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으로 일상즐기기
김하람 기자
전주를 수식하는 말 중에 ‘천년전주’라는 말이 있다. 전주라는 행정구역이 생긴 지 천년이 됐다는 것. 그만큼 역사와 전통이 유구한 전주에는 많은 유·무형 문화유산들이 있다. ‘천년’, ‘역사’, ‘전통’, ‘문화유산’ 이런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창의적이고 개방적이기보다는 어딘가 고리타분하고 내 일상과는 떨어져있는, 사극이나 관광지에서, 역사책에서 볼 법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여기에 썰지 연구소 소장 설지희 씨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의자는 문화유산인가 아닌가. 문명의 시작에서부터 등장한 의자는 우리 일상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으로 지금까지 그 형태와 쓸모를 이어오고 있다. 이렇듯 문화유산은 우리 일상 속에 존재한다. 썰지 연구소는 지역 일상의 문화유산을 알리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일상 속 문화유산
썰지 연구소의 키워드는 지역문화, 문화유산, 삶의 이야기 세 가지이다. 지역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조사, 연구, 아카이빙 및 콘텐츠 개발, 제품 브랜딩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썰지 연구소 소장이자 문화유산 큐레이터라는 낯선 직함을 가진 설지희 씨는 문화유산과 대중을 매개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장인분들이나 문화유산에 대한 내용을 생각보다 접하기 어려워요. 자세히 나와있는 곳도 드물고, 내용도 거의 유사하죠. 또 전통공예품을 구입하고 싶어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인터넷에 또는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들이 검증된 제품인지 알기 어려워요. 대중들이 장인과 문화유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프롬히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프롬히어’는 대중화에 포커스를 맞춘 온라인 쇼핑몰로, 물건을 먼저 내세우는 기존의 쇼핑몰이 아닌, 제작자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의 가치를 전달하는 플랫폼이다. 현재 프롬히어에서는 이종덕 방짜유기장의 싱잉볼과 악세서리, 김동식 선자장의 부채, 그리고 솟대 디퓨저를 만나볼 수 있다. 솟대 디퓨저는 지역문화와 문화유산을 이 시대에 맞춰 새롭게 개발한 제품이다. 솟대 장인와 김종오와 남부시장 청년몰 두린캔들, 썰지연구소가 함께 힘을 합쳐 마을을 지키던 솟대를 내 방을 지키는 솟대로 재탄생시켰다. 썰지연구소는 앞으로 더 다양한 장인과의 인터뷰, 문화유산 조사 연구를 통해 제품군을 늘려갈 예정이다.
“제가 하는 것은 예전에 쓰던 것, 잊혀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건강하게 다시 만들어주는 것이에요. 방법은 다양해요. 기록을 할 수도 있고, 전시나 원데이 클래스로 알릴 수도 있고, 새롭게 재해석해서 재탄생시킬 수도 있죠.”
작년부터 진행한 ‘선조들의 대충의 미학 발굴 공모전’도 같은 맥락에서 기획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굉장히 디테일이 살아있고 기술도 완성도 높으며 조형미 있는 명품들이 많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다. 기술이 퇴화한 것은 아니다. 선호하는 것이 달라진 것이다. 선조들의 인간미 넘치고 위트 넘치는 모습을 조명하고 주목하자는 취지로 진행된 대충의 미학 공모전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문화유산을 친근하게 여기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메신저 이모티콘 같은 것들도 보면 대충 그린 듯한 것들이 인기가 많아요. 그런 B급 감성이 트렌드인거지 그림을 정교하게 못 그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조선시대에도 그랬어요. 당시의 중국과 일본에 비해 마감을 조금 안 한 것들이 있었어요.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곳, 불상의 뒤통수 같은 곳의 마감을 잘 안하는 거예요. 저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굉장히 공감되지 않나요? 마치 침대에서 휴대폰을 보는 저의 모습 같기도 해요.(웃음) 우리나라만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있는데, 너무 명품만 우리나라의 것이라고 하기 보다는 다른 부분도 조명해서 이것을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많이 두는 것도 한국의 문화재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기획했어요.”
이 석상은 금천구 호암산 등산로에 위치한 조각상으로 제가 어린 시절 부터 아버지와 등산을 하러 가면 산 정상에 항상 보이던 조각상입니다. 이 조각상을 볼 때마다 문화재인데도 참 대충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리나 꼬리도 해태 같은 다른 조각상과 달리, 특별하거나 사실적이지 않고 단순해 보입니다. 몸통에는 다른 석수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한 장식 같은 것도 없습니다. 또한 표정도 세심하기보다는 선으로 쓱쓱 그어놓은 듯한 어찌 보면 하찮아 보이는 그런 문화재였습니다. 하지만 제 추억 속에는 어른이 되어도 꾸준히 남았습니다. (2020년 대충의 미학 공모전 우수상 / 석구상)
금동대향로나 고려 상감청자 같이 잘 알려진 문화유산뿐만 아니라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딱 봐도 정말 대충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조각상도 우리가 사랑할 문화유산임을 생각하게 된다.
문화유산과 동행하기
지난 여름 썰지연구소는 지역 문화와 예술적 자산을 소개하는 ‘문화역서울 284 RTO 365 – 문화장(場)’에 ‘나에게 보내는 서신’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참여했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제한되는 코로나 시국에 나에게 더욱 집중하고, 그 시간동안 문화유산과 동행할 수 있도록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한지장 김인수의 한지로 만든 편지지에 나를 위한 서신을 쓰고, 그 시간동안 전주 방짜유기장 이종덕이 직접 만든 싱잉볼을 중심으로 피아노, 거문고와 결성한 ‘세악사프로젝트’의 소리가 흐른다. 글을 쓰는 시간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전통 발효차와 향도 함께 구성했다. 싱잉볼과 전주 한지, 합죽선, 지우산 등의 공예품을 소개한 전시를 보고 나가는 길에 감상을 감상을 적을 수 있는 코너를 마련했다.
“전통 공예품 전시의 감상평은 대부분 ‘우리나라의 전통을 알게 되어 기분이 좋습니다’ 이런 내용인데, 오히려 그런 내용이 없어서 좋았어요. ‘오늘 하루가 이것 때문에 행복함으로 바뀌었습니다’ 라든지, ‘오늘 여기에 찾아온 나를 칭찬한다’ 라든지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어요. 사실 문화유산은 전통과 현대로 나눌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의자는 문화유산이 맞는데 인지를 못하잖아요. 이게 맞는거예요. 인지를 못하다가도 의자의 역사를 말할 수 있는 것이 가장 건강하게 문화유산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이번 서신키트에서 이런 것들을 느꼈어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편지지는 전주한지로 만들고 발효차도 있고 전통향도 있다더라’ 딱 이정도요.”
우리는 전통과 현대를 나눠서 이야기 하곤 한다. 그렇지만 이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 대표는 말한다. 서울과 지방,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대기업과 중소기업, 이런 식으로 이분화하고 한쪽은 선, 한쪽은 악으로 생각하는 것이 근대적 사고방식인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근대를 넘어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지만, 여전히 근대적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고 있다.
“전통과 현대는 구분할 수 없어요. 구분해서도 안 되고요. 사장되는 것들은 좋은 장례식을 치러주면 돼요. 기록을 하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채로 두는 거예요. 누군가 그것을 되살리고 싶으면 의미를 재부여해서 소생시킬 수 있도록. 이날치 밴드도 소생을 잘 시킨 경우죠. 솟대 디퓨저도 같은 맥락이에요.”
삼국시대 때 선호하던 그릇이 있고, 고려시대, 조선 전기, 조선 후기 때 선호하던 그릇의 종류가 다 다르다. 조선 전기에 우리나라 남자들은 다 귀걸이를 찼지만, 선조 때 이를 오랑캐의 문화라 하여 없앤 뒤로는 귀걸이를 차지 않는다. 저고리의 길이도 시대마다 다 다르다. 기술은 흘러가는 것이고, 거기에는 시대적 환경이 담겨 있다. 전통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더욱이 문화의 영역은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다. 그래서 나온 말이 ‘문화유산’이다. 전통과 현대로 나누는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용어다. 세대를 거쳐 내려온 문화유산을 어느 지점으로 끊어서 전통과 현대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근대와 현대의 과도기 사이에 있기 때문에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썰지연구소는 그 사이에서 사람들이 전통을, 문화유산을 건강하게 대할 수 있을 때까지 일상의 문화유산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하고 있다.