 가깝게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