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내 선생님!
이 더위에, 불가마 옆에 계시는 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어떻게 견디십니까? 진안은 고원이라 조금 다를까요? 저는 올 여름이 땀을 가장 많이 흘린 해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몸무게가 3kg이나 줄었으니까요. 지난번 편지에서 말씀드렸듯이 친구의 죽음으로 멈춰야 했던 여행을 2주 후에 다시 이어갔는데 7월 9일 날 집을 나섰다가 20일 날 밤늦게 돌아왔습니다.
저번까지 열 하룻동안 울산에서 고성읍까지 약 570km를 걸었더군요. 돌아오면 여행이고 돌아오지 않으면 방황이라고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그 중간이 방랑인 것은 맞는 말이겠지만 이번 저의 여정은 고행이라는 말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이번 여정의 목적지인 고성(간성) 통일 전망대를 도로 이정표상으로 꼭 30km 남겨 두고 발톱이 빠져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돌아왔으니까요. 사람들이 묻습디다. 무슨 목적이 있었느냐, 무엇을 위한 거냐, 무엇을 얻었느냐, 그러나 아무 목적도, 위함도 얻으려 한 것도 없었기에 열하루, 500km를 넘게 걸을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말장난 같지만 위함이 없는 그 위함 때문인 것이지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힘들고 외로운 것은 뼈에 박힙디다. 저는 늘 버릇처럼 외로웁네, 농사짓기 힘이 드네,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돌아보니 그런 건 다 거짓이었고 장난이었고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배낭 무게 기껏 10kg 안팎인 것이 점점 천근의 무게로 어깨를 짓누를 때의 그 중압감과 길을 잃고 첩첩한 산길을 서너 시간씩, 빗속을 한나절씩 걸을 때의 그 외로움이란 것은 진정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을 인간본연의 실존을 생각하게 해주었으니까요. 그때 만났던 조그만 이정표 하나는 어둠 속의 등불이었습니다. 등불의 진정한 의미를 이 나이에 몸으로 체험하다니 우습지 않습니까? 길을 잃고 헤맬수록 걸음은 더 빨라지고 마음은 급해져서 쉬지를 못하니 암자나 제 길을 찾을 때까지는 몇 시간이고 불안 속에 허덕입니다. 사실 불안이라는 것은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돌거나 뒤로 가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만, 그리고 조난의 위험을 빠트릴 수 없는 것이지만, 인생이 그러면서 길을 찾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면 이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결국 이런 과정이 마음수련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동해안 해파랑길’이라고 이름 붙인 자전거 도로를 걸으며 북상하다가 울진 지나 강원도 땅에 접어들었습니다. 걸은 지 한 시간쯤 지나 다시 쉴 곳을 찾는데 마침 길옆에 모정이 하나 있고 할머니 몇 분이 쉬고 계셨지요. 배낭 짊어진 거무튀튀 낯선 사람인 제가 반가운 마음에 “ 좀 쉬어가도 될까요?” 할머니 한 분이 망설임 없이 나서서 “하이고, 저리가요, 여기 못 와요!” 손을 내 젓더군요. 저는 순간 당황하여 마치 죄인처럼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 사죄하고 황급히 물러나왔는데 돌아서 몇 발짝 걸으니 왈칵 서러운 생각이 듭디다. ‘아~ 집없고 끼니 굶는 것의 서러움은 이보다 더 하겠지-’ 그러나 한편 화도 나더이다. ‘할머니 아들이 어디가서 이런 대접 받으면 좋겠어요?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못 주나마 이렇게 야박하게 사람을 내쫒다니 세상에 이런 인심이 어딨단 말이요, 내가 돌림병자요? 거지요?’ 되돌아가서 따질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서라 이게 다 코로나 때문이겠지’ 참고 말았습니다. 갈 길 먼데 왜 이런 것에 마음 뺏겨야 하나 이런 생각으로 위안을 삼았어요.
여정내내 이런 일은 딱 한번 뿐이었고 유쾌하고 고마운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답니다. 슈퍼가 어딨는지 묻는 저에게 무얼 살려고 그러냐고 물었던 사람이 잠깐 기다리라며 자기 집에 달려가 얼음물을 가져다주던 일, 시원한 캔 커피를 건네주던 분, 집에서처럼 밥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 여유를 부리지 못하니 그 또한 고마워서 고개가 저절로 수그려지더군요. 한번은 길가 그늘에서 술을 마시며 쉬시는 제 또래분들로 뵈는 분들이 계셔서 불문곡직 ”염치불구하고 술 한 잔 얻어먹고 갑시다“ 했더니 종이컵 가득가득 서로 술을 따라주고 안주를 집어주는데 한 잔 외에는 거절하느라 즐거운 비명을 속으로 질러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른쪽에 바다를 보면서 걸어도 그 바닷 속 것을 보지 못했는데 그분들이 삶아놓고 자시는 보말고둥은 서해안 것에 비하면 세 곱절은 커서 하나 입에 넣고 우물거리니 꼭 작은 소라 먹는 기분이 났더랬습니다. 그날이 그 마을 앞바다 청소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한 시간을 아무 고통 없이 걸을 수 있었고요.
고통이란 단어를 쓰고 보니 참 여러 가지가 생각납니다. 계획하고 간 열흘 중에 닷새 즉, 반환점을 돌아서니 마음의 고통은 좀 가벼워지는데 대신 발의 고통은 더해 갔습니다. 발가락과 발바닥, 심지어 걸을 때마다 위로 접히는 발가락의 발등부분 까지 부르터서 진물이 흐르는데 이건 한 발 한 발 걷는 그 순간 순간이 고통이라 참으로 견디기 어렵더군요. 몸무게와 배낭의 무게를 오직 발이 고스란히 받아내며 달궈진 도로를 하루 열 네 시간 이상씩 걸으니 발이 피로를 회복하지 못하면서 쌓인 것입니다. 특히 한 50분이나 1시간을 걷고 10분을 쉬기를 반복할 때 벗어두었던 양말과 신발을 다시 신고 배낭매고 일어서 걸을 때의 처음 그 몇 분 동안의 고통이라니- 그래 나중에는 쉬는 것 자체가 두려워서 걸음을 떼면서 쉬기도 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7일째 되는 날 빗속을 네 시간정도 걸었는데 그러고 났더니 부르턴 발의 두꺼운 거죽들이 다 둥둥 떠버려서 여기서 포기해야하나 하는 마음으로 갈등할 때, 그때가 가장 괴롭고 힘이 듭디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은 말이 그렇지 그렇게 쉽게 분리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결국 통일 전망대를 30km 앞에 두고 새끼발톱 하나가 먼저 빠졌습니다. 10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나머지 새끼발톱 하나도 간당간당 해서 언제 빠질지 시간문제고요. 발톱이 빠지니 그제는 정말 한 발자국도 더 못걷겠는, 심리적 마지노선같은 것이 따라서 무너지더군요. 하여 고성(간성)읍에서 버스에 몸을 실을 수밖에 없었어요. 버스에 몸을 싣고 의자에 부리는 순간 인간이 고통 없이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믿겨지지 않습디다. 그리고는 이상하게도 그동안 걸었던 여정들이 아주 아스라하고 까마득하게 잊혀져버리는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차창 밖으로 이제껏 지나왔던 길들이 펼쳐지며 복기하듯 뒤로 뒤로 지나가는데도 그 길을 걸었던 기억이 너무나 안개 속 같은 거예요.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이글을 쓰는 지금도...
까닭
암탉 아홉 마리에
장 닭 두 마리
열 마리를 사면서 장 닭 한 마리는
덤을 얻었다
석 달을 거두자
장 닭 한 마리가 먼저 운다
덩치 크고 색깔 더 붉은 놈이다
제법 멋지게 목을 부려가면서
곡 꼭 끼오오 ~
그놈에게 늘 쪼이기만 하는 덤도
흉내인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피울음인지
구석에서 운다고 우는데
땅에다 고개를 처박고 꾹 꾸국
또 꾹 꾸국
보기 안타깝다
땅에도 숨구멍이 있었는지
닭장 옆 닭의장풀 꽃이 퍼렇게 핀다
*돌아와서 쓴 시입니다.
2021.08.07
박형진드림
모항 박형진 시인께
까닭까닭 관촌 닭집엘 다녀왔습니다.
닭장을 비워야 했습니다. 올 여름까지 열 마리가 남았었는데 닭울음소리가 이웃에게 피해가 되어 닭장을 비워야 했습니다. 암탉 여덟 마리는 딴 집으로 갔는데 수컷이어서 못 따라 간 놈하고 헐벗은 암탉하고 닭집엘 가야했습니다.
닭집 아저씨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다리를 묶어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번에 날개를 묶었다가 피가 안통해서 멍이 든다고, 다리만이 별일 없다고, 다리를 묶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나락푸대에다 그냥 담았더니 다리를 묶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더러 닭집에서 탈출하는 사단이 일어나 난감하다는 거였습니다.
다행히 수탉이 제압되었는데 ‘늙었고만’하시더군요. 제가 아니라고 ‘작년에 부화한 애예요’했더니 그러니까 늙은 거라는 거였습니다. 하기사 요즘 육계농장에서는 한 달도 안 키운다지요. 닭집 아저씨 말씀은 수탉은 사내구실을 하기 직전이 맛있다고, 사내구실을 하기 시작하면 그쪽으로 정기를 뺏겨 맛이 달아난다는, 왠지 뜨끔한 말씀이었습니다. 헐벗은 암탉 순서가 되어서는 수탉이 많았던 거라고, 그래 이 꼴인 거라고,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닭을 키우게 된 것은 아내의 의지였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큰 사람입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장인양반께서 병을 얻었을 때 닭을 키우며 알을 냈던 것이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하여 재작년에 병아리 열네 마리로 정성스럽게 시작을 했습니다. 청계였습니다. 재래종인줄 알았는데 미국에서 왔다고 나중에사 알았습니다. 역시나 자본의 논리인지 미국스럽게 알을 제대로 품지 않더군요. 그래 부화기를 따로 사서 부화를 했습니다. 아내는 달걀을 선물할 수 있다는 것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꿈도 커졌습니다. 저는 조심해야 했습니다. 특히나 달걀을 얻자는 것이니 수탉이 많은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사료만 축내는, 쓸데없는 숫컷들을 처단(?)하라”는 엄명이 내려졌습니다. 살생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넘버원이 매번 우선이었습니다. 그렇게 숙청이 시작되었습니다. 조류독감 때문에 닭집이 문을 닫았을 때는 난감했습니다. 인터넷으로 닭 잡는 법을 검색하여 ‘실험실에서 전수’되었다는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사냥본능]이라고 하고 ‘나는 100%동물이다’ ‘나는 100%동물이다’하면서 사냥본능을 깨워보려 했지만 서툰 짓은 어쩔 수 없어 수탉이나 저나, 수컷들 서로가 고통이었습니다. 그 일은 지난 봄까지였고, 영화 [미나리]에 담긴 ‘수컷들의 비애’에 공감이 되었던지 아내의 아량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일로 아예 닭장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닭국을 제법 끓입니다. 별나게 잘 끓인다고 요리사들도 배우자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오병이어(五餠二漁))처럼 양을 잔뜩 부풀리는 방식인데 맛이 있다고 합니다. 닭뼈로 육수를 내고, 무를 잔뜩 삐져 넣고, 닭고기를 찢어 수를 늘립니다. 하얗게도 끓이고, 고춧가루를 잔뜩 넣어 빨갛게도 끓입니다. 아무튼 시원하다고 합니다. 무조건 시원하게 끓입니다.
저희 동네 수탉들은 해맞이로 우는데
박 선생님네 변산 모항 수탉들은 해넘이로 우는지요.
넘버투 덤이의 건투를 빌며
까닭없는 괜한 이야기
2021.08.11
옹기장이 이현배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