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질과 바느질의 재미
글 임안자 영화평론가
살림살이가 전업이 되면서 내 관심은 자연스레 곧 태어날 애기의 출산 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랑나우 병원에서 제공하는 임신부 체조 연습에 참여함과 동시에 애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마련했다. 욕심 같아서는 남는 시간에 독일어를 더 배우고 영화도 가끔 보고 싶었으나 랑나우에는 그럴만한 문화 시설 공간이 없었다. 실은 영화관이 하나 있긴 했지만 모두 할리우드의 3급 영화 뿐이어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택한 게 뜨개질이었다. 스위스 여인들이 취미로 만드는 세공품 가운데 가장 쉬운 게 뜨개질이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그 시절에는 많은 여인들이 친구와 모이는 자리에서, 기차 안에서, 텔레비전 앞에서 거리낌 없이 뜨개질을 했는데 그게 재미있어 보였다. 나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준 40대의 이웃집 아줌마는 아파트 관리자의 부인으로 그 분야의 선수였다. 처음에 나는 남편과 나를 위해 양말을 떴다. 그러다 손재주가 늘면서 풀오버를 떴는데, 그 시절에 페터는 날씨가 추워지면 습관적으로 빨간색의 낡은 풀오버를 입었다. 알고 보니 대학시절에 여자친구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나는 그게 은근히 샘나고 마음에 걸려 뜨개질 선생의 도움을 받아 가며 어렵게 고급 양털의 밤색 재킷을 떠서 남편에게 생일 선물로 줬다. 남편은 내 속마음을 진즉 알아차린 듯 빙긋빙긋 웃으며 재킷을 입고는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칭찬을 퍼부었는데 그 순간의 그의 표정이 너무도 짓궂어 한참 킥킥거렸다. 뜨개질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또 하나 있다. 1990년대 중반에 스위스 정부의 여장관 루트 드라이후스가 어느 월간지의 여기자와 본인의 집 안방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뜨개질을 하는 장면이다. 사회민주당 출신으로 인기가 상당히 높았던 60세의 여장관은 소박한 옷차림으로 카메라 앞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스위스 사회문제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했는데 그녀의 자유자재한 모습이 믿음직스럽고 멋져 보여 인상적이었다.
뜨개질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나는 바느질에도 마음이 끌렸다. 애기가 태어나기 조금 전까지 나는 랑나우에서 기차로 반 시간쯤 걸리는 베른에서 석 달 동안 바느질 기술을 배웠다. 일주일에 한 번씩 두 시간 걸리는 바느질 실습반에는 사오십 대의 여인 10여 명이 참가했는데 다들 나처럼 가정주부였다. 그들 모두가 베른 지역의 사투리를 쓰고 있어 대화하기가 간단치 않았으나 그럼에도 여인들은 나에게 한국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분위기를 살렸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은 ‘몇 년 전에 남편이 38선 비무장지대에서 스위스 감찰원으로서 3년간 근무한 바 있는데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났다’며 반가워했다. 그녀는 줄곧 내 곁에 앉아 바느질을 도와주면서 만삭의 내 몸 상태를 의식해서 그런지 자신의 두 애들의 출산에 대한 체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사실 베른은 내가 임신하기 전부터 자동차 운전을 배우느라 많이 들렸던 곳이었다. 운전 실습 시간이 끝나면 나는 시내 중심의 성당 근처에 살고 있는 남편의 외사촌 남동생 아파트에서 커피를 마시고 때로는 그의 지도 아래 주변의 좁다란 길목에서 주차 연습을 했다. 그 뒤에 외사촌은 스페인 마드리드로 떠났지만 나는 그때처럼 바느질 실습 시간이 끝나면 베른 중심지를 걸어서 돌아다니고 박물관도 방문했는데 이래저래 바느질 코스는 심심한 랑나우를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산뜻한 나들이가 되어 일석이조였다.
바느질은 뜨개질보다 훨씬 어려웠지만, 바느질을 하면서 나는 자주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옷을 촌스럽다고 투덜대는 내가 일부러 바느질을 배워 애들 옷을 만든다는 게 좀 엉뚱한 짓이었지만 바느질을 통해 나는 어머니에게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고 늦게나마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 정성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때 배운 바느질 솜씨로 나는 어머니가 그랬듯이 나중에까지 옷을 만들어 스스로 입었고 또 딸을 위해서 계절에 맞춰 예쁜 옷가지들을 만들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딸은 엄마가 만든 옷을 싫어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딸이 입던 옷들 중에서 가장 예쁜 원피스 하나와 토기 무늬의 풀오버를 버리지 않고 기념품으로 지금도 옷장에 보관하고 있다. 그런데 2020년 11월에 손녀가 태어났다. 42살에 낳은 딸의 첫애인데 옷장에 간직한 옷들을 손녀에게 주고 싶어서 딸에게 물어봤더니 딸은 ‘그 옷들에 대해 전혀 몰랐다’며 깜짝 놀라며 아주 좋아했다. 나 역시 35여 년 전에 내가 만든 옷을 귀여운 손녀가 입을 수 있어 정말 기쁘다.
첫아이의 출생
1976년 12월 15일에 나는 베른의 인젤 병원에서 첫애를 낳았다. 출산하는 날 남편은 이른 아침에 병원에서 빨리 오라는 전화를 받고 자동차로 달려와 내 곁에서 처음부터 출산 과정을 계속 지켜보며 나를 돌봤다. 이른 새벽에 시작한 진통은 예상했던 대로 무척 힘들었으나 랑나우에서 임신부 체조 연습 시간에 미리 배워둔 호흡조절 방법 덕분에 끝까지 한 번도 소리지르지 않고 아픔을 잘 견뎌 냈다. 그러다 오전 10시쯤 해서 드디어 애기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산부인과 의사가 큰 소리로 ‘건강한 아들’이라고 알려줬는데 그 소리에 우리는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애기의 이름은 카르 현. 카르는 남편이 친할아버지와 카르 마르크스의 이름에서 따왔고 현은 내가 지어줬다. 임신 동안에 우리는 심심찮게 애가 누구를 더 닮았을까 궁금했는데 조산원이 내 가슴에 안겨준 현의 얼굴은 나를 많이 닮았으면서도 신기하게도 아빠처럼 눈이 파랗고 금발 머리였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자 파란 눈과 금발 머리는 짙은 갈색으로 바뀌고 10살 이후에는 점점 남편 얼굴을 닮아갔다. 나는 인젤 병원에서 일주일 동안 산후 치료를 받은 다음에 크리스마스 3일 전에 퇴원했다. 밖에는 그날따라 하루 종일 함박눈이 내려서 우리는 에멘탈 산골의 좁디좁은 눈길을 헤쳐가며 오후 늦게 가까스로 집에 도착했다. 집에 오자 남편은 알뜰히 저녁상을 차리고 현의 출생을 축하하는 뜻에서 그가 미리 탁상 옆에 세워놓은 큼직한 “탄넨바움‘(크리스마스트리)의 가지가지에 빨간 촛불들을 켰다. 저녁 식사를 끝낸 뒤 우리는 촛불의 은은한 빛 속에 고이 잠든 현이 옆에 앉아서 느긋하게 음악을 들으며 30살의 남편과 34살의 내가 어버이가 됐음을 축하하기 위해 샴페인을 터트렸다.
남편은 애기가 출생하면 무급 휴가를 내서라도 한 달 정도는 집에서 쉬면서 나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랑나우 옆의 촌동네 시그나우에서 하나뿐인 일반 내과 개업 의사가 휴가 중에 심장마비로 급사함으로 남편은 랑나우 병원의 부탁으로 죽은 의사의 진찰실에서 5개월 대리 의사로 근무했다. 새 일자리의 작업은 랑나우 병원보다 더 복잡하고 가정 방문이 의외로 많아 아주 힘겨웠다. 그는 지역의 지리를 잘 모르는 채 눈이 쌓인 산골짝에 흩어져 사는 환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느라 이리저리 헤매기가 일쑤였고 때로는 길이 얼어버려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가정 방문을 통해서 에멘탈 지역의 많은 농부들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빈곤에 처해있음을 보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버거웠던 5개월의 대리 근무는 그럭저럭 무사히 끝났고 남편은 다음 직장으로 옮기기 전에 3개월을 쉬기로 마음먹었다. 첫 달에 그는 루체른 병원에서 결핵 전문가로 일하는 이모부(이모 프레니의 남편) 곁에서 무급으로 미생물학을 배웠다. 그는 매일 기차로 한 시간 걸리는 랑나우와 루체른을 통근하면서 몇 시간씩 일하고 저녁에 일찍 돌아와 나를 도와주고 현이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 두 달은 집에 머물면서 새로운 직장을 따라 다시 바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스위스에서 신생아의 아버지에게 주어지는 유급 육아 휴직은 2020년까지 24시간이었다. 그러다 새로운 국민투표에 의해 2021년 1월부터 14일로 길어졌다. 그리고 산모는 100% 직장을 가졌을 경우 14주간이 주어지되 그 기간에 월급은 20%가 줄어든다. 유급 휴직 면에서 스위스는 유럽 다른 나라에 낮은 편인데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는 산모와 남편에게 각각 4개월이 주어지고 프랑스에서는 산모에 16주(산전 6주 산후10주 그리고 남편은 탄생휴가 3일, 유급휴가 11일 해서 14일이었으나 2021년 7월부터 28일로 길어진다).
인구 9천 명이 살고 있는 랑나우는 베른과 루체른의 중간에 있는 산동네이며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다. 랑나우는 에멘탈 치즈 말고도 2백 년 전부터 도자기와 구리 세공으로 유명하며 스위스의 주요 아이스하키 클럽과 경기장이 있는데 우리도 한번 구경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해마다 7월의 “재즈 밤” 축제와 3년마다 열리는 만화 전시도 인기를 끌고 있으며 매달 한 번씩 들판에서 열리는 시장에 가면 온갖 농산물의 판매장과 황소, 염소, 말, 개들의 동물거래가 있다. 그리고 또한 에멘탈 치즈와 농갓집의 술 쉬납스 등이 푸짐하게 펼쳐져 있는가 하면 역인들의 전통 의상도 구경삼아 볼 만하다. 에멘탈의 거주자 대부분은 독어의 스위스 사투리를 쓴다. 말이 아주 느린 게 특징인데 한국에서 말이 느리기로 유명한 충청도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대체로 말수가 적고 사귐성이 없어 타지방이나 외국인으로 접촉하기가 쉽지 않아 2년 동안 우리는 고작 두세 가족과 가까이 지냈을 뿐이다. 그럼에도 랑나우는 우리가 결혼을 하고 첫애를 얻은,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 가족사의 시발점이어서 우리에겐 잊을 수 없는 곳이 돼버렸다. 거기에다 우리가 떠난 뒤에 외과 병동의 새 과장으로 들어온 스위스 친구가 한국 간호사 출신인 부인과 랑나우에 정착하면서 이래저래 그곳을 자주 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