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마리암’이 살해당했다
글 오민정 편집위원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며 습관적으로 뉴스를 트는 버릇을 당분간만이라도 없애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카불 공항에는 오늘도..”라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들려올 때, 한숨을 쉬면서도 차마 다른 곳으로 채널을 돌리지 못했다. 여지없이 오늘도 아프가니스탄 관련 뉴스로 아침을 시작하며 저런 가슴 철렁한 뉴스보다는 한결같이 바보 같은 우리나라 정치 뉴스가 차라리 정신건강에는 더 낫겠다고 궁시렁거리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창밖에는 늦은 장맛비가 퍼붓고 있었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 카불의 비극
아프가니스탄에서 20년 만에 다시 탈레반의 통치가 시작됐다. 올해 5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이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은 탈레반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2021년 8월 15일,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불을 장악하고 재집권에 성공했다. 미군이 철군을 시작한 지 약 3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여전히 아침 뉴스는 아프가니스탄의 시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기 위해 일어난 사건 사고로 가득했다.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이 길에서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부터 카불 공항에서 사람들이 비행기에 매달렸다가 추락하고 아기가 탈출 인파에 압사했다는 끔찍한 소식. 그리고 거기에 한술 더 떠 오늘은 난민수용에 대한 유럽의 빗장걸기와 우리나라에서도 극렬한 찬반논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이야기 등 어디로 눈을 돌리던 지 온통 절망적인 뉴스 일색이었다.
출근하는 내내 틀어 놓은 유튜브에서는 어떤 연유인지 모를 알고리즘으로 며칠 전 “(철군을) 후회하지 않는다”던 바이든의 연설과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던 당선 직후 바이든의 슬로건을 비웃는 영상, “카불점령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이 싸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영상이 차례로 재생됐다. 무능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 추락하는 바이든의 지지율 따위야 내가 알 바 아니지만, 냉혹한 국제 정치와 무능한 정부로 인해 절망과 공포에 빠진 여성들과 아이들은 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보 이슈로 소비되는 전쟁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바이든의 행보는 ‘미국 우선주의’가 여전히 바이든 정권에서도 지속되고 있으며,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탈레반의 귀환이 비단 남의 문제만은 아닐 수 있다는 자각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한다. 아무리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번 아프가니스탄과 대만·한국·북대서양조약기구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미국의 국익과 관련해 얼마나 중요한지에 따라 우리도 아프가니스탄처럼 저런 문제를 겪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이른바 “문제의 내제화”가 이뤄졌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다음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이 사건을 계기로 내년 우리나라 대선에서 안보가 커다란 이슈가 될 것이며, 이 이슈가 과연 누구에게 더 유리할까였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오히려 선거용 안보프레임의 귀환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선 전문가들의 말처럼 탈레반의 귀환과 아프가니스탄의 무법지대가 정작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서도 뉴스와 그 동안의 논의에서는 이와 관련한 여성들의 생명과 안전, 인권은 빠져있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나는 한국인이라서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보다 먼저 보편적 인권이 짓밟히는 것에 대한 분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로지 자신을 지워버려야만, 모든 자유를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그 가혹함에 대한 이야기는 기껏해야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르카 가격의 폭등’, ‘부르카와 히잡의 차이’라거나 ‘시대착오적 율법’과 같은 뻔한 이야기로 상징화될 뿐이었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필요하다
물론, 바이든이 그가 부르짖던 여성의 인권보다 미국의 실리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군의 희생과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 등 명분도 실리도 없는 싸움에서 철군은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철군이 마냥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에 대해 미국에 원죄가 남아있는 한, 그들의 이번 철군은 야만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저 아프가니스탄은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는 위험한 곳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에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의 마리암과 라일라처럼 ‘인권’을 존중받아야 할 여성들과 아이들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희망은 오로지 국제사회의 관심뿐이다. 우리가 정말 탈레반의 귀환의 마냥 ‘남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문제를 이제 더 이상 미국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