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27일 그리고 ‘노름꾼’
글 이휘현 KBS전주 PD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속기 일을 한 번 맡아보지 않겠어요?
누군가 급하게 속기사를 구하고 있는데 어쩌면 당신이 적임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뻬쩨르부르그의 한 속기학교 선생 D.M.올힌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수강생 안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좋지요.”
1866년 10월 3일 저녁 7시경 오간 이 짧은 대화가 훗날 세계문학사의 운명을 바꿀 한 순간으로
기록되리라는 것을 이들은 짐작이나 했을까?
“예전부터 일을 한번 맡아서 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걱정이 좀 되네요.
맡은 일을 제가 제대로 처리할 수 있을 만큼의 속기술이 있는지는 솔직히 저 자신도 의문이 들거든요.”
올힌은 안나에게 걱정 말라고 다독였다. 한 달 정도면 끝날 일이고, 작가가 구술하는 걸 잘 받아 적기만 하면 되는 거라며 안심시켰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음 날 아침 찾아갈 곳의 주소를 알려주었다. 결국 일을 맡아서 해보기로 맘을 굳힌 안나는 노트에 의뢰인의 이름을 받아 적기 시작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
27일 만에 완성한 소설
1866년은 도스또예프스끼 인생에서 ‘경이의 해’로 기록되고 있다. 그를 러시아 대문호 자리로 격상시킨 <죄와 벌>이 바로 이 해에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 탄생 하나만으로 그의 복잡다단한 인생에 볕이 들었다고 단정하기는 이르다.
<죄와 벌>의 집필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의 사건(?)이 바로 이 시기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에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스무 살 여성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와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결혼.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문학은 이 ‘세기적 만남’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1866년 가을 무렵 도스또예프스끼의 삶은 막장에 다다른 상태였다. <죄와 벌>이 평단과 대중에 골고루 호평을 받으며 연재되고 있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져 갔기 때문이다. 매일 빚쟁이들에게 시달렸고 부양해야 할 가족은 넘쳐났다. 하지만 누구 다른 이를 탓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잡지 <세기Epokha>의 사업 실패도, 유럽에서 벌인 도박판도 모두 그의 판단과 행동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빚은 빚을 낳았고, 그렇게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앞으로 쓸 소설들의 권리를 몇몇 출판업자들에게 미리 넘기곤 했다.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도스또예프스끼의 집을 찾아가던 날 아침도 그는 한 빚쟁이에게 약속한 작품 완성 기일을 채 한 달도 남겨놓지 못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만약 약속한 날짜 안에 소설 하나를 완성해내지 못한다면 향후 9년간 그가 써 내려갈 모든 소설의 권리는 그 빚쟁이 출판업자에게 넘어갈 판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속기사를 급하게 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집에 도착한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는 간단한 면접 후 속기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작가는 횡설수설하며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 별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그녀의 이름을 되묻고는 했다. “잠깐만!! 아가씨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이 소설가 양반은 제정신이 아닌 게 확실해…’
안나는 도스또예프스끼를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일단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보자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정말 소설을 한 달 안에 완성할 수 있을까? 이러다가 속기 비용도 못 받아내는 거 아냐?’
소설은 27일 만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작품의 제목은 이렇게 정해졌다.
‘노름꾼’
‘노름꾼’ 이야기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가난한 러시아 청년이다. 그는 퇴역한 장군이자 몰락 귀족인 자고랸스끼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몇 년간 일해오고 있다. 한편 홀아비 신세인 자고랸스끼에게는 수양딸이자 젊고 아름다운 뽈리나가 큰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그녀는 우리의 주인공 알렉세이의 연모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렉세이를 향한 뽈리나의 반응은 냉담하다. 더군다나 그녀 주변에는 돈 많은 프랑스 후작과 영국 신사가 각각 한 명씩 포진해 있다. 스펙 좋은 연적들 사이에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알렉세이의 마음은 애가 탈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자고랸스끼 장군 가족 일행은 현재 러시아를 떠나 유럽의 한 도시 룰레텐부르크에 머물고 있다. 큰 룰렛 도박장들이 자리한 이곳에서 자고랸스끼는 매번 돈을 잃으면서도 도박판 주위를 매일 기웃거린다. 그가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유는 젊은 프랑스 여인 블랑슈와 결혼하기 위해서다. 사치와 방탕을 일삼는 속물 블랑슈의 마음을 얻으려면 가난한 귀족 자고랸스끼가 아니라 ‘부자 자고랸스끼’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가운데 점점 수중의 돈이 떨어져 가는 자고랸스끼가 오매불망 기다리는 소식이 하나 있다. 가까운 친척 아주머니이자 모스끄바에서 큰 부자로 살고 있는 안또니다 여사의 부고가 바로 그것이다. 일흔다섯 살의 안또니다 여사는 돈이 많지만 재산을 물려줄 가족이 없다. 따라서 그녀의 사후 상속인은 가장 가까운 친척인 자고랸스끼로 낙찰될 가능성이 크다.
허나 얼마 후 룰레텐베르크에 도착한 것은 안또니다 여사의 부고가 아니었다. 대신 그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다. 기세등등한 안또니다 여사는 자신의 조카인 자고랸스끼 장군이 한심하기만 하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길래 그 바보 같은 녀석이 이따위 도박에 인생을 허비하고 있단 말인가!’
안또니다 여사는 룰렛 도박장을 직접 찾아가 본다. 이 한심한 작태를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호기심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규칙도 모르는 안또니다 여사는 룰렛 도박판에 무모하게 끼어든다. 그리고 돈을 거는 족족 딴다. 그것도 꽤 많은 돈을 딴다!
“봐라, 봐! 도박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아니면 그냥 때려치우던가!!”
승리에 도취한 안또니다 여사는 다시 도박장을 찾지만 이후 룰렛은 더 이상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처음에 딴 돈은 다시 도박판으로 흘러가고, 안또니다 여사가 원래 가지고 있던 돈과 재물마저 뭉텅뭉텅 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오로지 친척 아주머니의 유산만 바라보며 살아온 퇴역 장군 자고랸스끼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 갈 수밖에.
‘이러다가 땡전 한 푼도 상속받지 못하겠어!’
발을 동동 구르는 자고랸스끼를 외면한 채 안또니다 여사는 도박장에서 가진 재산을 몽땅 털리고 만다. 그 후 모스끄바로 힘없이 발길을 돌리는 그녀. 자고랸스끼의 앞날은 갑작스레 암울해지고, 연인 행세를 하던 속물 블랑슈마저 그의 품을 떠난다.
우리의 주인공 알렉세이는 룰레텐부르크에서의 이 파국을 모두 목격한다. 그 후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들. 사랑하는 여인 뽈리나마저 떠나고 없는 그곳에서 그는 우연히 쥐게 된 돈 몇 푼을 들고 도박장으로 향한다. 그날 알렉세이는 어마어마한 돈을 딴다. 쉽게 굴러온 돈이 쉽게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안또니다 여사 곁에서 똑똑히 목격한 바 있는 알렉세이.
불룩해진 주머니를 감추고 도망치듯 도박장을 빠져나온 그는 프랑스 파리로 도피한다. 그의 곁에는 한때 자고랸스끼 장군의 연인이었던 블랑슈가 자리하고 있다. 돈 냄새를 맡은 속물이 그를 가만 놔둘 리 만무한 일!
하지만 사치와 향락의 몇 주가 지나자 수중의 돈은 금세 바닥나고 만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곁을 떠나는 블랑슈. 결국 부랑자 신세가 되고 만 알렉세이.
그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영국 신사 미스터 에이슬리를 만난다. 한때 연적으로 생각했던 미스터 에이슬리는 알렉세이에게 진실 하나를 털어놓는다. 자고랸스끼 장군의 수양딸, 그러니까 알렉세이가 그토록 열렬히 사모했던 처녀 뽈리나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남자는 바로 알렉세이였다고.
뽈리나가 숨기고 있던 감정의 실체는 이렇게 여과 없이 드러났으나, 이제 알렉세이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그는 이미 타락해 버린 것이다! 미스터 에이슬리는 알렉세이에게 돈 몇 푼을 쥐어주고 길을 나선다. 절망의 끝자락에 선 주인공 알렉세이. 비루한 행색의 그가 동전 몇 개를 움켜쥐고 향하는 곳은 과연 어딜까.
안나와의 결혼, 그리고 ‘노름꾼’의 가치
이미 이야기했듯 도스또예프스끼는 소설 <노름꾼>을 27일 만에 완성해 빚쟁이 출판업자에게 넘겼다. 그사이 사랑도 완성되었다. 소설 탈고 후 속기사로 고용했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에게 도스또예프스끼가 청혼을 한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한 후 한 달하고도 5일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1866년 10월3일 처음 만나 11월 8일 청혼했다).
안나는 이 청혼을 받아들였다. 이듬해인 1867년 2월 15일, 드디어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스무 살 처녀와 마흔 다섯 살 중늙은이의 운명적인 만남 그리고 결혼.
이 우연과 필연이라는 씨줄과 날줄은 훗날 도스또예프스끼의 후반기 대작 탄생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으니, 과연 안나 그리고리예브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세계적인 대문호로 추앙받을 수 있었을까? 어쨌거나 결혼 후 죽을 때까지 14년간 도스또예프스끼는 안나의 현명한 조력 덕분에 <백치> <악령> <미성년>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을 줄줄이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소설 <노름꾼>은 작품 내적인 것보다 이러한 외적인 이슈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사실 이런 ‘세기의 사랑’ 스캔들에 묻혀 <노름꾼>의 진가가 묻혀버리는 건 좀 안타까운 일이다.
<노름꾼>은 도스또예프스끼 중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데다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자전적인 색채가 가장 짙게 밴 소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소설 속 알렉세이가 사랑했던 처녀 뽈리나와 속물 블랑슈는 도스또예프스끼와 두 차례나 유럽 여행을 통해 도박판을 기웃거린 그 문제의 연인 수슬로바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 한때 작가의 마음을 애태우게 했던 그녀의 빛이 뽈리나라면 어둠이 블랑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세이는 당연하게도 도스또예프스끼의 분신일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 소설이 가진 미덕은 잘 읽힌다는 가독성에 있지 않을까(특히 안또니다 여사의 도박판 에피소드를 보라!). 도박에 관한 인간 심리를 이렇게 스펙터클하게 묘사한 책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얼마나 될까 싶다.
그 자신이 깊이 빠져있던 이 도박이라는 치명적인 중독을, 소설이라는 거울을 통해 반추해 낸 도스또예프스끼. 어쩌면 우리는 소설을 구술하던 당시 도스또예프스끼의 내면뿐만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인류를 탐욕과 비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어온 ‘도박’이라는 그 무서운 놀이를 이 작품 <노름꾼>을 통해 꽤 진지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