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소멸, 그 아름다운 순환을 붙드는 찰나
글 김회경 전주세계소리축제 대외협력부장
모든 생명을 가진 것들이 그러하듯, 한 사람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도 아주 작은 씨앗에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그 씨앗이라는 것이 전광석화처럼 흩어질 부지불식간의 우연일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에겐 운명으로 거머쥐게 될 찰나의 인연일 수도 있겠다.
기록 사진가 유백영. ‘사진작가’나 ‘작가’라는 수식으로 더 많이 알려진 그이지만, ‘기록 사진가’라는 표현이 훨씬 더 그를 설명하기엔 적확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무던하고 영민하며, 독수리처럼 크고 먼 시야를 가진 인내와 집념의 기록 사진가. 그를 만나본 감상은 그렇다.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전광석화 같은 찰나였으나, 그는 그것을 붙들어 오랫동안 그만의 시간과 세월로 숙성시켰다. 그가 찍어 온 수많은 기록사진처럼….
법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사진은 단순한 ‘업무’의 연장이었다. 법원을 방문한 외빈들을 찍으며 사진 현상소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우연히 ‘공모전’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마음이 쏠렸다. 그해가 1980년이었다. 그것이 기록 사진가로 살아온 40여 년 세월의 씨앗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가 서예를 닦아온 덕에 그 역시 서예와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사진 공모전’은 예술을 가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출구이자 로망이 되어 들끓었다. 일이 아닌, 작가로서의 출사를 마음에 두고 처음으로 찍은 사진은 남원 요천의 섶다리였다. 수십 개의 필름을 써 가며 찍고 또 찍었다.
“작품성은 모르겠지만, 현상소 하던 분이 앞으로 사진 잘 찍겠다고 칭찬을 해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필름 아까워하지 않는 걸 보니 뭘 해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한 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첫 공모전 도전에 입선을 하고선 내내 풍경 사진에 몰두했다. 그러다 ‘기록’이라는 주제에 조금씩 눈뜨기 시작하는 사건들이 생긴다. 박물관에서 근무하던 한 지인이 우리나라는 의미 있는 중요 기관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매우 인색하고 인식이 빈약하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중요한 시설의 배관이나 전기가 기록된 도면도 없고, 시간이 가면서 다 폐기해 버린다는 거예요. 그에 반해 일본은 설계 도면부터 건물을 짓는 과정까지 속속들이 다 기록해 놓는다고 얘길 해요. 그때부터 기록이라는 게 매우 중요하구나 하는 인식이 생긴 거죠.”
이를 계기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록사진을 찍고 싶다고 자원했고, 근무하던 법원의 이전을 지켜보며 이를 기록하는 데에도 열중했다. 그런 한 켠으로 풍경 사진은 여전히 그의 프레임 속에 차곡차곡 담겨지고 있었다.
이 풍경 사진들로 그는 1992년 문화체육부에서 추진하는 남북 사진작가 교류전에 선발되어 남한을 대표하는 10인의 사진작가로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담은 역사적인 전시에 참여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사건(?)은 그의 사진 인생에 하나의 큰 획을 그은 계기로 보인다. 천편일률적인 자연이나 풍경 사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주제를 갖고 싶다는 열망이 싹튼 것이다. 아마 작가로서의 자존심과 차별성에 대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작가로서 그가 관심을 가진 첫 주제는 일출과 일몰이었다. 흔히 보는 반듯하고 장엄한 태양은 아니었다. 조금은 찌그러지고 가려진 태양들이 주를 이뤘다. “왠지 끌렸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조금 더 입체적이고 일그러진 그림 속에서 새로운 감정을 끌어내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이 사진들은 1998년 한일 교류전에 초대받아 밀레니엄을 주제로 전시됐는데, 이 크고 영예로운 행사를 뒤로하고, 그는 또 한 번 새로운 변신을 갈망한다.
대형 사진전이 끝날 때마다 오랫동안 천착해 온 프레임의 대상들을 옮겨간 이유는 무얼까. 이미 대중들에게 선보인 주제들은 더 이상 그의 열정을 끌어당기지 못했다. ‘새롭고 더 새로운 것’을 향한 작가로서의 의무감 혹은 자존심.
그 후로 관심을 가진 주제는 겨울 지리산에서 마주한 얼음 세계였다. 얼음은 프레임 속에서 무궁무진한 변신을 거듭했다.
“어떤 평론가가 ‘얼음을 보석처럼 찍었다’라고 표현을 했어요. 얼음을 주제로 한 사진을 계속 찍었지만 한 사진도 같은 느낌이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독특하다고 해요. 처음 지리산에서 본 얼음은 정말로 영롱했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을 끌어당기더라고요. 주제를 바꾸는 이유는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그를 가장 많이 알린 계기는 공연 전문 사진작가라는 이력이었다. 2001년 한국소리문화의전당 개관 기념 사진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그이지만, 그가 소리전당에서 열리는 공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 본인의 제안으로부터 시작됐다. 그 후로 20여 년간 무려 2,300여 개에 이르는 공연을 도맡아 찍어왔다. 당시엔 소리전당이 전국적으로도 몇 안 되는 대형 공연시설이었다. 이곳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공연을 기록해 오는 동안 그를 향한 예술계의 존경과 감사도 깊어져 갔다. 공연 사진들은 그에게 “수많은 인생을 살게 한 경험”이었다.
“공연 하나하나에 그 사람의 인생이 있거든요. 그 공연들을 제가 다 기록해왔으니, 제가 그 사람들의 인생을 함께 산 거 아니겠나, 그러니 저는 수많은 인생을 산 사람이죠.”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그는 전주교구와의 인연을 매개로 전국에 있는 수많은 공소(公所)들을 기록하기도 했다. 옛 천주교 공동체의 상징이라 할 작은 공소들이 하나둘 사라져가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특유의 집념으로 공소뿐 아니라 수많은 천주교 역사를 그의 사진 속에 담아냈다. 그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던 사람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고, 기록에 대한 의미와 필요들도 조금씩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자니, 문득 그의 컴퓨터 하드 디스크가 궁금해진다. 셀 수도 없는 이 수많은 사진들을 어떻게 보관하고 있을까.
“외장하드에 인덱스를 만들어서 잘 정리해 놨어요. 제가 죽어도 누군가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만들어놨죠. 그래야 사진을 찍어온 세월이 의미가 있죠.”
그에겐 아직 공개하지 않은 또 다른 테마가 있다. 올해까지 딱 18년째다. 전국의 기찻길과 기차역을 기록해 온 세월이 말이다. 그가 기록해 온 기차역 사진들이 하나 같이 뭉클하다. 이건 비밀 아닌 비밀이지만, 그가 가장 애착을 두는 사진 주제가 바로 이 기차다.
“어느 날 친구가 일본 사람들이 한 달씩 휴가 내서 전라선이며 정미소를 찍어 가는데 왜 한국 작가들은 이걸 기록하지 않느냐고 묻더라고요. 기차도 정미소도 일본 식민시대와 관련이 깊죠. 그 말을 듣고 꽤 결의를 갖게 된 것 같아요. 내가 기록해야겠다!”
마지막 영업을 앞둔 기차역, 이 역을 지나는 마지막 기차, 그리고 이내 불이 꺼진 기찻길.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기록이라는 의무만으로 이 세월을 지나올 수 있었을까.
“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100년 뒤 더욱더 가치가 빛나는 것이 기록의 힘이죠. 이 지난한 길이 저에겐 ‘가지 않은 길’이었어요. 앞으로 얼마나 더 사진을 찍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길을 계속 가고 싶어요.”
그는 또 “사진은 나무와 같다”고 표현한다. “지금의 묘목이 예뻐서가 아니라, 10년 후, 50년 후, 100년 후 가치가 있는 나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심어야 해요. 기록 사진도 똑같습니다. 훗날의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며 찍어야 해요.”
생계도 아니고 누가 시켜서도 아닌데, 어떻게 40년 동안 쉼 없이 이 일을 해 올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냥 하는 거”라고 답한다.
체화된 것들은 설명하기 어렵다. 사진은 이미 ‘그 자신’이 되었던 것이다. 찰나의 우연을 운명으로 붙들어 놓은 유백영의 사진 인생 40년, 그 길이 꼭 사진의 본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통해 기록은 ‘실존, 그리고 100년 후의 가치’를 함축하는 말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사진은 실존의 기록이고 보존된다는 전제가 있을 때 더 큰 가치가 있다.
그의 기록 속에는 육로가 들어서기 전 선유도의 마지막 항해와 발전되기 전의 전주한옥마을도 있다. 우리 지역 명인명창들의 빛나는 시절도 있다. 실존하는 것만큼 사라지는 것도 아름답다. 소멸은 필히 실존을 기약하기에 그렇다. 그것이 순환의 이치이기에-.
100년 후의 사진이 가치가 있는 것은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동경과 향수, 배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존과 소멸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문명이 그의 프레임 안에서 속삭이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존재했음을, 기억하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